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y Oh3.5집으로, 그리고 또 집으로. 그 여정과 아직 이뤄지지 않은 여정들, 이제 이뤄지지 않을 여정들까지 담겼다. On homes and journeys, filled or unfulfilled.좋아요19댓글0
오세일4.01시간가량 남짓한 이 짧은 영화에는 딱히 주연이라 할 배우도, 서사를 이끌어 갈 대사도ㅡ사실상ㅡ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주인의 행방이 부재한 빈집들의 모습이 연이어 등장한다. 마치 내가 영화의 시작과 함께 버스 창가에 앉아 곤히 잠들어 있던 청년의 옆자리에 합석한 채, 창밖으로 유유히 시골의 풍경을 바라보는 듯한 이미지들의 연쇄. 어쩌면 '버려졌다'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그 빈집들은, 모두 하나같이 누군가의 방문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벽에 구멍이 나고 지붕은 날아갔지만, 언제나 재건의 꿈을 꾸며 버스의 청년처럼 잠시 깊은 잠에 빠져있을 뿐이라는 듯이 늘 똑같은 자리에서 고요하게. 그들도 한때에는 청년과 같은 '목적지를 그리워하는 이들'을 품어주던 따스한 공간이었음을 아직 잊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집으로>에서는 아파트, 즉 현대식 건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나무판자를 덧대어 벽을 세우고, 지열을 피하기 위해 고상가옥을 고수하는 추억의 건축물만이 프레임 내부를 채울 권리를 갖는다. 그래서 <집으로>에서는 특유의 냄새가 난다. 나무 냄새, 못 냄새, 흙냄새, 그리고 사람 냄새. 어쩌면 누군가는 그 냄새를 통해 도심으로 떠나기 전 살았던 옛 시골(고향)의 집을, 또 누군가는 명절마다 방문하는 할머니 댁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집으로>는 관객을 특유의 향취로 매혹하며, 그 향에 매혹된 관객은 각자만의 노스탤지어를 더듬기 시작한다. 영화라는 창문의 프레임을 통해 가보지 않은 공간, 겪어보지 않은 문화를 바라보며 우리는 묘한 감각의 열병을 앓는다. 그러나 그 열병을 앓는 순간이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다. 그렇기에 <집으로>는 결국 영화를 보는 우리가 극장을 나와 다시 '나의'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영화는 우리가 평소에 집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늘상 밟는 길의 모습을 편히 상상할 수 있도록 하나의 시선을 제공해 준 것뿐이며, 우리는 그저 매일같이 카드를 찍고 타는 마을버스를 머릿속에 그려보면 된다. 덕분에 나는 부산에서 약 300km가 떨어져 있는 천안의 한 마을을 그려봤으며, 이제는 더 이상 집에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항상 교통체증에 시달리는 터미널 앞, 터미널을 지나면 금새 차분해지는 외곽 골목, 귀에 꽂았던 이어폰을 빼고 하루를 마칠 루틴을 실행하는 집 앞까지.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지루하기만 했던 나의 일상이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가 고맙다. 그래서 <집으로>는 우리 모두의 사적인 영화다.좋아요7댓글0
