오늘도 하루분의 울컥을 삼켰습니다
일, 연애, 결혼, 역할에 수시로 울컥하는 여자의 말하기
대학물도 먹지 않은 채 ‘글밥’을 먹게 된 문필하청업자이고, 일찍 결혼하여 아내로 엄마로 가사와 육아는 물론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노동계급 여성, 은유. 《글쓰기의 최전선》《쓰기의 말들》로 2015년(채널예스), 2016년(시사인) 2년 연속 ‘가장 주목할 만한 올해의 작가’에 꼽힌 바 있는 저자는 서른다섯부터 마흔다섯을 경유하면서 엄마, 아내, 딸, 노동하는 여성 등 수많은 존재로 증식되는 자신을 추스르며 ‘삶이 굳고 말이 엉킬 때마다’ 글을 썼다. 신간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는 언어가 되지 못하는 일상의 울분을 직시하고 그것을 말하기로 결심한, 한 여자의 분투기다. ‘존재하는 한 이야기하라’는 페미니즘 명제대로 말하기를 시도했고, 그래서 싸움이 불가피했던 지난 십여 년의 일기가 때로는 아프게, 때로는 이윽하게, 때로는 담백하고 유머러스하게 펼쳐진다. 부엌 개수대 위에서 느낀 비루한 일상들, 그것을 정제해 얻어낸 몇 방울의 각성은 긍정의 말들이 가리고 있는 현실의 실루엣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긍정으로 힘을 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긍정 없이 하루분의 울컥을 삼켜야 할 때가 더욱 많기 때문이다. 일, 연애, 결혼, 출산, 육아… 온갖 노릇과 역할 속에 분명히 존재하는 편견과 차별, 외로움과 절망 등 여자의 삶 전반을 기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밝힌 은유의 산문을 통해, 내 안의 여성성에 눈 뜨고 내 감정에 더 근접한 말하기를 시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는 일이 힘에 부치고 싱숭생숭이 극에 달하는 날이면 글을 썼다. 오직 노릇과 역할로 한 사람을 정의하고 성과와 목표로 한 생에를 평가하는 가부장제 언어로는 나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몸에 돌아다니는 말들을 어디다 꺼내놓고 싶었다. 꺼내놓고 싶은 만큼 꺼내놓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고유한 슬픔일지라도 언어화하는 순간 구차한 슬픔으로 일반화되는 게 싫었다. 우리가 입을 다무는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던가. 말하고 싶음과 말할 수 없음, 말의 욕망과 말의 장애가 충돌하던 어느 봄날, 나는 이미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9쪽)
“착한 여자는 천당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
싸움하지 않던 여자가 싸움하는 여자가 되기까지
이 책에 담긴 싸움 목록은 크게 네 가지다. 여자라는 본분, 존재라는 물음, 사랑이라는 의미, 일이라는 가치. 생에 대한 감각이 굳을 때마다 적어내려간 글의 마디마디는 촉수가 되어 다시 감각을 깨웠다. 예민해진 감각만큼 싸움 목록이 늘었다. 존재는 흐른다고 하던가.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은 싸움하는 사람이 되었고, 싸울 때마다 질문은 탄생했다.
1부 [여자라는 분분]에서는 “어머니가 해주신 밥 먹으면서 이 글을 썼다. 어머니가 쓰신 책이므로 어머니께 드린다”는 빤한 인사처럼 정해진 수순을 밟듯 ‘밥하는 존재’로 자리매김되는 여자의 삶을 이야기한다. 왜 엄마에게 행복은 늘 충족 유예 상태로 머물러야 하나, 엄마는 왜 크고 좋은 수박 한 덩이 마음껏 못 사드시고 살았을까, 남자에게 여자 말만 잘 들으면 된다고 말하는 김제동의 말은 왜 문제인가, 왜 한쪽의 안락을 위해 한쪽이 수고로워야 할까. 홀로 아이를 낳고 유기한 어린 산모는 어떤 밤을 보내고 있을까 등 물음을 따라 이어진 글은 여자에게 짐 지워진 본분에 근본적 회의를 던진다.
―자기 욕망을 일인칭 시점에서 구사할 수 있는 언어는 여전히 모자라다. 착한 여자는 천당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는 말대로, 일상의 금기는 넘나들지만 몸에 그은 선은 제자리다.(36쪽)
―본분은 질 나쁜 꿈처럼 여자의 삶에서 떨쳐지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일상에 불쾌하게 끼어드는 걸 나도 경험한다. 학생의 본문은 졸업이 있어도 여자의 본문은 졸업이 없다.(48쪽)
2부 [존재라는 물음]에서는 존재를 확장하려는 노력 속에서 나와 불화하지 않고 관계 맺는 법을 이야기한다. 상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글 쓰는 일을 하는 나는 왜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 됐을까, 이름도 바꿔보고 직장도 옮겨보며 매일 노동하고 살아가는 존재의 자리매김은 왜 이토록 어려운 걸까 등 물음에 이어진 글에서는 존재의 위치지음이 타인의 기대 속에 사는 게 아니라 살면서 빼앗겨서는 안 되는 것, 나의 고유한 감각과 느낌들을 잘 붙잡아두고 삶의 불가해마저 받아들이는 것이라 이야기한다.
