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回家
2025 · 다큐멘터리 · 대만
1시간 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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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밍량 감독과 함께 아농은 고향 라오스로 돌아왔다. 들판에는 가축들이 한가로이 돌아다니고, 바람에 나무가 흔들거리며, 물빛이 반짝인다. 그 누구의 땅도 아닌 이곳에서, 버려진 집들은 고요히 서 있다. 그러나 각각의 집은 서로 다른 얼굴을 지닌 듯, 저마다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주고 있었다. 캠코더 하나, 카메라 하나. 그리고 한 편의 영화가 탄생했다. [2025년 제51회 서울독립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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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y Oh
3.5
집으로, 그리고 또 집으로. 그 여정과 아직 이뤄지지 않은 여정들, 이제 이뤄지지 않을 여정들까지 담겼다. On homes and journeys, filled or unfulfilled.
drad___nats
4.0
차이밍량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본다면 그것은 서부극의 흐름과 매우 유사하다고 느낀다. 서부극의 남성들에게 집은 떠난 곳이거나 떠날 곳이기 때문이다. 그의 필모그래피 초반 <하류>와 <구멍>에서 아파트로 대표되는 집은 그의 영화를 구성하는 뼈대로 기능했다. 그러다 차이밍량은 떠날 수 밖에 없어서 스스로 영화의 집을 허물고 떠난다.(<안녕, 용문객잔>) 그러고는 전 세계를 걷기 시작한다. 아주 천천히. (<행자>) 라오스를 떠나 일을 하고 있는 아농이 잠시 라오스에 방문한다. 그러니까 아농에게 집은 필연적으로 다시 떠나야하는 곳이다. <집으로>의 초반부 차이밍량은 우리에게 묻는다. 떠날 수 없는 곳이 정말 집이냐고. 그걸 계속 돌고 있는 놀이기구 속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개의 모습을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는 여러 집의 외관을 보여주는 쇼트들을 나열할 뿐이다. 더이상 집은 고정된 장소가 아니다. 나열되는 집의 이미지는 떠나 있어서 상상되는 것이면서 동시에 이미 도달한 장소인, 두가지를 모두 긍정할 수 있는 장소인 것이다. 이것은 양자택일을 해야한다거나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가 아니다. 두가지 문이 있다고 해서 들어오고 나가는 문이 정해져있는건 아니듯 말이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은 장난이 아니다. 정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둘 중 하나에 강하게 끌린다면 그렇게 믿어도 좋지만 그렇다고 다른 하나를 부정해서는 안될 일이다. 영화의 마지막 쇼트, 영화가 진행해오던 톤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쇼트가 깨어난다. 한 여관의 방. 커튼 틈으로 들어온 햇살이 이불이 펼쳐져 있는 침대 위에 놓여있고 침대 앞에는 정리된 캐리어가 놓여있다. 더 이상 차이밍량의 시선에서 극장은 집이 아니다. 이제 그곳은 여관이다. 그렇기에 차이밍량은 또 다시 행자를 찍으러 떠날 것이다.
떠돌이 개
5.0
이색적이면도 익숙한 풍경들을 통해서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보편적인 고향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
lilin🪽
3.0
태초에 영화는 어떻게 발명되었던가
오세일
4.0
1시간가량 남짓한 이 짧은 영화에는 딱히 주연이라 할 배우도, 서사를 이끌어 갈 대사도ㅡ사실상ㅡ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주인의 행방이 부재한 빈집들의 모습이 연이어 등장한다. 마치 내가 영화의 시작과 함께 버스 창가에 앉아 곤히 잠들어 있던 청년의 옆자리에 합석한 채, 창밖으로 유유히 시골의 풍경을 바라보는 듯한 이미지들의 연쇄. 어쩌면 '버려졌다'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그 빈집들은, 모두 하나같이 누군가의 방문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벽에 구멍이 나고 지붕은 날아갔지만, 언제나 재건의 꿈을 꾸며 버스의 청년처럼 잠시 깊은 잠에 빠져있을 뿐이라는 듯이 늘 똑같은 자리에서 고요하게. 그들도 한때에는 청년과 같은 '목적지를 그리워하는 이들'을 품어주던 따스한 공간이었음을 아직 잊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집으로>에서는 아파트, 즉 현대식 건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나무판자를 덧대어 벽을 세우고, 지열을 피하기 위해 고상가옥을 고수하는 추억의 건축물만이 프레임 내부를 채울 권리를 갖는다. 그래서 <집으로>에서는 특유의 냄새가 난다. 나무 냄새, 못 냄새, 흙냄새, 그리고 사람 냄새. 어쩌면 누군가는 그 냄새를 통해 도심으로 떠나기 전 살았던 옛 시골(고향)의 집을, 또 누군가는 명절마다 방문하는 할머니 댁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집으로>는 관객을 특유의 향취로 매혹하며, 그 향에 매혹된 관객은 각자만의 노스탤지어를 더듬기 시작한다. 영화라는 창문의 프레임을 통해 가보지 않은 공간, 겪어보지 않은 문화를 바라보며 우리는 묘한 감각의 열병을 앓는다. 그러나 그 열병을 앓는 순간이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다. 그렇기에 <집으로>는 결국 영화를 보는 우리가 극장을 나와 다시 '나의'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영화는 우리가 평소에 집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늘상 밟는 길의 모습을 편히 상상할 수 있도록 하나의 시선을 제공해 준 것뿐이며, 우리는 그저 매일같이 카드를 찍고 타는 마을버스를 머릿속에 그려보면 된다. 덕분에 나는 부산에서 약 300km가 떨어져 있는 천안의 한 마을을 그려봤으며, 이제는 더 이상 집에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항상 교통체증에 시달리는 터미널 앞, 터미널을 지나면 금새 차분해지는 외곽 골목, 귀에 꽂았던 이어폰을 빼고 하루를 마칠 루틴을 실행하는 집 앞까지.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지루하기만 했던 나의 일상이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가 고맙다. 그래서 <집으로>는 우리 모두의 사적인 영화다.