정선교4.0차이밍량에게 집은 한때 영화가 잉태되는 조건이었다. 그의 영화에서 집은 때로 자폐적 자기인식에 대한 징후적인 몸짓들이 표출되는 공간이거나(<애정만세>), 그 자체로 영화라는 구조를 지탱하는 뼈대를 은유하며 장르적 혼종성을 불러들이는(<구멍>, <흔들리는 구름>) 환경이었다. 이처럼 그의 영화에서 영화적인 순간들은 집이 제공하는 유폐와 그 균열의 가능성으로부터 기인하는 것들이었다. 안식이 아닌 유폐로 기능하는 집과 여기서 시작되는 인물의 몸짓과 표정들. 이는 마치 관객의 자발적 유폐(관객은 기꺼이 두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같은 좌석에 감금되기를 희망한다)와 함께 영화를 시작하는 극장이라는 공간을 연상케 한다. 차이밍량에게 집은 곧 유폐와 함께 영화가 시작되는 곳, 즉 극장의 거대한 은유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러던 그는 <떠돌이 개>의 기획을 전후로 더이상 집을 영화의 조건으로 여기지 않기 시작했다. 그는 집을 떠나서 영화를 찍기 시작했으며(<행자> 연작), 이는 동시에 극장과의 작별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차이밍량은 영화의 조건이었던 집을 떠나면서 자연스레 영화의 집인 극장과도 멀어졌다. 그의 영화는 극장상영을 고려하지 않은 채 촬영되었고 미술관에서 상영 혹은 전시되었다. 약 15분 간의 롱테이크로 이루어진 <떠돌이 개>의 라스트 씬은 영화관을 아트뮤지엄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하는 기획을 반영한다. <떠돌이 개>의 극장 상영은 그 자체로 극장을 미술관화하는 작업과 다름없으며, 이는 극장과 미술관의 전적으로 개방된 교통가능성(그리고 영화적 쇼트와 회화, 조형물, 미디어아트 사이의 교통가능성) 하에서 작동한다. <집으로>에서 차이밍량은 <데이즈>와 <행자> 연작을 함께 작업했던 아농의 고향으로 향하는 길에서 수많은 집들을 찍는다. 텅 비어있는 집, 새로 짓고 있는 집, 무너져내려가는 집들이 프레임에 담긴다. 그의 카메라에 담긴 집은 더이상 어떤 영화적 순간들을 촉발하지 않는다. 집은 방향성 없이 운동하는 동물들과 율동하는 아이들의 후경에 자리할 뿐이다. 그는 한때 자신이 영화의 조건이라고 믿었던, 그러나 이제는 텅 빈 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집들의 밖에서 그것을 찍는다. <데이즈>가 <하류>와 이루는 관계처럼, 혹은 <시닝 공공 주택>이 <구멍>과 이루는 관계처럼, <집으로>는 차이밍량의 모든 영화적 행적, 정확히는 차이밍량의 영화가 한때 기거했던 장소의 흔적들을 투사하는 '지금 여기'의 공간을 응시한다. 그리고 이제 그는 주인 없는 집, 혹은 이것이 은유하는 영화 없는 영화관을 영화의 조건으로 삼는다. <집으로>의 마지막 쇼트는 극장이라는 공간의 신화를 박탈시켰던 <떠돌이 개>의 마지막 쇼트와 공명하는 듯 보인다. 이 장면은 그 지속의 시간과 함께 프레임 내에 회화 혹은 미디어아트의 유전자를 불러들인다. 그는 한때 자신이 '영화적인 것'들을 불러들였던 곳들을 순방하다 이내 영화적이지 않은 쇼트를 남겨둔 채 영화를 떠난다. 그리고 그는 마치 그곳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정착할 생각은 없다는 사실을 환기하기 위해 여기를 떠돌아다니던 사람처럼 잠시 찾아온 집을 아무렇지 않게 다시 떠난다. 그는 곧 <행자>의 12번째 작품을 촬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의 영화는 다시 극장을 떠날 것이다.좋아요6댓글1
상어5.0마지막으로 석양을 보며 멈춰선 게 언제였을까. 분주하게 일하는 작업자들을 가만히 바라본 게, 줄줄이 이어진 낯선 건물들을 바라본 게 언제였을까. 마지막으로 집에 갔던 게 언제였을까. 말이 없는 영화를 보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하나하나 짚어 보았다. 지나가는 순간들과 이미지들을 놓치지 않고 간직하려 했던 때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지금은 그러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집으로 왔으면서 집 바로 앞에서 모든 시간을 보낸 내 모습이 정말 웃겼다.좋아요5댓글1
