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하루분의 울컥을 삼켰습니다
일, 연애, 결혼, 역할에 수시로 울컥하는 여자의 말하기
대학물도 먹지 않은 채 ‘글밥’을 먹게 된 문필하청업자이고, 일찍 결혼하여 아내로 엄마로 가사와 육아는 물론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노동계급 여성, 은유. 《글쓰기의 최전선》《쓰기의 말들》로 2015년(채널예스), 2016년(시사인) 2년 연속 ‘가장 주목할 만한 올해의 작가’에 꼽힌 바 있는 저자는 서른다섯부터 마흔다섯을 경유하면서 엄마, 아내, 딸, 노동하는 여성 등 수많은 존재로 증식되는 자신을 추스르며 ‘삶이 굳고 말이 엉킬 때마다’ 글을 썼다. 신간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는 언어가 되지 못하는 일상의 울분을 직시하고 그것을 말하기로 결심한, 한 여자의 분투기다. ‘존재하는 한 이야기하라’는 페미니즘 명제대로 말하기를 시도했고, 그래서 싸움이 불가피했던 지난 십여 년의 일기가 때로는 아프게, 때로는 이윽하게, 때로는 담백하고 유머러스하게 펼쳐진다. 부엌 개수대 위에서 느낀 비루한 일상들, 그것을 정제해 얻어낸 몇 방울의 각성은 긍정의 말들이 가리고 있는 현실의 실루엣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긍정으로 힘을 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긍정 없이 하루분의 울컥을 삼켜야 할 때가 더욱 많기 때문이다. 일, 연애, 결혼, 출산, 육아… 온갖 노릇과 역할 속에 분명히 존재하는 편견과 차별, 외로움과 절망 등 여자의 삶 전반을 기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밝힌 은유의 산문을 통해, 내 안의 여성성에 눈 뜨고 내 감정에 더 근접한 말하기를 시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는 일이 힘에 부치고 싱숭생숭이 극에 달하는 날이면 글을 썼다. 오직 노릇과 역할로 한 사람을 정의하고 성과와 목표로 한 생에를 평가하는 가부장제 언어로는 나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몸에 돌아다니는 말들을 어디다 꺼내놓고 싶었다. 꺼내놓고 싶은 만큼 꺼내놓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고유한 슬픔일지라도 언어화하는 순간 구차한 슬픔으로 일반화되는 게 싫었다. 우리가 입을 다무는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던가. 말하고 싶음과 말할 수 없음, 말의 욕망과 말의 장애가 충돌하던 어느 봄날, 나는 이미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9쪽)
“착한 여자는 천당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
싸움하지 않던 여자가 싸움하는 여자가 되기까지
이 책에 담긴 싸움 목록은 크게 네 가지다. 여자라는 본분, 존재라는 물음, 사랑이라는 의미, 일이라는 가치. 생에 대한 감각이 굳을 때마다 적어내려간 글의 마디마디는 촉수가 되어 다시 감각을 깨웠다. 예민해진 감각만큼 싸움 목록이 늘었다. 존재는 흐른다고 하던가.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은 싸움하는 사람이 되었고, 싸울 때마다 질문은 탄생했다.
1부 [여자라는 분분]에서는 “어머니가 해주신 밥 먹으면서 이 글을 썼다. 어머니가 쓰신 책이므로 어머니께 드린다”는 빤한 인사처럼 정해진 수순을 밟듯 ‘밥하는 존재’로 자리매김되는 여자의 삶을 이야기한다. 왜 엄마에게 행복은 늘 충족 유예 상태로 머물러야 하나, 엄마는 왜 크고 좋은 수박 한 덩이 마음껏 못 사드시고 살았을까, 남자에게 여자 말만 잘 들으면 된다고 말하는 김제동의 말은 왜 문제인가, 왜 한쪽의 안락을 위해 한쪽이 수고로워야 할까. 홀로 아이를 낳고 유기한 어린 산모는 어떤 밤을 보내고 있을까 등 물음을 따라 이어진 글은 여자에게 짐 지워진 본분에 근본적 회의를 던진다.
