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집
무서운 집
2015 · 공포 · 한국
1시간 38분 · 12세



사진작가 부부는 새로 장만한 4층 집에 스튜디오를 꾸미고 이벤트에 사용할 마네킹들을 조립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그러던 중 남편이 출장을 가게 되어 큰 집에 홀로 남게 된 아내. 새 집에서의 생활을 기대하며 한껏 기분이 들뜬 아내는 노래를 부르며 혼자만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만 즐거움도 잠시, 자신의 눈 앞으로 다가와 쳐다보는 마네킹의 모습에 놀라 도망치지만 이사 준비로 예민해진 탓에 헛것을 보았을 거라고 생각하며 무심히 넘겨버린다. 집안 구석구석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내지만 곳곳에서 들려오는 괴이한 소리와 자신을 따라다니기라도 하는 듯 쉬지 않고 나타나는 정체 불명의 형체들이 아내를 쫓아다니며 괴롭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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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əsrət (feat. Dado)

DEADBEAT
5.0
내가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59인 중 한 사람이라니... 자부심을 넘어서 선민의식마저 느껴진다.
Vito Corleone
5.0
육신과 영혼의 이분적 쉬르레알리슴(surrealism)을 담은 거장 양병간. 히치콕을 연상케하는 서스펜스에 니힐리즘 사상을 녹여내는 안티테제적 근주자적(近朱者赤)의 쾌감이란...
freddi
2.0
이 영화를 보고 김장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볶음너구리
5.0
현상학의 거장 ‘마르틴 하이데거’와 실존주의의 상징 ‘장폴 사르트르’는 이 영화 때문에 맞짱을 깐 적이 있다. 때는 둘이 롯데리아에서 식사를 하던 중이었고, 나는 우연히 옆자리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다. 하이데거가 사르트르의 왓챠피디아를 구경하다 말을 꺼낸 것이 시작이었다. "자네, 타르코프스키가 무릎 꿇고, 큐브릭이 두 손 두 발 다 들게 한 ‘양병간’ 감독의 마스터피스 ‘무서운 집’이 어째서 5점이 아닌 거지? 주인공이 처한 공포의 심연을 느끼지 못했나? 그녀가 마주하는 공포는 단순한 장르적 장치가 아니야. 그녀가 자신에게 가장 고유한 가능성인 ‘죽음’과 마주하는 순간 드러나는 근원적인 불안을 형상화한 것이지, 또 그녀가 처한 고독은 단순한 사회적 단절을 나타내는 게 아니라, 보통 사람들(세인)처럼 잡담과 호기심 속에 가려졌던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기 위한 설정이라는 걸 눈치챘나? 이 영화의 배경은 그저 가정집이 아니야, ‘세계-내-존재’가 익숙함의 그물망에서 벗어나 자신의 존재 의미를 묻도록 몰아넣는 공간이지.” 사르트르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사하하하하, 그럴듯한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에서처럼 고독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존재란 타자의 시선이 있어야 인식되는 법이랍니다?” 하이데거는 아랑곳하지 않고 주장을 이어나갔다. “하하하하하, 사르트르, 존재의 성찰은 타자나 사회적 규범의 영향에서 벗어나, 현존재가 스스로에게 낯설어지는 순간, 즉 불안의 기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무서운 집’이 보여주는 탁월함은 바로 이 점이지. 낡은 공포의 외피 속에서 그녀에게 세계의 익숙함이 무너지고, 그 틈에서 자신의 유한성을 깨닫지. 그녀는 이 불안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담담히 마주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성찰을 시작해. ‘나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 그녀의 내면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게 느껴지지 않나?”