김병석3.5두고 온 마음에도 시간은 흐르고, 오늘을 살다 잠시 치워둔 기억에는 저만의 삶이 차곡히 쌓여 완전히 다른 곳이 되었다. 더 이상 돌아갈 고향은 없다. ‘그새 많이 바뀌었네’, 씁쓸한 멜랑꼴리에 빠질 새도 없이 내일이 밀고 들어온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 일순간 나는 외지인이 된다. 이 작품은 그 정처 없음에 영화의 매체적 특질을 덧대어, 스크린의 이쪽과 저쪽, 그리고 기록과 현존 사이를 떠도는 관찰자로서 영 화를 보아낸다. 그 무엇도 나와 연관될 수 없는 낯선 여관방. 또 다른 삶을 갈구하는 풍광 속에서 영화는 끝내 고민한다. 이제는 일어나야 하나, 그럼 또 어디로 가야 하나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이다.좋아요4댓글0
석지협4.0나의 집 # 『집으로』는 제목과 달리 집에서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의 방은 분명 집이라고 하기엔 어색한 점이 있다. 새하얀 벽과 새하얀 침대. 창문에는 빛이 두 줄기가 들어와 침대를 비춘다. 침대 위에는 흰 수건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라오스의 풍경들을 고려해 보더라도 이 장면은 확실히 이질적이다. 이곳은 분명 집이 아니다. 집보다는 호텔에 가까워 보인다. 호텔은 분명 집과는 다르다. 호텔의 특성은 샹탈 아커만이 『호텔 몬터레이』나 『안나의 랑데부』에서 잘 묘사한 바 있다. 아커만이 건조하면서도 세심하게 관찰했던 뉴욕의 어느 동네 호텔인 ‘호텔 몬터레이’는 사회에서 유기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그 안의 사람들은 분명 같은 공간에 있으나 조우할 뿐 서로 관계를 맺지는 못한다. 여행의 설렘이 제거된 호텔은 단숨에 차가운 장소로 변모한다. 호텔은 이처럼 현실과 분리되어있는 장소이면서도 안에서의 편안함을 느낄 수도 없는 장소이다. 그러나 이러한 호텔의 철저한 개인성과 분리는 차이밍량의 영화에서는 다르게 전달된다. 가령 『구멍』에서 등장한, 하룻밤의 관계를 위해 사람들이 찾는 어두컴컴한 밀실들을 떠올려보라. 또는 『무무면』에서 이강생이 잠을 청하는 도쿄의 캡슐호텔을 생각해보자. 물론 이 공간들이 화려한 호텔과 거리가 멀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 공간들에서 발생하는 소외와 단절이 차이밍량의 영화에서 우울하게 표현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 공간들은 새로운 연결을 가능케 하거나 안정감을 가져다줄 수 있는, 개인적이기에 더 평안한 공간들이다. # 잠깐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자면, 나는 호텔을 좋아하는 편이다. 단순히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어느 장소든 내가 향수를 느끼거나 할만한 곳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떤 장소에 큰 애착을 가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나에게 ‘집’이라 할 만한 것도 없다. 다만 내가 어떤 장소를 가고 싶거나 머물고 싶은 이유는 그곳에 있는 여러 요소들, 사람들이나 볼거리들이 나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설사 고향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다른 나라에 있더라도, 나는 그곳의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장소들에서 안정과 편안함을 느끼곤 한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나는 어느 한 곳에 기반을 두지 못하고 어디든 간에 누울 수 있는 부드러운 바닥을 찾아다니는 유목민에 가깝다. 