―자기 욕망을 일인칭 시점에서 구사할 수 있는 언어는 여전히 모자라다. 착한 여자는 천당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는 말대로, 일상의 금기는 넘나들지만 몸에 그은 선은 제자리다.(36쪽)
―본분은 질 나쁜 꿈처럼 여자의 삶에서 떨쳐지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일상에 불쾌하게 끼어드는 걸 나도 경험한다. 학생의 본문은 졸업이 있어도 여자의 본문은 졸업이 없다.(48쪽)
2부 [존재라는 물음]에서는 존재를 확장하려는 노력 속에서 나와 불화하지 않고 관계 맺는 법을 이야기한다. 상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글 쓰는 일을 하는 나는 왜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 됐을까, 이름도 바꿔보고 직장도 옮겨보며 매일 노동하고 살아가는 존재의 자리매김은 왜 이토록 어려운 걸까 등 물음에 이어진 글에서는 존재의 위치지음이 타인의 기대 속에 사는 게 아니라 살면서 빼앗겨서는 안 되는 것, 나의 고유한 감각과 느낌들을 잘 붙잡아두고 삶의 불가해마저 받아들이는 것이라 이야기한다.
―연심의 변심 혹은 절심은 언제나 비약으로 다가오는 사건이지만 생물성이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이치이기도 하다. 나도 그랬다. 어디든 데려다주는 날개이자 비바람을 막아주던 존재가 불편하고 갑갑해지는 순간이 어김없이 찾아왔다. 엄마가 그랬고 연인이 그랬고 친구가 그랬고 동료가 그랬다. 어떤 음악이, 어떤 책들이 그랬다. 세월이 그렇게 했다. 생의 시기마다 필요한 옷이 있고 어울리는 색과 취향이 있듯이 삶의 체형에 맞게 인연도 변해간다.(130쪽)
―생의 빈틈이나 존재의 허전함을 사람으로 채우려는 건 무리한 욕심이다. 그래서 음악이 필요하고 책이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말 없는 그것들이 품은 살 같은 말에 기대어 살아가는 나를 본다. 나는 사람과 관계 맺는 법, 사람을 사랑하는 법에서 점점 더 멀어져간다. 그저 연연하지 않을 만큼 가까워지기를 희망한다. 그리 사는 영혼이 문득 가여운 거다.(154쪽)
3부 [사랑이라는 의미]에서는 사랑이 아니라면 기나긴 인생은 어떻게 살아지는 걸까, 한평생 한 사람의 곁이 되는 일은 사랑 없이 가능할까, 말과 살을 섞다가 살만 섞어도 혹은 말만 섞어도 사랑일까 등의 물음을 통해 사랑은 새로운 생활방식이지 신앙이 아니고, 어떤 사랑이든 궁극에는 남는 장사라며 능동적 사랑 예찬론을 펼친다.
―안전한 삶보다 모험적 사랑에 존재를 던지는 선택은 지리멸렬한 관계의 파고를 넘는 평범한 삶만큼 존중받고 보존해야 할 사랑의 역사 아닌가.(198쪽)
―카페라테 거품처럼 부드럽고 치즈 케이크처럼 촉촉하고 달달한 사랑을 기다리면, 사랑은 영원히 없다. 네가 누군가의 삶을 품고 응원해주는 방법으로 건강한 사랑을 창조해봐. 현실을 회피하고 관념으로 차단하면 기회는 점점 줄어들어. 이혼한 사람, 아픈 사람, 돈 없는 사람을 사랑하면 힘들 거라는 건 어디까지나 생각이고 추측이고 통계야. 현실로 돌파해보면 그 안에 다른 진실이 있을지도 몰라. 니체도 그랬거든. 퇴화는 베푸는 영혼이 없는 그런 곳에서 일어난다고. 모든 사랑은 남는 장사다. 나는 이 명제 열렬히 지지한다.(205쪽)
4부 [일이라는 가치]에서는 향락의 거리는 얼마나 많은 귀한 자식들의 노동으로 굴러갈까, 철학자와 식당 노동자가 동등한 직업인으로 존중받는 세상은 요원한 일일까. 한 줌의 권력자를 위해 다수가 노예처럼 일하는 슬픔 사태는 왜 지구를 뒤덮는가.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고 존재가 존재를 닦달하지 않는 세상은 어떻게 가능할까 등의 물음을 통해 밥을 위한 삶, 일과 삶 사이의 경계에서 긴장을 견디는 기예 같은 하루, 노동을 사고파는 일의 쓸쓸함을 이야기한다.
