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Pt.1> Ep.1 옛날 할리우드 감독들은 눈 감고도 만들었다는 B급이 원래 이렇게 재밌는 건가 싶었다. 사실 도입부 산만한 대사들과 롱테이크, 시종 쏘아대는 클로즈업이 이어져 부담스럽긴 했으나, 뒤에선 오히려 대상을 보여주는 대신 인물들의 리액션 숏과 사운드만으로 강렬함을 남기는 묘사가 흥미로웠다. 결말이 없는 이야기라던 감독의 말처럼 딱 재미있을 때 끊겼다는 생각이 드는데, 뒷 내용이 괜히 궁금하면서도 더 이어지면 사실 그저 그럴 것 같긴 하다. 결말 없이 끝나는 그 지점이 오히려 가장 알맞아 보인다. Ep.2 B급 공포 스릴러에서 갑자기 뮤지컬로 넘어 가는데, 헤어진 연인들 사이에 흐르는 파멸적인 느낌에다 과거를 되새길 땐 애틋한 인상도 준다. 특히 마지막 무렵, 여자의 죽일 듯한 눈빛만이 담기며 노래를 토해낼 때가 가장 압도적. 그리고 노래가 은근히 중독적이어서 쉬는 시간에 흥얼거림...😏 그런데 서브로 치고 들어 오는 괴상한 스릴러에 두 플롯이 너무 이질적이라 의아할 무렵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그냥 딱 끊겨 버린다. 어쩌면 두 남녀의 충돌 ㅡ물론 느끼기엔 여자의 일방적인 승리지만ㅡ처럼 마치 이질적인 두 세계가 충돌할 때의 그 이상한 긴장감이나 불안, 그러니까 실은 충돌이라는 것, 그러한 감각 자체가 목표였는지도 모르겠다. <Pt.2> Ep.3 스파이 장르 종합 선물 세트. 일단 다채로워서 이야기의 맛이 있는데, 회상조의 내레이션만으로 서사는 물론 서스펜스나 로맨스 등 다양한 정서를 이끄는 면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특히 301, 멜로. 인물들이 감정을 읊지 않아도 뭔지 모를 애틋함이 절절히 느껴진다. 물론 다른 스파이들 모두 재밌었고, 보리스를 찾아 다니는 50의 심리적 풍경도 좋았다. 개인적으로 이 파트에서 시베리아를 묘사하는 부분이 특히 좋았는데, 그때 번역이 인상적인 게, 영어로는 "white as ~"로 나오는데 우리말로는 "희다, 허옇다, 희멀겋다, 뿌옇다, 창백하다" 등으로 표현되던 것. 다양할 뿐만 아니라 (비유에 맞게끔) 적확한 분위기를 잘 살려서 번역알못 입장에선 신기하고 유독 기억에 남는다. Ep.3 역시 결말이 없는 이야기로서, 일반적인 경우 클라이맥스에 해당할 최종 결전을 앞두고 ㅡ심지어 영화 스스로 "그놈들이 죽이러 온다"고 몇 차례나 강조했음에도ㅡ 이야기가 문득 끝나 버리는데 스펙터클을 도려낸 결단이 과감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영화가 마음을 뺏는 지점은 다른 곳에 있었던 만큼 그 역시 오히려 가장 적당한 맺음처럼 다가온다. <Pt.3> Ep.4 메타적인 바탕으로 시작해서, 카메라라는 시선과 피사체라는 존재 사이의 시원적 관계를 곱씹는 듯한 회화적인 풍경의 이야기를 지나 페이크 다큐랄지 풍자 코미디랄지 뭐랄지 플롯을 해체하는 대신 그 해체의 과정 자체를 플롯으로 삼은 듯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러다 앞선 농담을 머금은 판타지로 돌연 도약하며 허구나 현실의 경계 같은 것이 (사실 진작에) 무너지고, (블랙)코미디인지 미스터리인지 기이한 장르 속에서 마치 영화(의 이야기)를 어떻게 떠올리고 만들었는지 탐색하는 것 같은 메타적 이야기를 또 이어간다. 특히 날짜대로 흘러가는 일기장 형식인데도 이상하게 빠져 나오지 못할 것만 같은 미로나 구덩이처럼 다가온다 (홍상수?). 아무튼 어쭙잖게 보자면 문학적 연극적 풍경이 뒤섞이는 다종한 흐름 안에서 탐색 주체의 죽음으로 끝맺는데, 결국엔 네 명의 배우와 풍경의 결합이라는 시원적인 이미지(?)로 회귀한다. 어쩌면 영화 전체가 이를 위한 것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독특하고 파괴적인 흐름인데 앞선 두 파트를 자양분 삼을 뿐만 아니라 뒤 이어질 에피소드에도 해체적인 인상을 마련하는 토대가 되어준다. Ep.5 깊은 콘트라스트로 시작하는 흑백 무성이길래 어떤 운동적인 활력(혹은 리듬)이 담긴 이미지를 강조하는가 싶었고, 실제로도 그런 부분이 없잖아 있었던 것 같으나, 결국엔 이상하게 조금 시큰둥하게 다가온 에피소드였다. 