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홍준영

홍준영

4 years ago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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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북

책 ・ 1999

평균 3.8

친아버지를 두 번 죽인 남자. . ‘백년의 고독’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작품은 모두 읽는 이를 정신없이 헤매게 한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능청스럽게 늘어놓는 뻔뻔함. 역사적 비극을 차마 직시하지 못하고 다만 동화적 시선에서 흘긋 훔쳐보는 조심스러움. 유기적 통일성에 대한 강박을 버리는 대신 강렬한 삽화로 인상을 남기는 과감함. 현실로부터 한 겹 떨어져 있는 듯한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천진난만함. 그러면서도 작품 곳곳에 버거울 정도로 넘쳐 흐르는 에로티시즘. 영원에 가까운 세월 동안 죽지 않고 공동체의 몰락을 지켜보는 할머니들. (안나 콜야이체크와 우르술라 부엔디아) 과거를 회상하던 화자가 현재에 이르렀을 때 느닷없이 닥치는 결말까지 닮았따. 하지만 두 작품은 사뭇 다른 여운을 남긴다. 마르케스의 소설은 환한 대낮에 낯선 미로에서 길을 헤매게 한다. 반면 그라스의 소설은 수백 번도 오간 집 근처 삼거리에서 팔다리를 흐느적거리게 한다. 가로등도 꺼진 밤, 술에 잔뜩 취해서 길을 헤매게 하는 것이다. . 마르케스는 조국 콜롬비아의 역사를 뜯어 와 이야기라는 가상의 미로를 만든다. 읽는 이는 마콘도가 콜롬비아와 닮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할 뿐, 부엔디아 사람들이 콜롬비아에서 살고 있다고 상상하지는 않는다. 읽는 이와 과거사의 비극 사이에 자연스럽게 안전한 간격이 생겨나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케스는 혹여나 자신의 이야기가 현실의 피해자들을 다시 아프게 할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자유롭게 뛰어놀 공간을 확보한 작가는 마음껏 미로에 색을 입힌다. 읽는 이는 ‘양철북’처럼 나치 치하의 독일으 배경으로 한 영화 ‘조조 래빗’이나 ‘바스터즈 : 나쁜 녀석들’에서도 비슷한 수법을 확인할 수 있다. 가상의 한 가정집, 또는 가상의 한 부대를 만들어낸 작가는 역사가 제공하는 풍요로운 소재를 활용하면서도 걱정 없이 유희할 수 있다. 나치 장교에게 분홍색 옷을 입힐 수도 있고 히틀러에게 푸짐한 총알을 먹여줄 수도 있다. 한바탕 미로에서 헤매다가 나오면 작가의 손을 붙잡고 실컷 웃을 수도 있다. . 그러나 귄터 그라스는 미로를 만들지 않는다. 그는 가상의 배경을 꾸며내지 않고 단치히 우체국으로, 파리의 전선 극장으로, 노르망디의 벙커로 간다. 그는 정확히 시간의 흐름을 따라 역사의 상처 앞에 차례차례 선다. 따라서 읽는 이와 과거사의 비극 사이에 안전한 간격을 두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조작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라스는 읽는 이에게 술을 먹인다. 영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에서처럼 주인공을 어린아이 상태에 고정한다. 문장들은 들쑥날쑥하게 흐리고 이야기의 흐름은 오락가락 뒤집는다. 폴란드가 침공당하면 오스카는 양철북으로 시선을 회피한다. 러시아군이 독일을 점령하면 오스카는 개미 떼에게 시선을 돌린다. 끊임없이 할머니 안나 콜야이체크의 치마 속으로 돌아가기를 희구하면서, 주인공은 도저히 고향 풍경을 쳐다보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떨군다. 술 냄새를 역겨워하며 정신을 차리면 작가의 손을 붙잡고 펑펑 울어야 한다. 그라스는 양파 껍질을 까며 이 울음조차 미리 준비해 둔다. . “우리들의 세기는 나중에 언젠가는 눈물 없는 세기라고 명명될 것이다. 