―모든 노동하는 사람의 수고로움이 들어 있는 말. 한 병 딸까요? 산다는 것은 내 안에 무언가를 계속 따야 하는 일이리라.(247쪽)
―나는 밥벌이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거기에 붙들릴까 염려한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거주하는 이 세계의 일상성이 무너질까 두려워할 때 발생하는 것이 ‘불안’이라고 했는데, 나는 내가 거주하는 이 세계의 일상성이 강고해질까봐 두렵다.(269쪽)
존재의 빈곤-언어의 빈곤에서 벗어나려면?
저자는 잘 싸우기 위한 삶의 웅변술로서 쓰고 읽고 말하는 것을 택했다. 살다 보면 맥락 없게도 후진 것들이 힘이 셀 때가 많다. 무시로 나의 존엄을 해치는 말과 행동을 일삼는 대상이 언제나 더 당당하다. 꿋꿋하다. 저 당당
이혜원
4.0
ㅣㅣㅣㅣㅣㅣㅣ 마르크스가 그랬다.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과로’를 내적으로 규제할 그 어떤 선험적 원리를 갖지 않는다고. 자본주의가 개별 자본가의 선의와 악의와는 무관하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삶도 노동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부장제는 ‘어머니의 과로’를 내적으로 규제할 어떤 선험적 원리를 갖지 않았다. 능력이든 랜덤이든 운명이든 여성 일부가 좋은 남자를 만나는 건 우연이겠으나 전체로서 여성은 가부장 질서와 규범에 이미 속해 있다는 얘기다. ㅣㅣㅣㅣㅣㅣㅣㅣ “대통령이 애를 안 낳아봐서 그렇다”는 말까지 돌았다. 기사에 달린 댓글로만 보다가 나는 얼마 전에 직접 듣게 되었다. 하필 애를 안 낳아본 친구가 있는 자리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다른 여성이 대뜸 말했다. 박근혜가 엄마가 되어보지 못해 생때같은 아이들의 죽음에 공감하지 못하고, 그래서 세월호 문제가 미궁에 빠졌다는 것이다. 나는 조마조마했지만 모두가 무안해질까봐 어물쩍 넘어갔다. 다시 생각해도 참 무심한 논리다. 한 사람의 지적·정서적 무능이 출산 경험의 부재에서 왔다는 발상. 다산할수록 성불한다는 말인지 뭔지 모르겠다. 그건 애 낳지 않은 여자들에 대한 집단적 모독이고, 애 낳은 여자들에 대한 편의적 망상이다.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 형성은 ‘출산’ 유무와 상관이 없다. 남자의 성숙이 ‘군필’ 유무와 무관한 것과 같은 이치다. ㅣㅣㅣㅣㅣㅣㅣㅣ 나에게 엄마로 사는 건 인격이 물오르는 경험이 아니었다. 외려 내 안의 야만과 마주하는 기회였다. 태아가 물컹한 분비물과 함께 나오는 출산의 아수라장을 경험하는 것부터 그랬다. 그 생명체가 제 앞가림할 때까지 나는 혼자 있을 권리, 차분히 먹을 권리, 푹 잘 권리, 느리게 걸을 권리 같은 기본권을 몽땅 빼앗겼다. 그런 전면적이고 장기적인 실존의 침해를 감내하다 보면 피폐해진다. 성격 삐뚤어지고 교양 허물어진다. 육아의 보람과 기쁨을 위안으로 삼기엔 그것과 맞바꿀 대가가 너무 크고 길다. 그 사실을 경험하기 전에는 모른다. 엄마라는 생태적 지위는 성숙에 이르는 여러 기회 가운데 하나일 뿐, 저절로 성불하는 코스가 아니다. 그나마 출산과 육아로 인한 고통의 자산화가 가능하려면 어느 정도 문화적 자원이 있어야 한다. 애 키우고 먹고사느라 하루하루 허덕이는 여성은 그럴 겨를조차 없다. ㅣㅣㅣㅣㅣㅣㅣㅣ 그날 모임에서 나는 김제동의 말을 들려줬다. 개념 있는 연예인의 말이니까, 남자는 애 아니면 개라는 말은 익숙하니까, 처음엔 다들 맞다며 동조한다. 그러나 한번 ‘왜?’ 