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선교

집으로
차이밍량에게 집은 한때 영화가 잉태되는 조건이었다. 그의 영화에서 집은 때로 자폐적 자기인식에 대한 징후적인 몸짓들이 표출되는 공간이거나(<애정만세>), 그 자체로 영화라는 구조를 지탱하는 뼈대를 은유하며 장르적 혼종성을 불러들이는(<구멍>, <흔들리는 구름>) 환경이었다. 이처럼 그의 영화에서 영화적인 순간들은 집이 제공하는 유폐와 그 균열의 가능성으로부터 기인하는 것들이었다. 안식이 아닌 유폐로 기능하는 집과 여기서 시작되는 인물의 몸짓과 표정들. 이는 마치 관객의 자발적 유폐(관객은 기꺼이 두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같은 좌석에 감금되기를 희망한다)와 함께 영화를 시작하는 극장이라는 공간을 연상케 한다. 차이밍량에게 집은 곧 유폐와 함께 영화가 시작되는 곳, 즉 극장의 거대한 은유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러던 그는 <떠돌이 개>의 기획을 전후로 더이상 집을 영화의 조건으로 여기지 않기 시작했다. 그는 집을 떠나서 영화를 찍기 시작했으며(<행자> 연작), 이는 동시에 극장과의 작별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차이밍량은 영화의 조건이었던 집을 떠나면서 자연스레 영화의 집인 극장과도 멀어졌다. 그의 영화는 극장상영을 고려하지 않은 채 촬영되었고 미술관에서 상영 혹은 전시되었다. 약 15분 간의 롱테이크로 이루어진 <떠돌이 개>의 라스트 씬은 영화관을 아트뮤지엄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하는 기획을 반영한다. <떠돌이 개>의 극장 상영은 그 자체로 극장을 미술관화하는 작업과 다름없으며, 이는 극장과 미술관의 전적으로 개방된 교통가능성(그리고 영화적 쇼트와 회화, 조형물, 미디어아트 사이의 교통가능성) 하에서 작동한다. <집으로>에서 차이밍량은 <데이즈>와 <행자> 연작을 함께 작업했던 아농의 고향으로 향하는 길에서 수많은 집들을 찍는다. 텅 비어있는 집, 새로 짓고 있는 집, 무너져내려가는 집들이 프레임에 담긴다. 그의 카메라에 담긴 집은 더이상 어떤 영화적 순간들을 촉발하지 않는다. 집은 방향성 없이 운동하는 동물들과 율동하는 아이들의 후경에 자리할 뿐이다. 그는 한때 자신이 영화의 조건이라고 믿었던, 그러나 이제는 텅 빈 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집들의 밖에서 그것을 찍는다. <데이즈>가 <하류>와 이루는 관계처럼, 혹은 <시닝 공공 주택>이 <구멍>과 이루는 관계처럼, <집으로>는 차이밍량의 모든 영화적 행적, 정확히는 차이밍량의 영화가 한때 기거했던 장소의 흔적들을 투사하는 '지금 여기'의 공간을 응시한다. 그리고 이제 그는 주인 없는 집, 혹은 이것이 은유하는 영화 없는 영화관을 영화의 조건으로 삼는다. <집으로>의 마지막 쇼트는 극장이라는 공간의 신화를 박탈시켰던 <떠돌이 개>의 마지막 쇼트와 공명하는 듯 보인다. 이 장면은 그 지속의 시간과 함께 프레임 내에 회화 혹은 미디어아트의 유전자를 불러들인다. 그는 한때 자신이 '영화적인 것'들을 불러들였던 곳들을 순방하다 이내 영화적이지 않은 쇼트를 남겨둔 채 영화를 떠난다. 그리고 그는 마치 그곳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정착할 생각은 없다는 사실을 환기하기 위해 여기를 떠돌아다니던 사람처럼 잠시 찾아온 집을 아무렇지 않게 다시 떠난다. 그는 곧 <행자>의 12번째 작품을 촬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의 영화는 다시 극장을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