어디든 편하지만, 어디든 진정으로 나를 보듬어줄 순 없다. 생각해보면, 나는 고향 도시보다 그곳에 더 이상 살지 않는 내 가족들을 훨씬 더 ‘집’으로 여기는 듯하다. 아커만에게 집이 곧 자신의 어머니였던 것처럼 말이다. 『노매드랜드』의 펀의 대사를 적절히 인용하자면, 단순한 ‘집(house)’과 진정한 안식처로서의 ‘가정(home)’은 다르다. # 아농 호웅흐앙시는 어느 버스 안에서 잠을 청하고 그 잠 속에서 자신의 고향 라오스로 돌아간다. 마치 꿈을 꾸듯 사운드도 버스의 소음에서 다음 장면의 놀이기구의 소음으로 겹쳐 들어간다. 『집으로』에는 다양한 장면들이 있지만 그 이미지들이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된다고 하기는 어렵겠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찾자면 이 영화의 이미지들은 자신이 연출된 것임을 강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물론 장면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우연성에 기댄 결과들이겠지만, 차이밍량의 카메라가 바라보는 방향, 그리고 그가 정한 프레임은 마치 뤼미에르의 영화가 그랬듯 철저히 연출된 결과이다. 예를 들어 후반부에 시장 장면을 생각해보자. 오토바이가 마치 앞에 카메라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듯이 뒤에서 앞으로 등장하며 프레임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한다. 이 지점에서 카메라는 가시화된다. 카메라는 자신이 풍경을 관찰한다는 것을 명백히 밝힌다. 그렇다면 카메라는 호웅흐앙시 자신인 것일까? 흥미롭게도 영화 도중에는 호웅흐앙시와 그의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직접 등장한다. 그렇다면 호웅흐앙시는 보는 주체인 동시에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람인 것일까? 아무렴 어떤가. 잠 속에서는 무슨 일이든 가능한 법이다. # 우연의 일치로 부산국제영화제의 마지막 영화로 『집으로』를 본 뒤 나 역시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집, 내가 현재 주로 거주하는 그 방도 나에게는 부산에서 머물렀던 호텔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나는 돌아갈 곳 없는 유목민이니까. 대신 잠을 청하면, 나 역시 집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잠을 청하고, ‘집’을 떠올려본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구경거리들, 사건들, 행동들, 사람들. 그것이 나의 장소들이다. 그것이 나의 집이다.좋아요4댓글0
Jay Oh
3.5
집으로, 그리고 또 집으로. 그 여정과 아직 이뤄지지 않은 여정들, 이제 이뤄지지 않을 여정들까지 담겼다. On homes and journeys, filled or unfulfilled.
떠돌이 개
5.0
이색적이면도 익숙한 풍경들을 통해서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보편적인 고향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
lilin🪽
3.0
태초에 영화는 어떻게 발명되었던가
오세일
4.0