하고 의심하고 토론하기 시작하면 각성이 일어난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던데 내가 좀 더 현명하게 남자를 이끌었으면 평등한 부부 관계가 되지 않았을까 자책하는 자기 모습을 발견한다. 그렇게 알아간다. 사회 문제에 개입하고 약자 편에서 발언하는 미더운 방송인도, 좋은 삶을 위해 공부하는 여성 자신들도 가부장제 언어를 내면화하고 산다는 사실을. 내면화는 일상화라는 것을 . ㅣㅣㅣㅣㅣㅣㅣ 무조건 남자를 보살피며 살지 않겠다는 여자들이 나타나고 있듯, 무조건 여자 말만 듣고 살아도 되던 남자들이 사라지는 것 같아서다. “여성이 상위 종족”이라는 표현은 권력의 말이다. 노동자를 산업의 역군이라 명명하고 착취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한쪽의 수고로 한쪽이 안락을 누리지 않아야 좋은 관계다. 모든 사건과 사물의 질서를 정의하고 정리하고 판단하고 명령하는 마이크 권력이 줄어들고, 왜 맨날 나인가 회의하는 물음, 화장실 좀 맘 편히 가자는 일상의 억압을 증언하는 목소리가 흘러넘치길 바란다. 그럴 때만 남성의 조화로운 인격 형성을 방해하고 여성의 평화로운 일상 활동을 가로막는 가부장제 언어는 무력해질 것이다. ㅣㅣㅣㅣㅣㅣㅣ 만약 아들한테 엄마 피곤하니까 네가 대충 차려 먹으라고 말했으면 충분히 그랬을 텐데, 괜히 내가 알아서 해줘놓고 뒷북이다. 자식들 밥에 목숨 걸고 자동으로 기능하는 내가 한심한데, 그런 나를 미워할 수는 없으니까 원망의 화살을 아들한테 돌리고는, 이 시추에이션이, 고작 먹고 싸는 일에 에너지를 다 쏟아부어야 하는 삶이 분해서 씩씩거렸다. 역할. 역할의 꽃, 엄마 역할. 역시 ‘역할’은 생각을 요구하지 않는다. 영혼 없이도 가능하다. 현관에 들어서면 나는 엄마가 되어 기차가 레일을 지나가듯 현관에서 부엌으로, 부엌에서 식탁으로, 식탁에서 냉장고로 자동 왕복하는 거다. 사고하지 않아도 그냥 습관대로 하던 대로 막힘없이 수행한다. 이런 걸 무슨 숭고한 모성이라고 말하겠는가. 자기 손에 물 묻히기 싫은 사람들이 지어낸 말일 뿐. 누추하고 번거로운 집안일이다. 내가 엄마라는 사실이 싫은 건 아니다. 엄마 역할로 주어지는 과다한 몫들이 싫다 ㅣㅣㅣㅣㅣㅣㅣ 부모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원초적 불안. 성인이 되어 자기 한 몸 챙길 때까지는 이 세상 모든 아동들은 자기 유지를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겠지. 그러니 안쓰러운 어린 것에게 잘해주어야 하고 최선을 다하고 싶은데 자주 힘에 부친다. 내심 잔인해진다. 이 분열적인 자아를 바라보아야 하기에 엄마로 사는 일은 쓸쓸하고 서러웁다. ㅣㅣㅣㅣㅣㅣㅣ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서 씻지도 못하고 이틀째 널려 있는 빨래를 걷는데도 꼼짝 않고 누워 있는 남편. 결혼 전에 아빠를 볼 때면 좀 궁금했다. 옆 사람 힘든 게 왜 안 보일까……. 나중에 알고 보니 못 본 척하는 게 아니라 아예 안 보이는 거다. 대대손손 소통 불능의 장애를 겪는 남성들. 그렇게 살아도 삶이 유지됐으므로 타인의 심정을 헤아리는 능력이 퇴화한 것이다. 무심함이 무뚝뚝함, 남자다움으로 미화된 데다가 학교나 학원에서 안 가르쳐주니까 관 뚜껑 닫힐 때까지 모른다. ㅣㅣㅣㅣㅣㅣㅣㅣ 아침밥 안 먹고 자란 아이는 전문가들의 경고대로 학습력이 저하될지언정 아침에 해가 뜨듯 밥이 저절로 나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적어도 알지 않을까 싶다. 