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말을 들으며 감자튀김을 까딱거리더니, 차분하게 반박을 시작했다. “하이데거쨩, 불안 속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묻기 시작한다는 견해는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존재라는 건 타자의 시선 속에서 의미를 얻고 고정되는 법이죠. 그녀가 느끼는 공포가 과연 근원적인 불안의 기분을 드러내는 걸까요? 저는 오히려 그녀의 공포가 타자의 가능성을 지워버린 상황, 즉 자신을 인식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우리는 세상에 던져져 자유롭도록 선고받았음에도 타인과의 상호작용이 없다면 실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죠.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저의 말을 잊으셨나요?” 분위기가 과열되던 중, 마침 키오스크에서 주문을 마친 해체주의의 본좌 ‘자크 데리다’가 지나가다 끼어들었다. “데하하하하, 두 분의 열띤 논쟁을 듣고 있었습니다, 타르코프스키가 무릎 꿇고, 큐브릭이 두 손 두 발 다 들게 한 ‘양병간’ 감독의 마스터피스 ‘무서운 집’을 두고 이렇게나 격렬한 토론이라니, 정말 흥미로운 광경입니다!” 하이데거가 “하이”라고 인사를 건넸고, 사르트르가 ‘사르르’ 움직여서 자리를 만들어주자, 그가 합석했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데리다는 ‘데리버거’를 먹으며 말했다. “두 분 모두 ‘무서운 집’을 존재의 본질에 관한 영화로 보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존재의 구조나 의미가 이렇게 단일한 방식으로 재현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미 해석의 층위를 하나로 고정해버린 셈이겠죠.” 데리다는 감자튀김을 먹으며 더욱 강하게 주장을 이어갔다. “이 영화에서 드러나는 공포든 고독이든, 그것들이 곧바로 의미 또는 본질로 귀결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의미는 언제나 미끄러지고, 흔들리고, 지연되는 것이니까요. ‘무서운 집’은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고, 타자로부터의 소외를 규정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해체되고, 서로 뒤섞여 더 이상 하나의 중심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텍스트에 가깝지요. 그러니 이 영화를 두고 ‘진정한 의미’를 묻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지나친 형이상학적 요구가 아닐까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데리다는 데리버거 단품을 시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먹은 감자튀김은 무엇일까? 그렇다, 그는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감자튀김에 손을 댄 것이었고, 데리다의 이런 만행은 말싸움이 격렬한 몸싸움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돼버렸다. 이를 보다 못한 직원은 셋을 모두 내쫓았고, 나는 그들이 떠난 자리 옆에 남아서 묵묵히 모짜렐라인더버거를 먹을 뿐이었다. 여름이었다.
백수골방
4.0
이 영화를 보면서 웃고 있는 내가 제일 무섭다.
박채림
0.5
이건 0.5점이 아니다 5.5점을 주고 싶은 내 마음이다
mrkwang
5.0
한국에서 트래시 무비의 새 장을 열었다고 볼 수 있음. 쌍팔년대 스타일이라기 보다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쓸데없이 롱테이크와 디테일이 심해, 초반 30분 중 20분은 집안일인정도.