1시간가량 남짓한 이 짧은 영화에는 딱히 주연이라 할 배우도, 서사를 이끌어 갈 대사도ㅡ사실상ㅡ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주인의 행방이 부재한 빈집들의 모습이 연이어 등장한다. 마치 내가 영화의 시작과 함께 버스 창가에 앉아 곤히 잠들어 있던 청년의 옆자리에 합석한 채, 창밖으로 유유히 시골의 풍경을 바라보는 듯한 이미지들의 연쇄. 어쩌면 '버려졌다'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 그 빈집들은, 모두 하나같이 누군가의 방문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벽에 구멍이 나고 지붕은 날아갔지만, 언제나 재건의 꿈을 꾸며 버스의 청년처럼 잠시 깊은 잠에 빠져있을 뿐이라는 듯이 늘 똑같은 자리에서 고요하게. 그들도 한때에는 청년과 같은 '목적지를 그리워하는 이들'을 품어주던 따스한 공간이었음을 아직 잊지 않았다는 듯이 말이다. <집으로>에서는 아파트, 즉 현대식 건물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나무판자를 덧대어 벽을 세우고, 지열을 피하기 위해 고상가옥을 고수하는 추억의 건축물만이 프레임 내부를 채울 권리를 갖는다. 그래서 <집으로>에서는 특유의 냄새가 난다. 나무 냄새, 못 냄새, 흙냄새, 그리고 사람 냄새. 어쩌면 누군가는 그 냄새를 통해 도심으로 떠나기 전 살았던 옛 시골(고향)의 집을, 또 누군가는 명절마다 방문하는 할머니 댁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집으로>는 관객을 특유의 향취로 매혹하며, 그 향에 매혹된 관객은 각자만의 노스탤지어를 더듬기 시작한다. 영화라는 창문의 프레임을 통해 가보지 않은 공간, 겪어보지 않은 문화를 바라보며 우리는 묘한 감각의 열병을 앓는다. 그러나 그 열병을 앓는 순간이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다. 그렇기에 <집으로>는 결국 영화를 보는 우리가 극장을 나와 다시 '나의'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영화는 우리가 평소에 집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늘상 밟는 길의 모습을 편히 상상할 수 있도록 하나의 시선을 제공해 준 것뿐이며, 우리는 그저 매일같이 카드를 찍고 타는 마을버스를 머릿속에 그려보면 된다. 덕분에 나는 부산에서 약 300km가 떨어져 있는 천안의 한 마을을 그려봤으며, 이제는 더 이상 집에 가는 길이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항상 교통체증에 시달리는 터미널 앞, 터미널을 지나면 금새 차분해지는 외곽 골목, 귀에 꽂았던 이어폰을 빼고 하루를 마칠 루틴을 실행하는 집 앞까지.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지루하기만 했던 나의 일상이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집으로>가 고맙다. 그래서 <집으로>는 우리 모두의 사적인 영화다.
정선교
4.0
차이밍량에게 집은 한때 영화가 잉태되는 조건이었다. 그의 영화에서 집은 때로 자폐적 자기인식에 대한 징후적인 몸짓들이 표출되는 공간이거나(<애정만세>), 그 자체로 영화라는 구조를 지탱하는 뼈대를 은유하며 장르적 혼종성을 불러들이는(<구멍>, <흔들리는 구름>) 환경이었다. 이처럼 그의 영화에서 영화적인 순간들은 집이 제공하는 유폐와 그 균열의 가능성으로부터 기인하는 것들이었다. 안식이 아닌 유폐로 기능하는 집과 여기서 시작되는 인물의 몸짓과 표정들. 이는 마치 관객의 자발적 유폐(관객은 기꺼이 두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같은 좌석에 감금되기를 희망한다)와 함께 영화를 시작하는 극장이라는 공간을 연상케 한다. 차이밍량에게 집은 곧 유폐와 함께 영화가 시작되는 곳, 즉 극장의 거대한 은유와도 같은 곳이었다. 그러던 그는 <떠돌이 개>의 기획을 전후로 더이상 집을 영화의 조건으로 여기지 않기 시작했다. 