이걸 모르는 어른이 의외로 많다 ㅣㅣㅣㅣㅣㅣㅣㅣ 나에게 밥은 집밥이냐 외식이냐, 레시피가 간단하냐 복잡하냐, 맛이 있냐 없냐가 아니다. 그 밥을 대체 ‘누가’ 차리느냐의 문제다. ㅣㅣㅣㅣㅣㅣㅣㅣ 전 남자친구는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았든 몰랐든, 성적 책임감이나 고통 감수성이 희박할 개연성이 크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는 절박감에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것이다. 딸의 배가 불러오는 사실을 한집에 사는 부모는 모를 수 있다. 한국에서 가족은 인격적 관계가 아니다. 엄마, 아빠, 딸, 아들의 역할로 각자 바삐 산다. 일주일에 밥 한 끼 얼굴 보고 먹지 못하는 가족이 부지기수다. 여자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상대방의 감정과 기분을 맞춰주고 배려하도록 키워진다. 문제를 터뜨려서 해결하는 분란보다 나 하나만 참으면 유지되는 평화가 익숙하다. 그렇게 신생아 유기범이 된다 ㅣㅣㅣㅣㅣㅣㅣㅣ 갓난아기는 신성한 생명인데 어떻게 버릴 수 있느냐는 물음은 바뀌어야 한다. 신성함은 누구에 의해 어떤 상황에서 규정되는가. 왜 생물학적 아버지인 남자 친구나 부모에게도 말 못하고 ‘혼자서’ 한 생명체를 쏟아내듯 낳고 치우듯 버려야만 했을까. 왜 미혼모로 살아가는 일이 제 몸 아파 낳은 아기를 죽게 내버리는 일보다 더 공포스럽게 되었을까. 미혼모의 학습권 보장을 위해 학교에 유아원을 두는 독일 같은 나라도 있다는데, 왜 우리 사회는 미혼모가 사회 안에 섞여 살아가지 못하고 양육의 짐을 몽땅 떠맡아야 할까 ㅣㅣㅣㅣㅣㅣㅣ 콘돔 사용법부터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 시 대처법,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논의할 수 있는 상담 기관과의 연락법 같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성교육이 절실하다. 하루걸러 뉴스에 오르는 신생아 유기 사건을 보지 않으려면, 우리가 ‘자신이 한 일을 모르는 사람’으로 살지 않으려면 말이다 ㅣㅣㅣㅣㅣㅣㅣ 거리의 아이들을 보면 나 혼자서 생활기록부를 작성했다. 아빠가 알콜중독이고 엄마는 가출했거나 식당에서 일하고. 밤이면 집안에서는 칼로 살 베는 전쟁이 일어난다.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서 아이는 미치거나 뛰쳐나오거나. 언제부턴가 시나리오가 하나 더 늘었다. 아빠나 오빠에게 시달리는 꼬마 소녀들. 자기 욕망을 알기도 전에 타자의 욕망의 도구화된 육체로 긴 밤을 지나야 하고 그 몸뚱이 추슬러 긴 생을 살아야 한다. ㅣㅣㅣㅣㅣㅣㅣ 여자로 태어나서 ㅁㅊ년으로 진화한다는 말은 여자의 연대기에 관한 핵심적 진술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를 읽다가 밑줄 그었던 부분. “미ㅊㄴ 널뛴다는 말은 폭력적이다. 미ㅊㄴ을 미치게 만든 ㅁㅊ놈들의 존재가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새삼 궁금했다. 그 길고 오랜 세월 동안 ㅁㅊ놈들의 존재는 어떻게 생략이 가능했을까. ㅣㅣㅣㅣㅣㅣㅣ 남편의 입장을 내면화한 말들, 결혼한 여자의 행실을 제약하는 발언이 여전히 아무 때나 아무렇지 않게 통용된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그러자 C가 질문하는 여성들을 변호했다. 