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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전갈

뱀과전갈

2 years ago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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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클럽

영화 ・ 1985

평균 3.2

2024년 06월 26일에 봄

이창동은 '청춘'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고 했다. 푸를 청에 봄 춘,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 어린 나이를 그런 아름다운 명사로 부르기엔 그 시기는 너무나도 가혹하다고, 이창동은 말했다. 외부의 세계은 휘몰아치고, 내부의 소우주는 끓어오른다. 이 모든 것은 이유도 없이, 단지 젊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에게 불쑥 찾아온다. 이른 나이에 내면의 혼돈과 외부의 압박을 오롯이 홀로 견뎌내는데, 거기에다 대고 푸른 새싹이 돋아날 시기라며 기성세대가 무책임하게 일컬을 수 있겠는가. 이창동의 논점은 - 젊은 세대는 아무래도 돌아갈 수 없는 시기를 향한 기성세대의 동경에 의해 지나친 낭만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창동의 그런 언급이 있기도 훨씬 전에, 1985년 일본에서 중년의 감독이 청소년들을 향해 영화로써 비슷한 화두를 건넸다. 그 영화는 일부 장면만 따서 얼핏 봤을 때는 ‘젊음 찬가’로 오인할 수도 있다. 전방위로 뿜어대는 에너지에 취한 사춘기 아이들의 왕성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는 영화인가? 아니다.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젊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냐고 말하는, 그 영화는 바로 <태풍 클럽>이다. <태풍 클럽>을 오인하면 안 되는 게, 이 영화는 청춘 영화가 아니다. (필자의 생각은 그러하다.) 안티-청춘, 反 청춘 영화다. 빛나는 젊은 시절?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사춘기는 고통의 연속이고, 우리는 결국 파국으로 치닫고 말 거야.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꽤나 냉소적인 영화다. 즉 <썸머 필름을 타고!>의 감성을 기대하고 가면 큰코다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태풍 클럽>은 청소년기에 겪는 모든 종류의 고통과 수난을 추상으로써 그려내는 영화다. 그 고통을 소마이 신지는 여러 방면으로 그리지만 아주 과격한 화법으로도 표현하기에, 이 지점에서 관객은 당연히 거북함을 느낄 것이고 - 감독은 이 거북함 마저도 당연히 의도했을 것이다. 이 거북감에서 1차원적으로 '영화가 불쾌하다'라며 평가를 거부하거나 혹평을 내리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을 것이고 그런 평가도 물론 이해한다. 하지만 필자는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이는 유효한 연출이라 주장하고 싶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에서 주인공의 관음 행위가 윤리적으로 옳지 못하다고 해서 영화의 작품성을 비판하는 건 좋은 태도인가?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은 사랑을 추상으로써 표현하기 위해 관음증이라는 표현 수단을 택한 것이다. <태풍 클럽>도 같은 맥락이다. 사춘기라는 고통과 거북감을 추상으로써 표현하기 위해 하나의 표현 수단을 택한 것이다. <태풍 클럽>으로 돌아와서, 이 영화에서 거북함을 탁월하게 묘사한 몇 개의 장면을 언급하겠다. 카츠에의 등에 남겨진 상처를 본 켄이 책상 위 물건을 뒤엎고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을 비추는 장면. 이 장면은 정말 기이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과장이 아니라, 이 장면을 통해 나는 '영화'의 순기능을 목도했다. 구두로 설명할 수도, 글로도 묘사할 수도, 행동으로 표현할 수도 없고 절대로 형언할 수도 없는 감정선. 우리가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고 속으로만 느낄 수 있는 거북함과 불편함, 그리고 이상야릇한, 이러면 안 될 것 같지만 불가피하게 피어오르는 연민의 감정마저도, '하나의 연출'만으로 끌어낼 수 있는 예술 매체는 영화뿐일 것이다. 이것이 시네마의 힘이다. 이것이 시네마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고 직감했다.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 리에가 이불 속에 속옷 차림으로 들어가 엄마를 부르짖는 장면에서 분출되는 불쾌하고도 이상한 파토스는 여타 문학이나 연극에선 절대 하지 못하는, 오직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언어라고 언급하고 싶다. 오직 영화만이, 영화만이 정립 가능한. 이런 장면들을 통해 소마이 신지는 청소년기를 지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를 탁월하게 - 영화적으로 - 묘사했다. 영화 속 청소년들은 내부의 혼돈과 더불어 외부의 태풍을 견뎌낸다. 내부, 학교 안에서의 그들은 정돈되지 못하고 불안정하다. 외부인과의 접촉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연락이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내부적으론 갈등이 일어나며 연신 부딪히고 만다. 그럴 때마다 그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로 귀결되는 지점이 있다. 바로 음악이다. 그들을 하나로 묶는 연대의 원천이 바로 음악이다. 어라, 이럴 때마다 영화를 보고 있던 나의 입에선 '그러면 안 되는데', 소리가 절로 나온다. 왜 그랬을까? - 이는 영화 연출적인 부분, 즉 영화 외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영화에 음악을 쓰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그건 아니다. 왕가위의 <화양연화>처럼 음악을 끝내주게 잘 사용하여 걸작의 반열에 오른 영화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음악의 남용은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음악을 남용해버리면 영화와 음악이 주객전도되어 관객에게 '뮤직비디오'로 인식되어버릴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태풍 클럽>은 이 위험성을 무시하고 음악을 남용한다. 그러나 이것이 궁극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는가? 아니다. <태풍 클럽>은 이 잘못된 선택을 역으로 활용하는 아주 현명한 수를 썼다. 필자는 이 연출점이 바로 <태풍 클럽>이 걸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음악과 함께 연대하면서 관계를 서서히 정돈하는 듯 '보이고', 그들의 끈끈해 '보이는' 연대는 학교 외부를 향하게 된다. 태풍의 비바람을 맞으며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되어 낭만을 누리는 것처럼 관객으로 하여금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다소 충격적인 결말을 통해 감독은 음악으로 이루어진 어설픈 연대는 처연하게 해체될 뿐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자살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고, 그들에게 있어 사춘기 속 하나의 인격은 거세된다. 태풍이 완전히 지나간 줄 알았는데 태풍의 중간에 잠시 정착했던 것처럼, 그들의 연대는 깨져 다시 혼돈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질 것임을 암시하고, 그 이후는 철저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은 참혹한 청년기를 관객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겨두고픈 소마이 신지의 욕구가 드러난 연출이라고 생각한다. 그 아무것도 모르는 두 학생의 순수한 뒷모습에서 감독은 다소 악의적인 미래를 꿈꾸며 영화를 마친다. '청춘'은 아무리 생각해도 잔인한 단어다. 아무래도 소마이 신지 또한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태풍 클럽>은 사춘기의 맨살을 보여주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그 안의 내장마저도 철저히 해부하여 보여주는, 잔혹한 걸작이다. 현재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극강의 영화 중 한 편이니 반드시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24.06.26. CGV 서면 18:30 관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