그는 집을 떠나서 영화를 찍기 시작했으며(<행자> 연작), 이는 동시에 극장과의 작별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차이밍량은 영화의 조건이었던 집을 떠나면서 자연스레 영화의 집인 극장과도 멀어졌다. 그의 영화는 극장상영을 고려하지 않은 채 촬영되었고 미술관에서 상영 혹은 전시되었다. 약 15분 간의 롱테이크로 이루어진 <떠돌이 개>의 라스트 씬은 영화관을 아트뮤지엄으로 탈바꿈시키고자 하는 기획을 반영한다. <떠돌이 개>의 극장 상영은 그 자체로 극장을 미술관화하는 작업과 다름없으며, 이는 극장과 미술관의 전적으로 개방된 교통가능성(그리고 영화적 쇼트와 회화, 조형물, 미디어아트 사이의 교통가능성) 하에서 작동한다. <집으로>에서 차이밍량은 <데이즈>와 <행자> 연작을 함께 작업했던 아농의 고향으로 향하는 길에서 수많은 집들을 찍는다. 텅 비어있는 집, 새로 짓고 있는 집, 무너져내려가는 집들이 프레임에 담긴다. 그의 카메라에 담긴 집은 더이상 어떤 영화적 순간들을 촉발하지 않는다. 집은 방향성 없이 운동하는 동물들과 율동하는 아이들의 후경에 자리할 뿐이다. 그는 한때 자신이 영화의 조건이라고 믿었던, 그러나 이제는 텅 빈 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집들의 밖에서 그것을 찍는다. <데이즈>가 <하류>와 이루는 관계처럼, 혹은 <시닝 공공 주택>이 <구멍>과 이루는 관계처럼, <집으로>는 차이밍량의 모든 영화적 행적, 정확히는 차이밍량의 영화가 한때 기거했던 장소의 흔적들을 투사하는 '지금 여기'의 공간을 응시한다. 그리고 이제 그는 주인 없는 집, 혹은 이것이 은유하는 영화 없는 영화관을 영화의 조건으로 삼는다. <집으로>의 마지막 쇼트는 극장이라는 공간의 신화를 박탈시켰던 <떠돌이 개>의 마지막 쇼트와 공명하는 듯 보인다. 이 장면은 그 지속의 시간과 함께 프레임 내에 회화 혹은 미디어아트의 유전자를 불러들인다. 그는 한때 자신이 '영화적인 것'들을 불러들였던 곳들을 순방하다 이내 영화적이지 않은 쇼트를 남겨둔 채 영화를 떠난다. 그리고 그는 마치 그곳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지만 정착할 생각은 없다는 사실을 환기하기 위해 여기를 떠돌아다니던 사람처럼 잠시 찾아온 집을 아무렇지 않게 다시 떠난다. 그는 곧 <행자>의 12번째 작품을 촬영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의 영화는 다시 극장을 떠날 것이다.
상어
5.0
마지막으로 석양을 보며 멈춰선 게 언제였을까. 분주하게 일하는 작업자들을 가만히 바라본 게, 줄줄이 이어진 낯선 건물들을 바라본 게 언제였을까. 마지막으로 집에 갔던 게 언제였을까. 말이 없는 영화를 보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하나하나 짚어 보았다. 지나가는 순간들과 이미지들을 놓치지 않고 간직하려 했던 때가 있었다. 나도 모르게 지금은 그러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집으로 왔으면서 집 바로 앞에서 모든 시간을 보낸 내 모습이 정말 웃겼다.
김병석
3.5
두고 온 마음에도 시간은 흐르고, 오늘을 살다 잠시 치워둔 기억에는 저만의 삶이 차곡히 쌓여 완전히 다른 곳이 되었다. 더 이상 돌아갈 고향은 없다. ‘그새 많이 바뀌었네’, 씁쓸한 멜랑꼴리에 빠질 새도 없이 내일이 밀고 들어온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 일순간 나는 외지인이 된다. 이 작품은 그 정처 없음에 영화의 매체적 특질을 덧대어, 스크린의 이쪽과 저쪽, 그리고 기록과 현존 사이를 떠도는 관찰자로서 영 화를 보아낸다. 그 무엇도 나와 연관될 수 없는 낯선 여관방. 또 다른 삶을 갈구하는 풍광 속에서 영화는 끝내 고민한다. 이제는 일어나야 하나, 그럼 또 어디로 가야 하나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이다.
