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볶음너구리

무서운 집
평균 2.4
현상학의 거장 ‘마르틴 하이데거’와 실존주의의 상징 ‘장폴 사르트르’는 이 영화 때문에 맞짱을 깐 적이 있다. 때는 둘이 롯데리아에서 식사를 하던 중이었고, 나는 우연히 옆자리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하이데거가 사르트르의 왓챠피디아를 구경하다 말을 꺼낸 것이 시작이었다. "자네, 타르코프스키가 무릎 꿇고, 큐브릭이 두 손 두 발 다 들게 한 ‘양병간’ 감독의 마스터피스 ‘무서운 집’이 어째서 5점이 아닌 거지? 주인공이 처한 공포의 심연을 느끼지 못했나? 그녀가 마주하는 공포는 단순한 장르적 장치가 아니야. 그녀가 자신에게 가장 고유한 가능성인 ‘죽음’과 마주하는 순간 드러나는 근원적인 불안을 형상화한 것이지, 또 그녀가 처한 고독은 단순한 사회적 단절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보통 사람들(세인)처럼 잡담과 호기심 속에 가려졌던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기 위한 설정이라는 걸 눈치챘나? 이 영화의 배경은 그저 가정집이 아니야, ‘세계-내-존재’가 익숙함의 그물망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묻도록 몰아넣는 공간이지.” 사르트르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하하하하, 그럴듯한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에서처럼 고독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존재란 타자의 시선이 있어야 인식되는 법이랍니다?” 하이데거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장을 이어나갔다. “하하하하하, 사르트르, 존재의 성찰은 타자나 사회적 규범의 영향에서 벗어나, 현존재가 스스로에게 낯설어지는 순간, 즉 불안의 기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무서운 집’이 보여주는 탁월함은 바로 이 점이지. 낡은 공포의 외피 속에서 그녀에게 세계의 익숙함이 무너지고, 그 틈에서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지. 그녀는 이 불안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담담히 마주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을 시작해. ‘나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 그녀의 내면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게 느껴지지 않나?”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말을 들으며 감자튀김을 까딱거리더니, 차분하게 반박을 시작했다. “하이데거쨩, 불안 속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묻기 시작한다는 견해는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존재라는 건 타자의 시선 속에서 의미를 얻고 고정되는 법이죠. 그녀가 느끼는 공포가 과연 근원적인 불안의 기분을 드러내는 걸까요? 저는 오히려 그녀의 공포가 타자의 가능성을 지워버린 상황, 즉 자신을 인식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우리는 세상에 던져져 자유롭도록 선고받았음에도 타인과의 상호작용이 없다면 실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죠.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저의 말을 잊으셨나요?” 분위기가 과열되던 중, 마침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마친 해체주의의 본좌 ‘자크 데리다’가 지나가다 끼어들었다. “데하하하하, 두 분의 열띤 논쟁을 듣고 있었습니다, 타르코프스키가 무릎 꿇고, 큐브릭이 두 손 두 발 다 들게 한 ‘양병간’ 감독의 마스터피스 ‘무서운 집’을 두고 이렇게나 격렬한 토론이라니, 정말 흥미로운 광경입니다!” 하이데거가 “하이”라고 인사를 건넸고, 사르트르가 ‘사르르’ 움직여서 자리를 만들어주자, 그가 합석했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데리다는 ‘데리버거’를 먹으며 말했다. “두 분 모두 ‘무서운 집’을 존재의 본질에 관한 영화로 보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존재의 구조나 의미가 이렇게 단일한 방식으로 재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미 해석의 층위를 하나로 고정해버린 셈이겠죠.” 데리다는 감자튀김을 먹으며 더욱 강하게 주장을 이어갔다.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공포든 고독이든, 그것들이 곧바로 의미 또는 본질로 귀결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의미는 언제나 미끄러지고, 흔들리고, 지연되는 것이니까요. ‘무서운 집’은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타자로부터의 소외를 규정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해체되고, 서로 뒤섞여 더 이상 하나의 중심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텍스트에 가깝지요. 그러니 이 영화를 두고 ‘진정한 의미’를 묻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지나친 형이상학적 요구가 아닐까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데리다는 데리버거 단품을 시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먹은 감자튀김은 무엇일까? 그렇다, 그는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감자튀김에 손을 댄 것이었고, 데리다의 이런 만행은 말싸움이 격렬한 몸싸움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돼버렸다. 이를 보다 못한 직원은 셋을 모두 내쫓았고, 나는 그들이 떠난 자리 옆에 남아서 묵묵히 모짜렐라인더버거를 먹을 뿐이었다.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