양기연
5.0
의도된 개판 속에서 타자화된 여성성을 딛고 일어선 신세기 여전사 시구윤희 위버 여사님. 정말로 무서운 건 귀신이 아니라 집이었다. . (2015.8.20.) (스포일러) . 영화의 맨 첫 장면은 마네킹을 조립해서 치장하는 장면이다. 마네킹은 총 셋인데 하나는 신랑, 하나는 신부, 하나는 소복 입은 처녀 귀신이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구윤희 여사는 신랑 신부 마네킹을 한 구석에 오순도순 세팅해 두고서 정작 자기는 처녀 귀신 마네킹과 부둥켜 안고 괜히 비명을 질러 대며 사진을 찍는다. 이때 사진기를 들고 있는 자는 극중에서 그녀의 남편 역을 맡았으며 실제 이 영화의 감독이기도 한 양병간 분 되시겠다. . 만들어진 신랑, 신부의 모습, 그리고 처녀귀신 마네킹을 부둥켜 안은 아내, 이를 자신의 카메라에 담는 남편. 이 구도부터 뭔가 그림이 나오지 않나? 이제 남편은 사진 찍어 온답시고 훌쩍 집밖으로 나가 버리더니, 영화 끝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는다. 한 편, 아내 구윤희 여사는 이제 영화 끝날 때까지 집이란 공간을 단 한 번도 나가지 못한다. . 마네킹 깜짝쇼 한두 번이 지나면, 이제 거의 상영 시간 반토막에 이를 분량이 구윤희 여사의 집안일과 먹방에 할애된다. '먹는 즐거움은 모든 두려움을 잊게 해 준다지'라며 빠다코코넛과 제크와 믹스커피(이 조합은 미로스페이스에서 '구윤희 여사Set'란 이름으로 단돈 천 원에 판매 중이다.)를 잡수시고, 설거지를 하시고, 바닥을 쓰시고, 대변을 보시고, 화장실 청소를 하시고, 소시지와 양상추와 계란 끼운 토스트와 슬라이스 치즈를 드시고, 설거지를 하시고, 바닥을 닦으시고, 빨래를 걷으시고, 김장을 하시고, 소변을 보시고, 짜장라면을 드시고(짜장 소스는 따로 웍에 조리하신다. 주부 50단이시다.), 설거지를 하시고, 하는 게 진짜 죄다 나온다. 그리고 그게 다 끝나면 이미 해가 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주부 구윤희 여사님은 중간중간 혼잣말 내지 친구와의 통화로 고단한 가사노동에 대해 한탄하신다. 정말이지 중산층 전업주부의 고단한 일과를 담은 기록물이라 봐도 좋을 정도이다. 정말 하루 종일 끼니만 때워 가며 내내 집안일을 하는 걸 보여준다. 남편은 나가서 안부전화 한 통이 없는데! . 영화는 구윤희 여사의 가사노동을 보여주면서 지속적으로 집이란 공간 그 자체에 집중하기도 한다. 영화 속의 집이란 공간이 참 묘하다. 설정이 정확히 어떤진 몰라도 얼핏 보아 구윤희 여사 부부가 그 빌라 건물을 통째로 산 모양인데, 지하엔 마네킹 셋이 놓인 스튜디오가 있고, 대충 3, 4층 정도로 각 층마다 있는 집들은 죄다 주인 없이 비어 있고, 옥상에는 옥탑방이 있다. 그런데 정작 부부는 다른 방 다 비워놓고 굳이 옥탑에 산다. 그런데 또 그 옥탑방도 더럽게 넓어서 집안일이 해도해도 끝이 없다. 집이 넓다는 건 구윤희 여사의 대사로도 계속 지적된다. 한 마디로 분에 넘치는 집을 장만한 셈이다. . 재미있는 건, 실상 클라이맥스 부분을 제외하곤 마네킹 귀신이 하는 일이라곤 구윤희 여사를 성가시게 하는 것뿐이며, 그를 통해서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게 귀신의 공포보다는 집의 공간성을 강조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귀신이 나올 때마다 구윤희 여사님은 귀신으로부터 도망치겠다고 내지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하며 '점점 나를 열받게 만드는' '노이로제' 귀신을 찾아 '요절'을 내겠다고, '사생결단'을 내겠다고(진짜 대사에 저렇게 나온다.) 옥탑의 방들을 뒤지시고, 옥탑에서 지하로, 지하에서 옥탑으로 계단을 오르내리시며(엘리베이터도 없다. 무조건 계단인데 계단 오르내리는 걸 잘 편집도 안 한다.), 매 층에 있는 원룸을 몇 개씩은 꼭 확인해 보신다. 그러고 있으니 귀신이 등장해도 귀신의 꼴은 외려 우스꽝스럽고, 정작 두려움은 귀신이 또 나왔으니 또 그 더럽게 큰 집을 구석구석 쏘다니겠구나 하는 데서 나온다. 이쯤 되면 <무서운 집>이란 제목도 리얼로 다가온다. . 