석지협
4.0
나의 집 # 『집으로』는 제목과 달리 집에서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의 방은 분명 집이라고 하기엔 어색한 점이 있다. 새하얀 벽과 새하얀 침대. 창문에는 빛이 두 줄기가 들어와 침대를 비춘다. 침대 위에는 흰 수건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라오스의 풍경들을 고려해 보더라도 이 장면은 확실히 이질적이다. 이곳은 분명 집이 아니다. 집보다는 호텔에 가까워 보인다. 호텔은 분명 집과는 다르다. 호텔의 특성은 샹탈 아커만이 『호텔 몬터레이』나 『안나의 랑데부』에서 잘 묘사한 바 있다. 아커만이 건조하면서도 세심하게 관찰했던 뉴욕의 어느 동네 호텔인 ‘호텔 몬터레이’는 사회에서 유기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그 안의 사람들은 분명 같은 공간에 있으나 조우할 뿐 서로 관계를 맺지는 못한다. 여행의 설렘이 제거된 호텔은 단숨에 차가운 장소로 변모한다. 호텔은 이처럼 현실과 분리되어있는 장소이면서도 안에서의 편안함을 느낄 수도 없는 장소이다. 그러나 이러한 호텔의 철저한 개인성과 분리는 차이밍량의 영화에서는 다르게 전달된다. 가령 『구멍』에서 등장한, 하룻밤의 관계를 위해 사람들이 찾는 어두컴컴한 밀실들을 떠올려보라. 또는 『무무면』에서 이강생이 잠을 청하는 도쿄의 캡슐호텔을 생각해보자. 물론 이 공간들이 화려한 호텔과 거리가 멀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 공간들에서 발생하는 소외와 단절이 차이밍량의 영화에서 우울하게 표현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 공간들은 새로운 연결을 가능케 하거나 안정감을 가져다줄 수 있는, 개인적이기에 더 평안한 공간들이다. # 잠깐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자면, 나는 호텔을 좋아하는 편이다. 단순히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어느 장소든 내가 향수를 느끼거나 할만한 곳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어떤 장소에 큰 애착을 가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나에게 ‘집’이라 할 만한 것도 없다. 다만 내가 어떤 장소를 가고 싶거나 머물고 싶은 이유는 그곳에 있는 여러 요소들, 사람들이나 볼거리들이 나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설사 고향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다른 나라에 있더라도, 나는 그곳의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장소들에서 안정과 편안함을 느끼곤 한다.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나는 어느 한 곳에 기반을 두지 못하고 어디든 간에 누울 수 있는 부드러운 바닥을 찾아다니는 유목민에 가깝다. 어디든 편하지만, 어디든 진정으로 나를 보듬어줄 순 없다. 생각해보면, 나는 고향 도시보다 그곳에 더 이상 살지 않는 내 가족들을 훨씬 더 ‘집’으로 여기는 듯하다. 아커만에게 집이 곧 자신의 어머니였던 것처럼 말이다. 『노매드랜드』의 펀의 대사를 적절히 인용하자면, 단순한 ‘집(house)’과 진정한 안식처로서의 ‘가정(home)’은 다르다. # 아농 호웅흐앙시는 어느 버스 안에서 잠을 청하고 그 잠 속에서 자신의 고향 라오스로 돌아간다. 마치 꿈을 꾸듯 사운드도 버스의 소음에서 다음 장면의 놀이기구의 소음으로 겹쳐 들어간다. 『집으로』에는 다양한 장면들이 있지만 그 이미지들이 모두 유기적으로 연결된다고 하기는 어렵겠다.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찾자면 이 영화의 이미지들은 자신이 연출된 것임을 강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물론 장면들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우연성에 기댄 결과들이겠지만, 차이밍량의 카메라가 바라보는 방향, 그리고 그가 정한 프레임은 마치 뤼미에르의 영화가 그랬듯 철저히 연출된 결과이다. 예를 들어 후반부에 시장 장면을 생각해보자. 오토바이가 마치 앞에 카메라가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듯이 뒤에서 앞으로 등장하며 프레임의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향한다. 이 지점에서 카메라는 가시화된다. 카메라는 자신이 풍경을 관찰한다는 것을 명백히 밝힌다. 그렇다면 카메라는 호웅흐앙시 자신인 것일까? 흥미롭게도 영화 도중에는 호웅흐앙시와 그의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직접 등장한다. 그렇다면 호웅흐앙시는 보는 주체인 동시에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람인 것일까? 아무렴 어떤가. 잠 속에서는 무슨 일이든 가능한 법이다. # 우연의 일치로 부산국제영화제의 마지막 영화로 『집으로』를 본 뒤 나 역시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집, 내가 현재 주로 거주하는 그 방도 나에게는 부산에서 머물렀던 호텔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나는 돌아갈 곳 없는 유목민이니까. 대신 잠을 청하면, 나 역시 집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잠을 청하고, ‘집’을 떠올려본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구경거리들, 사건들, 행동들, 사람들. 그것이 나의 장소들이다. 그것이 나의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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