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천수경

천수경

3 years ago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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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겟돈 타임

영화 ・ 2022

평균 3.4

나의 특권을 마주한다는 건 죄책감이 들면서도 이상한 억울함이 밀려드는 일이다. 내가 의도치 않게 다른 생을 밟고 서 있다는 건 첫 번째 아픔이다. 챙겨주지 못하는 영혼들을 애도하지만 내가 내 자리를 사수해야겠다는 의지가 두 번째 아픔으로 밀려온다. 폴은 “넌 뭐든 될 수 있어!”라고 말해주는 어른의 목소리를 등지고 걸어 나온다. 영화 내내 무력하던 아이가 단호한 걸음으로 거길 박차고 나온 게 다행이다. 하지만 다행인 건 없다. 폴의 두 어깨를 잡고 흔들고 싶다. 그래서 넌 이제 이 상황을 어떻게 씹어 삼킬 거니? 넌 살았지만, 네 절친은 이 일을 기점으로 영영 그의 가난에 갇히게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잖니. 세상엔 여건이 불리한 사람들이 있는 법이고, 야만의 시대에 태어난 게 너의 탓이 아니니까 그만 잊고 살 거니? 그러고도 괜찮겠니? 걘 조롱을 무릅쓰고 네 그림이 멋있다고 해준 애인데. 너 걔랑 놀 때 제일 행복했었던 것 같은데. 내 숱한 물음들에 대한 응답이 이 영화의 존재 자체다. <아마겟돈 타임>은 감독의 <미나리>고, <로마>가 아닐까. 두고 떠나올 수 없어서 기어이 그 시간으로 돌아갔다. 천둥벌거숭이라서 그저 관심을 원했던 시절로. 부당한 일을 수없이 목격하고도 한마디 따지질 못했던 시절로. 당시엔 누구에게 무엇을 따져야 하는지 도무지 몰랐겠지만 긴 시간이 지나고서 모든 게 명확해졌을 테니. 하지만 이미 미끄러진 하나의 삶을 돌이키기엔 늦었다는 사실에 원통하고 화가 났을 테니. 많은 사람들이 봐줬으면 좋았을 교실의 공기를 카메라로 그려냈다. 말없이 아빠의 말을 듣고 앉은 소년의 얼굴은 고요하다. 그 아이는 스스로 화낼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자격 너무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너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되었지만, 네가 화내도 돼. 법을 어긴 사람이 벌을 받는 건 당연하지만, 그래도 이 일은 왠지 부당하게 느껴진다고 말해도 돼. 왜 항상 두 사람이 잘못하는데 한 명만 처벌받느냐고 화내도 돼. 생각해보니 조니가 이곳을 떠나고 싶게 만든 어른들이 잘못했다고, 그 어른들 아니었으면 컴퓨터를 안 훔쳤을 거라고 소리 질러도 돼. 조니가 교실에서 겪어야 했던 수모를 하나하나 나열해도 돼. 하지만 소년은 낭떠러지에 매달린 사람이 기력을 아끼려는 것처럼 가만하다. 그래서 내 마음이 무너진다. “너는 뭐든 될 수 있어!”라는 말은 ‘뭐든 될 수 있지 않은’ 친구를 둔 사람에겐 아무 의미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