다만, (무지해서 이 쓰임이 맞는진 모르겠는데) 뭐 포스트 모던하다 싶을 정도로 반동적으로 밀어붙이며 마치 연극적, 문학적, 회화적 등으로 칭하고 싶어지는 감각들을 품은 채 (어쨌든 카메라 앞에 놓인다는) '영화(적)'를 탐구하는 것처럼 보이던 에피소드 4 이후에 흑백 무성 영화가 도래하니 기묘하긴 했다. 그러다 갑자기 프랑스어도 들려오고, 확실히 프랑스 영화(장 르누아르의 리메이크라고 한다)에 영향 받았다는 건 알겠으나, 과문한 탓에 정확한 맥락은 모르겠다. 부족하게나마 언뜻 떠오르는 건 자크 베케르? (사실 고작 두 편 봤지만 어쨌든 <7월의 랑데부>) 에어쇼까지 동원되는 섹슈얼한 난장 뒤에 다시 원점에서 만날 것 같은 엔딩도 인상적이긴 했다. 특히 개인적으론 내용보다도 갑자기 찾아온 지독한 무음이 참 기묘했는데, ㅡ좀 과장된 표현일 수는 있지만, 소리가 없는 게 아니라 마치 무음이라는 또 다른 사운드가 존재하는 듯한 느낌일 정도로 순간 강렬했다ㅡ 주변 사람들의 숨소리는 물론 때론 침 삼키는 소리마저 들리는 상황 속에서 이상한 이야기를 비추는 이미지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이 좀 이상야릇했다. 긴 러닝타임이 주는 괜한 압박감 속에 슬슬 끝이 도래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더해진 탓에 이보다도 더 영화를 본다는 자각을 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이 점에서 가장 심심하게 본 에피소드긴 해도, 동시에 가장 의미심장하게 (말 그대로 육체적으로) 느낀 에피소드일 수도 있겠다. Ep.6 + 엔딩크레딧 아무래도 40분에 가까운 엔딩크레딧도 에피소드 6의 연장으로 보는 게 맞을텐데, 일단 거친 화면 질감에 무성 서부극으로 돌아간 영화의 마지막 선택도 참 얄궂지만, 크레딧부터가 더 새침하다. 근원적인 듯 허허로운 지역성 위에서 '영화'라는 걸 아예 뜯어내 버린다. 어쩌면 Ep.4보다 더 파괴적. 이제 픽션인지 실재인지 정말로 허물어진 경계 속에서 모두가 떠나고 단지 해가 저무는 풍경만을 끈질기게도 응시하는데, 아무래도 필연적일 엔딩조차 계속해서 지연시킨다. 노래가 돌림노래인지 어찌나 반복되던지, 흡사 예능에서 노래를 끝낼 듯 끝내지 않는 콩트가 떠오를 정도. 그래도 결국 끝나긴 하더라. (Continúa) 마지막으로, 미천한 감상문을 쓰느라 제대로 짚어 보진 못했는데, 사실 <라 플로르>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네 명의 배우긴 할 테다. 장르건 무엇이건 온갖 것이 다종하게 섞이고, 뒤로 갈수록 모든 게 흐려지는 본편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 있다면 네 배우의 존재(감) 아닐까. 다섯 번째 에피소드에서 사라진 점이 괜히 의아하긴 하나, 그럼에도 영화를 지탱하는 건 역시 이들 네 명의 배우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혹시 영화의 끝엔 배우만 남는 건 아닐까. 배우는 또 다른 풍경인가. 아무튼 인터미션을 포함하면 15시간에 가까운 러닝타임에 개인적으론 이동시간까지 왕복 4시간을 더해서... 참 이틀에 걸쳐 둘도 없을 경험이었다. 영화제에도 하루를 채 바쳐 본 적이 없는 나로선 단 한 편을 위해 이만한 시간을 투자한다는 건 다신 없을 것 같고, 그만큼 롱테이크 없이도 시간이 흐른다는, 영화를 보고 있다는, 자각도 빈번했다. 물론 한순간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더래도 거짓말일 테고, 졸진 않았으나 체력적인 부담에 이따금 감기는 눈꺼풀과 사투하기는 했다. 그렇다고 영화적 체험이니 하는 휘황한 수식어로 이끌기엔 좀 부끄럽지만, 어쨌든 이런저런 느낌이 신선했다. 일단 기본적으로 장르가 다채로운데다 인상적인 지점이 많아 다시 보고 싶어질 것 같긴 한데, (아직은) 두 번 볼 엄두는 안 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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