정선교
4.0
차이밍량에게 집은 한때 영화가 잉태되는 조건이었다. 그의 영화에서 집은 때로 자폐적 자기인식에 대한 징후적인 몸짓들이 표출되는 공간이거나(<애정만세>), 그 자체로 영화라는 구조를 지탱하는 뼈대를 은유하며 장르적 혼종성을 불러들이는(<구멍>, <흔들리는 구름>) 환경이었다. 이처럼 그의 영화에서 영화적인 순간들은 집이 제공하는 유폐와 그 균열의 가능성으로부터 기인하는 것들이었다. 안식이 아닌 유폐로 기능하는 집과 여기서 시작되는 인물의 몸짓과 표정들. 이는 마치 관객의 자발적 유폐(관객은 기꺼이 두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같은 좌석에 감금되기를 희망한다)와 함께 영화를 시작하는 극장이라는 공간을 연상케 한다. 차이밍량에게 집은 곧 유폐와 함께 영화가 시작되는 곳, 즉 극장의 거대한 은유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러던 그는 <떠돌이 개>의 기획을 전후로 더이상 집을 영화의 조건으로 여기지 않기 시작했다. 그는 집을 떠나서 영화를 찍기 시작했으며(<행자> 연작), 이는 동시에 극장과의 작별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차이밍량은 영화의 조건이었던 집을 떠나면서 자연스레 영화의 집인 극장과도 멀어졌다. 그의 영화는 극장상영을 고려하지 않은 채 촬영되었고 미술관에서 상영 혹은 전시되었다. 약 15분 간의 롱테이크로 이루어진 <떠돌이 개>의 라스트 씬은 영화관을 아트뮤지엄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하는 기획을 반영한다. <떠돌이 개>의 극장 상영은 그 자체로 극장을 미술관화하는 작업과 다름없으며, 이는 극장과 미술관의 전적으로 개방된 교통가능성(그리고 영화적 쇼트와 회화, 조형물, 미디어아트 사이의 교통가능성) 하에서 작동한다. <집으로>에서 차이밍량은 <데이즈>와 <행자> 연작을 함께 작업했던 아농의 고향으로 향하는 길에서 수많은 집들을 찍는다. 텅 비어있는 집, 새로 짓고 있는 집, 무너져내려가는 집들이 프레임에 담긴다. 그의 카메라에 담긴 집은 더이상 어떤 영화적 순간들을 촉발하지 않는다. 집은 방향성 없이 운동하는 동물들과 율동하는 아이들의 후경에 자리할 뿐이다. 그는 한때 자신이 영화의 조건이라고 믿었던, 그러나 이제는 텅 빈 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집들의 밖에서 그것을 찍는다. <데이즈>가 <하류>와 이루는 관계처럼, 혹은 <시닝 공공 주택>이 <구멍>과 이루는 관계처럼, <집으로>는 차이밍량의 모든 영화적 행적, 정확히는 차이밍량의 영화가 한때 기거했던 장소의 흔적들을 투사하는 '지금 여기'의 공간을 응시한다. 그리고 이제 그는 주인 없는 집, 혹은 이것이 은유하는 영화 없는 영화관을 영화의 조건으로 삼는다. <집으로>의 마지막 쇼트는 극장이라는 공간의 신화를 박탈시켰던 <떠돌이 개>의 마지막 쇼트와 공명하는 듯 보인다. 이 장면은 그 지속의 시간과 함께 프레임 내에 회화 혹은 미디어아트의 유전자를 불러들인다. 그는 한때 자신이 '영화적인 것'들을 불러들였던 곳들을 순방하다 이내 영화적이지 않은 쇼트를 남겨둔 채 영화를 떠난다. 그리고 그는 마치 그곳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정착할 생각은 없다는 사실을 환기하기 위해 여기를 떠돌아다니던 사람처럼 잠시 찾아온 집을 아무렇지 않게 다시 떠난다. 그는 곧 <행자>의 12번째 작품을 촬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의 영화는 다시 극장을 떠날 것이다.
상어
5.0
마지막으로 석양을 보며 멈춰선 게 언제였을까. 분주하게 일하는 작업자들을 가만히 바라본 게, 줄줄이 이어진 낯선 건물들을 바라본 게 언제였을까. 마지막으로 집에 갔던 게 언제였을까. 말이 없는 영화를 보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하나하나 짚어 보았다. 지나가는 순간들과 이미지들을 놓치지 않고 간직하려 했던 때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지금은 그러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집으로 왔으면서 집 바로 앞에서 모든 시간을 보낸 내 모습이 정말 웃겼다.
김병석
3.5
두고 온 마음에도 시간은 흐르고, 오늘을 살다 잠시 치워둔 기억에는 저만의 삶이 차곡히 쌓여 완전히 다른 곳이 되었다. 더 이상 돌아갈 고향은 없다. ‘그새 많이 바뀌었네’, 씁쓸한 멜랑꼴리에 빠질 새도 없이 내일이 밀고 들어온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 일순간 나는 외지인이 된다. 이 작품은 그 정처 없음에 영화의 매체적 특질을 덧대어, 스크린의 이쪽과 저쪽, 그리고 기록과 현존 사이를 떠도는 관찰자로서 영화를 보아낸다. 그 무엇도 나와 연관될 수 없는 낯선 여관방. 또 다른 삶을 갈구하는 풍광 속에서 영화는 끝내 고민한다. 이제는 일어나야 하나, 그럼 또 어디로 가야 하나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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