이렇게 구윤희 여사가 연기하는 캐릭터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엿볼 수 있다. 그녀는 분에 넘치는 집을 장만해 놓고 그 집의 공간성에 억눌려 있으며,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남편을 기다리며 가사노동을 하고 남편을 그리워 하는 모습(그녀는 그 넓은 집에서 남편 없이 쉬이 잠들지 못하더니 새벽에 남편에 전화를 건다. 남편이 받지 않자 그녀는 "이 늦은 밤에 전화도 안 받고 뭐하는 거야"라며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린다.)을 보인다. 집이라는 공간에 대한 종속성, 남편에 대한 종속성, 이렇게 이중의 틀에 묶여 있는 구윤희 여사의 모습은 가부장제 하에서 전업주부로, 아내로 타자화된 여성의 모습 그 자체이다. 구윤희 여사가 극중에서 딱 두 곡의 노래를 부르는데, 하필이면 그 두 곡이 <즐거운 나의 집>과 <베사메 무쵸(키스 좀 많이 해줘잉)>이라는 점도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극중에 오붓하게 놓여 있는 신랑 마네킹과 신부 마네킹은 모두 사람의 손에 의해 조립되어 치장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편과 아내의 역할 분담 역시 애초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구윤희 여사는 사회에 의해 구성된 가부장제 하에서 아내라는 이름으로 구성된 여성성에 따라 역할을 수행해 온 셈이다. 한 편, 처녀귀신 마네킹 역시 구윤희 여사에 의해 조립되고 치장되었다. 위와 같은 시각에서 볼 때, 결국 처녀귀신 마네킹은 타자화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녀가 결혼 이전의 자신을 무의식 중에 욕망하며 만들어낸 분신이나 다름없다. 한국 공포영화의 스테레오타입인 처녀귀신을 고스란히 역이용한 셈이다. . 클라이맥스에서 처녀귀신 마네킹과 구윤희 여사의 대치 장면도 이런 맥락 하에서 읽어볼 수 있다. 구윤희 여사의 무의식적 욕망을 드러내 보이는 처녀귀신 마네킹은 아내의 역할을 수용한 현재의 구윤희 여사를 상징적으로 죽이려 들고, 구윤희 여사는 아내로서, 주부로서 올바르지 않은 자신 내부의 욕망에 맞서려 드는 것이다. 구윤희 여사가 귀신에게 승리를 쟁취하는 데 핵심이 된 것이 '김장할 때 파를 썰며 단련한 주부 50단으로서의 칼질 실력'이라는 것도, 그녀가 귀신에 대해 전의를 불태울 때나 귀신의 목을 딴 뒤에 아내의 입장에서 남편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마음을 담은 <베사메 무쵸>를 부른다는 것도 이러한 구도를 뒷받침해 보인다. 그렇게 보면, 영화 초반, 구윤희 여사가 자기 내부의 욕망의 화신인 처녀귀신 마네킹 곁에 있는 모습을 남편이 자신의 카메라 안에 담는 행위는, 결국 구윤희 여사가 남편의 카메라로 상징되는 타자화의 틀 안에서 자신의 욕망을 스스로 통제하려 들 것임을 보여주는 복선이기도 했던 셈이다. . 그러나 영화의 결말을 보면, 남편이 곧 귀가할 것이라는 전화를 받는 구윤희 여사가 처녀귀신 마네킹에 온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결말을 두고 양병간 감독은 GV에서 '주인공은 죽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어쩌면 구윤희 여사는 결국 최종적으로 처녀귀신으로 표현된 자기 내부의 욕망에게 자신을 내어주어 아내로서의 여성성 하에 자신을 가둔 가부장제 그 자체를 박살내기 위해 남편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페미니즘적 메시지로 가득했던 <에일리언>에서 시고니 위버는 스스로 여성성에 함몰되지 않은 채 남근을 상징하던 에일리언에 맞선 바 있다. 이제 <무서운 집>에서 타자화된 여성성을 박살내고 자기 내부의 욕망에 스스로를 온전히 내어준 구윤희 여사의 차례이다. 신세기 여전사 시구윤희 위버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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