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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일

오세일

1 year ago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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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후와 세기

영화 ・ 2006

평균 3.9

아피찻퐁의 영화에서 상투적인 이야기의 흐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인물들의 서사는 그저 영화 바깥에 존재하는 예술가(아피찻퐁)의 관념을 전달하기 위한 정보적인 초상 정도로 받아들이면 되며, 그보다 우리들이 집중해야 할 것은 스크린에 새겨지는 일련의 정서이다. 이를테면 1부에서 진료를 하다 말고 갑자기 노래를 부르는 치과 의사 쁠레, 차를 마시며 창밖의 풍경을 조용히 바라보는 여의사 테이, 자연에서 울려 퍼지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투명한 창문 너머에서 바람에 몸을 맡기고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넘실거리는 갖가지 푸른 잎들 등. 그곳에서는 사랑 고백도 수줍지만 로맨틱하게 이루어진다. 비록 용기 내어 한 고백의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처방전 없이 약을 달라고 떼를 쓰는 스님과 그의 부탁을 거절하느라 애를 먹는 테이의 당혹스러운 순간도 (잊고 싶은 기억이 아닌) 한때에 겪었던 찰나의 추억들로 남겨질 뿐이다. 하지만 그에 반해 2부의 정서는 1부와 명확히 대비된다. 2부에서는 자연이 소실되고 그 자리에 건물이 풍경을 대체하는 시각적인 수단이 된다. 병원의 미관을 위해 인위적으로 설치된 몇 그루의 나무들뿐만이 정원에 자연의 미를 잃은 채 존재하며,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대신 텅 빈 흰색의 병원 건물 내부를 거니는 피사체들의 보폭 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진다. 또한 참전 용사(혹은 전쟁의 피해자)들의 잘려나간 팔다리가 강조되기도 하며, 그들의 육신을 고치기 위한 현대적 기술들이 난무한다. 마치 자연의 것들과 맞바꾼 듯한 현대화의 도식적인 풍경. 1부에서의 길지만 예뻤던 사랑 이야기는 짧지만 강렬한 정사의 표현으로 2부에서 다시 그려지며, 현대의 기술로도 고치지 못한 병을 타파하기 위해 차크라라는 비과학적인 수단까지 동원한다. 이미 인류가 진작에 버린 옛것의 마법적인 힘, 그러니까 순수한 사랑과 여유와 믿음이 있을 때만 비로소 기능할 수 있는 무언의 힘을 이제 와서 다시금 필요로 하는 아이러니한 광경. 그 순간 영화와 현실의 간극은 모호해진다. 차크라를 진행하는 전문가와 동행한 한 할머니는 뜬금없이 카메라를 인식하고 응시하는 행위를 보이며, 영화는 이러한 모순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리고 이내 (그들의 말에 따르면) 차크라를 필요로 했던 일산화탄소에 중독된 환자는 여자 친구가 있냐는 쁠레의 질문에 '판도라' 문신으로 답을 대신한다. 2부에서 유일하게 전생의 존재를 언급하고 믿던 환자. 하지만 전생이라는 개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 2부의 세계에서 그는 '일산화탄소 중독'이라는 병명이 붙은 환자로 인식될 뿐이며, 앞서 닭의 저주에 걸렸다고 두려워하던 스님 또한 '공황장애'라는 확정된 병명이 내려진다. 2부의 마지막에 다다르자, 얼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있는 존재들이 여럿 포착된다. 그리고 이내 그들의 영혼은 연기가 되어 한 공간에 집결되고, 환풍구의 구멍에 빨려 들어가는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직후에 펼쳐지는 아피찻퐁의 가능 세계. 나른한 오후의 주말, 분명히 이곳은 2부와 같은 시공간대이지만 녹색이 우거진 자연의 경광이 먼저 눈에 담겨진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데 모여 파워 댄스를 추는 시민들. 이것이 바로 아피찻퐁이 그리는 가장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시대의 변화에는 순응하겠지만, 결코 옛것의 정서만큼은 잃어버리지 않은 인류의 일상. 내가 스님이 아니라 DJ를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바람의 상상도 해보지만, 상상을 현실로 이루지 못한 현재에 절망하지 말고 그 꿈을 향수로 품으며 살아갈 수 있는 용기. 어린 시절의 평화와 여유를 그리워하는 모든 어른들을 위한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