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iemoon

외투
평균 3.7
2024년 02월 08일에 봄
<코> “나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오.” 그것은 꼬발료프에게 남은,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처절한 마음의 발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평생 계급 안에 예속되어 살아온 이의 욕망은 계급에서 해방되지 못한다. 나 자신이고자 하는 욕망만큼이나 커다란, 8등관 이상의 꿈. 계급이 허락하는 꿈만 꾼 꼬발료프의 코는 위풍당당히 거리를 누비던 것도 잠시, 경찰관에 손에 붙들려 돌아오고 꼬발료프의 꿈도 그렇게 무마된다. 계급 사회에서의 자유란 얼굴에서 코가 떨어져나가는 일만큼이나 이상한 일인 셈이다. 코가 떨어지는 엄청난 일에도 계급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공고하고. <외투> 흠 없는 서사 구성. 무엇 하나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아 흥미로웠다. “나를 좀 내버려둬요, 왜 이렇게 나를 못살게 구는 것이요?” 숱한 무시와 조롱에도 고작 그 정도 반발에 그친 이가, 아끼고 아낀 오늘로 더 나은 내일을 꿈꾸고, 잠깐의 황홀경을 누린 뒤 으스스한 도시 전설의 주인공이 되기까지, 외투라는 하나의 매개를 통해 생생히 그려낸다. 고꾸라진 희망은 사람의 숨통을 끊어놓기도 하는구나 절감한다. <광인일기> 아주 작은(전적으로 본인 입장에서 그렇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지만) 욕심을 냈다가 타의에 의해 포기 당했을 때, 사람은 일차로 실현 가능한 꿈을 품고 그것마저 가망이 없어 보이면 그냥 현실을 영영 떠나버린다.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주인공이 미쳐가는 과정은 일기라는 가장 사적인 기록을 통해 낱낱이 드러난다.광기의 폭발은 자신을 스페인 국왕이라고 착각하는 일기에서 두드러지지만, 멧쥐가 말을 하는 광경을 목격한 순간부터 광기는 이미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앞의 두 편에서 보여준 이질적 세계, 비현실적 감각이 오래 머무는 탓일까. 어쩐지 멧쥐는 정말로 말을 했고 편지를 썼을지도 모른다고, 그것은 광기의 증거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멧쥐와 관련된 서사가 소설 속 현실인지, 광기의 시작인지 알 수 없으나 어느 쪽이든 각각의 매력이 있어 좋다. * 이 작가의 상상력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될까? 떨어져나간 코는 그렇다 쳐도 떨어져나간 자리가 팬케이크처럼 맨질맨질하다는 설정이나, 코가 옷을 차려입고 상급자 행세를 하는 것, 외투의 유령을 비롯해 편지 쓰는 강아지까지. 전혀 새로운 상상도 있고 기존의 상상(말하는 동물)을 약간만 비틀어 또 다른 이미지를 만들어낸 경우도 있다. 부럽고 대단한 솜씨. 계급 우화는 역시 재밌다. 계급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척 이야기해야 하니 그만큼 상징에 공을 들일 수밖에 없고, “그냥 웃긴 이야기일 뿐이에요!”라고 우기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웃을 법한 위트를 장착해야 할 테니. 울리는 것보다 웃기는 것이 더 어려운 세상, 그 와중에 글로써 시대를 꼬집기까지 하는 이들의 내공은 정말이지 만만치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