아마도 그들이 그렇게 살아보지 못해서 그럴 거라고, 자기도 스스로 가둔 여자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ㅣㅣㅣㅣㅣㅣㅣ 그 우편물은 안도감보다 불쾌감만 키웠다. “이웃을 조심(의심)하라”는 메시지가 담긴 이런 행정 조처는 변죽만 울리는 꼴이다. 골목길에 나타난 범죄자라는 편견을 강화해 집안이나 사무실에 ‘상주’하는 가해자를 못 보게 한다. 중략. . . 그러니 집집마다 당도해야 할 것은 가해자의 신상 명세가 아닌, 피해자의 들릴 권리가 담긴 서툰 말이다 ㅣㅣㅣㅣㅣㅣㅣ 신문이 조종하는 대로 사고하고, 광고에 나오는 대로 욕망하는 엄마, 사회적 모성으로서의 엄마. 어떤 개념을 걸어도 ‘엄마’는 문화적 산물이고, 가부장제의 희생양이다. 더 이상 엄마들이 아프지 않은 세상을 위해, 나부터 아프지 않고 울지 않는 엄마가 되는 일이 남았다. 자식이 울까봐 미리 우는 엄마가 아니라, 엄마가 웃어서 자식도 웃게 하는 그런 행복한 엄마들이 많아지는 세상. 엄마가 내게 남겨주신 숙제다. ㅣㅣㅣㅣㅣㅣㅣㅣ 지나가는 말로라도 학벌 중심 사회를 비판하는 지식인들은 거의 고학력자들이었다. 학벌 중심 사회를 비판하면서 학벌 중심 사회를 공고화했고 그 틀을 깨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를 내면화했고 자기 자식을 명문대 보내려고 애썼고, 자신이 어느 대학 몇 학번인지를 자연스레 노출했고 그로 인한 실리를 살뜰히 챙겼다 ㅣㅣㅣㅣㅣㅣㅣ 작년에 모 대학 특강을 갔을 때는 강사료 지급 기준에 석박사 학력 기준은 있어도 고졸 학력 기준은 없어서 새로 만들어야 했단다. 불편해도 괜찮았다. 나의 평범하지 않음, 소수성으로 인해 겪어야 했던 여러 갈래의 경험은 내가 사회학이나 여성학, 철학을 공부하는 데 자양분이 되었다. 현실 문제에 부딪혀본 것들이 이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ㅣㅣㅣㅣㅣㅣㅣ 여자라서 불편한 게 많다 보니 피곤하긴 해도 ‘생각’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고졸이란 신분도 그랬다. 덕분에 내가 누구이고 내가 어디 있는지 늘 되묻고 깨어 있어야 했으니까. 얼마 전에는 그것과 관련해 꽤 불쾌한 일을 겪었는데 괜찮지 않았다. 나는 잊고 살아도 세상은 잊지 않으므로 ‘그것’을 자주 생각해야 한다. 나는 평범하지 않은 것이다. ㅣㅣㅣㅣㅣㅣㅣㅣㅣ 아버지–남편–아들–지인–영화–문학을 접하면서 어설프게나마 남자라는 종의 연구로 20여 년의 세월을 보냈다. 관계–과정보다 목표–성과 위주로 사고하는 남자들의 감각과 욕망. 내가 남자 동료들과 관계 맺으며 절망하는 지점도 항상 같은 자리다. 여자들과의 관계에서는 결코 주저앉은 적이 없는 그 남성성의 지대. 그곳 아닌 어디에 몸 둘 데를 찾지 못하고 서성인다. 남자들의 변화를 기다리느니 바위가 살로 변하는 걸 바라자. 남자는 술과 같아서 맹목적으로 관계했다가는 몰락한다는 교훈을 마음에 새기고 사는데, 그렇게 그들을 “등지고 뛰어갔던 그 길에서 여기까지밖에 못 왔구나” 싶으니 문득 쓸쓸한 일이다. ㅣㅣㅣㅣㅣㅣㅣ 명문대 졸업, 전문직 종사자로 표상되는 소위 정상적 삶의 서사는 매스컴으로 구전으로 맹렬히 유통되는 반면, 거기서 벗어날수록 삶의 서사를 구성하기가 어렵다. 장애여성 강사처럼 자기 경험과 생각과 감정을 말할 기회가 드물고, 겨우 말한다 해도 오해나 동정을 산다. 그런데 남에게 자기 얘기를 하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를 알기 어렵고 사회에 자신을 위치지을 수도 없다. 말소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ㅣㅣㅣㅣㅣㅣㅣㅣㅣ 세상에는 무수한 삶이 있다. 