―연심의 변심 혹은 절심은 언제나 비약으로 다가오는 사건이지만 생물성이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이치이기도 하다. 나도 그랬다. 어디든 데려다주는 날개이자 비바람을 막아주던 존재가 불편하고 갑갑해지는 순간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엄마가 그랬고 연인이 그랬고 친구가 그랬고 동료가 그랬다. 어떤 음악이, 어떤 책들이 그랬다. 세월이 그렇게 했다. 생의 시기마다 필요한 옷이 있고 어울리는 색과 취향이 있듯이 삶의 체형에 맞게 인연도 변해간다.(130쪽)
―생의 빈틈이나 존재의 허전함을 사람으로 채우려는 건 무리한 욕심이다. 그래서 음악이 필요하고 책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말 없는 그것들이 품은 살 같은 말에 기대어 살아가는 나를 본다. 나는 사람과 관계 맺는 법, 사람을 사랑하는 법에서 점점 더 멀어져간다. 그저 연연하지 않을 만큼 가까워지기를 희망한다. 그리 사는 영혼이 문득 가여운 거다.(154쪽)
3부 [사랑이라는 의미]에서는 사랑이 아니라면 기나긴 인생은 어떻게 살아지는 걸까, 한평생 한 사람의 곁이 되는 일은 사랑 없이 가능할까, 말과 살을 섞다가 살만 섞어도 혹은 말만 섞어도 사랑일까 등의 물음을 통해 사랑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고, 어떤 사랑이든 궁극에는 남는 장사라며 능동적 사랑 예찬론을 펼친다.
―안전한 삶보다 모험적 사랑에 존재를 던지는 선택은 지리멸렬한 관계의 파고를 넘는 평범한 삶만큼 존중받고 보존해야 할 사랑의 역사 아닌가.(198쪽)
―카페라테 거품처럼 부드럽고 치즈 케이크처럼 촉촉하고 달달한 사랑을 기다리면, 사랑은 영원히 없다. 네가 누군가의 삶을 품고 응원해주는 방법으로 건강한 사랑을 창조해봐. 현실을 회피하고 관념으로 차단하면 기회는 점점 줄어들어. 이혼한 사람, 아픈 사람, 돈 없는 사람을 사랑하면 힘들 거라는 건 어디까지나 생각이고 추측이고 통계야. 현실로 돌파해보면 그 안에 다른 진실이 있을지도 몰라. 니체도 그랬거든. 퇴화는 베푸는 영혼이 없는 그런 곳에서 일어난다고. 모든 사랑은 남는 장사다. 나는 이 명제 열렬히 지지한다.(205쪽)
4부 [일이라는 가치]에서는 향락의 거리는 얼마나 많은 귀한 자식들의 노동으로 굴러갈까, 철학자와 식당 노동자가 동등한 직업인으로 존중받는 세상은 요원한 일일까. 한 줌의 권력자를 위해 다수가 노예처럼 일하는 슬픔 사태는 왜 지구를 뒤덮는가.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고 존재가 존재를 닦달하지 않는 세상은 어떻게 가능할까 등의 물음을 통해 밥을 위한 삶, 일과 삶 사이의 경계에서 긴장을 견디는 기예 같은 하루, 노동을 사고파는 일의 쓸쓸함을 이야기한다.
―모든 노동하는 사람의 수고로움이 들어 있는 말. 한 병 딸까요? 산다는 것은 내 안에 무언가를 계속 따야 하는 일이리라.(247쪽)
―나는 밥벌이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거기에 붙들릴까 염려한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거주하는 이 세계의 일상성이 무너질까 두려워할 때 발생하는 것이 ‘불안’이라고 했는데, 나는 내가 거주하는 이 세계의 일상성이 강고해질까봐 두렵다.(269쪽)
존재의 빈곤-언어의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저자는 잘 싸우기 위한 삶의 웅변술로서 쓰고 읽고 말하는 것을 택했다. 살다 보면 맥락 없게도 후진 것들이 힘이 셀 때가 많다. 무시로 나의 존엄을 해치는 말과 행동을 일삼는 대상이 언제나 더 당당하다. 꿋꿋하다. 저 당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