이 말은 세상에는 무수한 아픔이 있다는 뜻이다. 알고 싶은. 그러나 알 수 없는. 그래서 보고도 모르는. ㅣㅣㅣㅣㅣㅣㅣ 아마도 사람을 단정하는 내 ‘꾸준한 고집’으로 눈앞에서 놓쳐버린 무수한 타인들이 있을 것이다. 다시 듣기를 시도한다. 저마다 처지와 형편과 고민을 말하고 듣고 상상하는 동안 서로의 존재 정착을 도우리라 . ㅣㅣㅣㅣㅣㅣㅣㅣ 《몸에 갇힌 사람들》의 저자 수지 오바크는 말한다. “언어들이 사라지는 속도만큼이나 빠르게 다양한 신체 종류들과 표현들이 사라지고 있다. 다양성과 차이라는 강점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몸을 개조하기를 원하고, 미용 산업에는 떼돈을 벌어다주면서 스스로에게는 엄청난 상처를 안긴다.” ㅣㅣㅣㅣㅣㅣㅣ 이 세상 여자들이 (마담 보바리)엠마처럼 살면 위험하다고 말하지만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엠마처럼 살 수 있다는 가정 자체가 커다란 착각이다. 사랑에 투신하는 용기, 삶을 지탱시키는 열기는 아무나 갖고 있지 못하다. 계산적으로 사느라 용쓰는 동안 본래적 열정은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ㅣㅣㅣㅣㅣㅣㅣ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나 역시 참지 못할 일과 참을 일을 분간하는 기능이 퇴화해버렸는지도 모른다. 어느 대기업 상무의 승무원 폭행 사건을 계기로 쏟아져 나오는 온갖 사례들을 보면, 그간 노동자들이 참 무던히 눈 감고 귀 닫고 입 닫고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놈의 먹고사니즘 때문에. ㅣㅣㅣㅣㅣㅣㅣㅣ 젊은 날 자유하고 성찰하며 살았던 사람은 자기 삶을 짓누르는 나쁜 공기를 금세 알아챈다. 이것은 위대한 능력이다. ㅣㅣㅣㅣㅣㅣㅣㅣㅣ 장르는 갈래다. 장르 자체가 작품의 고귀함을 보장하지 않는다. 직업이 인격을 담보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권력에 빌붙어 합리적 생존성만 따지는 의사나 법조인이 있고, 약자에게 다정한 폭력을 휘두르는 문인과 교수가 있다. 특정 직업에 덧씌워진 환상을 벗겨내고, 그 일이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지, 다른 존재를 억압하진 않는지, 어떤 관점을 내포하는지 해부학적으로 따져야 한다. ㅣㅣㅣㅣㅣㅣ “그런 일 하고도 먹고살 수 있어요?” 그 말은 그 옛날 아버지의 말씀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딨어”의 리메이크처럼 들린다. 다른 사람의 삶으로 들어가서 이해하기 위한 말 건넴이 아니라 바깥에서 자기 생각을 주장하기 위한 말 던짐이다. 달갑지 않다. 먹고살 수 없으면 생활비 대줄 거냐고 따지고 싶은 심술이 슬그머니 올라온다. 그들은 왜 질문하는 자리에 있고 나는 왜 쩔쩔매며 답하는 자리에 있는가. 아니, 저 질문의 형식을 띤 모욕하는 자리는 왜 사라지지 않는가 ㅣㅣㅣㅣㅣㅣㅣ 학위와 등단과 취직을 위한 공부가 아니어서, 그냥 글 쓰고 싶은 삶이어서 나는 긴 세월 난감했다. 사회적 약자는 가진 게 없는 사람이 아니라 무지한 질문에 답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몸으로 겪었다
지원
4.0
여자라서 불편한 게 많다 보니 피곤하긴 해도 '생각'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처럼, 고졸이란 신분도 그랬다. 덕분에 내가 누구이고 내가 어디 있는지 늘 되묻고 깨어 있어야 했으니까.
유주
3.5
전통적으로 성과 사랑의 주체는 남성이지만, 그 관계을 유지하기 위한 노동은 여성이 담당한다. 여성이 노동을 그만주는 순간 대부분의 관계도 끝난다.
홍지아
4.5
선생님.. 언젠가 마주치게 되면 손 붙잡고 ‘오래오래 글 써주세요..’라고 부탁하고 싶습니다.. ㅠㅜㅜ매 페이지마다 띵문파티. 일일이 적을 수가 없네요
죠온윅
4.0
이 책은 단연코 출산 이후 자신의 삶을 잃어본 엄마들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갈만한 산문이다. 반면 그렇기에 결코 온전할 수가 없다. 인간은 여러 세대를 거치며 줄곧 유리천장을 있는 힘껏 밀어올리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를테면 엄마의 세대가 밀어올릴 수 있는 힘이 다하는 곳이 우리의 한계 이전에 위치해있다고 여기는 편이다. 이 말은 곧 세월의 흐름에 따라 출생 이후의 억압적인 성별 프레임이 지배하는 범위가 점점 더 좁아지고 있긴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엄마는 그새 좁아진 간극만큼의 나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가끔 나를 미쳐버리게 만드는데 그래도 내가 그 간극에서 무엇을 보고있는지 설명하기를 포기하고 싶지가 않다 태어난 이래 평생에 걸쳐 주입받아 마침내 체화되어 버린 불합리성이 알고보니 자신에게만 주어진 것이었음을 갑자기 벼락처럼 깨닫는 기분을 과연 어떤 사람들은 상상이나 해볼 수 있을까? 단 한번이라도 깊은 '회의'를 경험해본 적이 있을까? 합리적인 대우를 받기 위해 그 회의감을 모르는 자들에게 죽을때까지 죽도록 자신의 존재를 입증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상해본 적이 있을까? 어떤 위치에서 출발해서 어떤 지점을 지향하는 사람이든 여자로 태어난 인간은 무조건 어느 순간에서만큼은 그 회의감을 넘어서야만 한다.
skysurfing
4.5
스포일러가 있어요!!
깐깐한 김마루
4.0
어떤 것이 중요하면 어떤 것은 덜 중요해진다 우선순위를 생각하며 살아온 삶으로는 끊임없이 둘 이상의 대상의 가치를 저울질하게 된다 '생각 많은' '성인' '여성' 화자가 쓴 책에 대해서 나는 또 한 번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한지를 생각하며 글과 싸우고 때로는 수긍했다. 모두가 하나인 것을 삶은 한 길인 것을 부분이 전체이고 전체가 부분인 것을 문득 부끄러워진 나는 쥐젖처럼 작게 돋아난 내 생각들을 매만지며 내가 살지 못한 살지 못할 일상의 글을 전력으로 읽었다 매일 이어지는 싸움에 날마다 승자와 패자만 존재하는가 칼을 든 손에 바르르 떨리는 그 떨림이여 혼신이 담긴 그 사소함이 바로 우리의 오늘이라는 것을
김무비
2.0
서문에서부터 기분 나쁜 위화감을 느꼈는데 저자가 지하철에서 겪은 안전요원 할아버지와의 에피소드를 읽고 나선 이 책을 올해 읽은 최악의 책으로 꼽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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