도처에 슬픔이 수두룩하게 깔렸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슬퍼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눈물이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쉬무의 양파 주점에서 주인으로부터 돼지나 물고기 모양의 도마와 식칼을 80페니히에, 그리고 밭에서 자라나 부엌에서 요리되는 보통의 양파를 12마르크에 나누어 받아 그것을 잘게 더 잘게 썰었다. 그 즙이 무언가를 이루어줄 때가지. 하지만 그 즙이 도돼체 무엇을 이루어주었단 말인가? 그것은 이 세상과 이 세상의 슬픔이 해내지 못한 것을 달성했다. 즉 인간의 둥그런 눈물을 자아냈던 것이다. 손님들은 울고 또 울었다. 조심스럽게 울었다. 마음껏 울었다. 염치도 없이 울었다. 눈물은 흘러내려 모든 것을 떠내려가게 했다. 비가 왔고, 이슬이 내렸다. 오스카는 수문이 열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2; 363) 문제는 왜 그라스가 이런 선택을 내렸느냐이다. 그는 왜 알록달록한 미로를 꾸미는 대신 술을 들이켜고 ‘우리 집을 못 찾겠군요’ 하고 소리쳤는가? 그는 왜 자기 집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는가? . 오스카는 친부 살해범이다. 그것도 두 번이나 친아버지를 죽인 연쇄 살인범이다. 오스카는 폴란드 우체국을 점령한 독일군에게 친아버지 얀 브론스키를 팔아넘긴다. 그 대가로 자신의 양철북을 지켜낸 그는 몰려드는 죄책감을 쫓아내며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무엇으로도 방에서 내쫓을 수 없는 불손한 죄책감이 병실 침대의 베갯머리까지 찾아와 나를 괴롭히는 나날 동안 나는 다른 여느 사람처럼 모든 것을 나의 무지 탓으로 돌렸다. 사실 그 시절에는 무지가 유행이었고, 오늘날까지도 멋진 모자로서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 어울리고 있으니까 말이다.”(386) 사실 그는 폴란드 침공이 닥치기 전에도 일관되게 무지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스카는 소리를 질러 진열창을 부술 수 있었고, 이런 묘기로 독일인들이 범죄를 저지르게 유도했다. 그리고 ‘수정의 밤’이 닥쳐 마술이 아닌 현실이 유대인들의 진열창을 산산조각내자, 오스카는 직접 장난감 가게에 숨어들어 양철북을 훔쳐냈다. 그리고 그는 모른 척 북만을 두들겼다. . 작가가 유대인 학살을 묵인하고 폴란드 침공을 방관한 나치 치하 독일인들을 비판하기 위해 오스카의 행적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런 전개는 흔하다. 현실의 죄과를 꼬집으려는 작가 중 조금이라도 문학적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런 장치를 사용한다. 나치와 결탁한 가톨릭교회를 빗대는 ‘기적은 없다’ 장이나 전쟁 말기 독일 공권력의 붕괴를 틈타 창궐한 잡범들을 보여주는 ‘먼지떨이들’ 장 모두 비슷하게 흘러간다. 오스카는 나치의 범죄에 대놓고 가담하지는 않지만,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꾸준히 죄악을 방조하고 일탈에 동조한다. 읽는 이는 자연스럽게 작가의 의도대로 오스카의 침묵을 비판하게 된다. 나아가 자신 역시 무고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독일인들의 안일함을 꾸짖게 된다. 그러면서 읽는 이 본인은 시대의 폭력 앞에 눈을 감고 또 한 명의 오스카가 된 건 아닌지 되짚게 된다. 채만식부터 조지 오웰까지 무수한 작가들이 활용한, 언제나 효과가 확실한 전형적인 레퍼토리다. . 그러나 오스카가 두 번째 친아버지인 마체라트를 죽게 할 때 ‘양철북’은 더 높은 경지에 이른다. 러시아군이 단치히를 점령하자 나치당원 마체라트와 가족들은 지하실에 숨는다. 오스카는 아버지가 애써 숨겨놓았던 당 배지를 다시 그에게 내밀고, “나의 추정상의 아버지는 당을 꿀꺽 삼키고 죽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을 깨닫지도 못하고, 아니 깨달으려고도 하지 않았다.”(2; 159) 여전히 오스카는 뻔뻔하다. 나 말고 네가 나치당원 아니었냐며 고집불통 배지를 내미는 모습은 효과적으로 다수 독일인을 겨냥한다. 하지만 이제 나치 역시 살해당한 피해자가 된다. 오스카와 독일 대중이 가해자가 되고 나치가 피해자가 되는 지극히 위험한 전복이 일어나는 것이다. 마체라트가 폴란드 아내와 기형야 아들을 아끼는 가장이었다는 사실은 더 반역적인 해석을 제안한다 : 오스카는 나치의 시체를 방패 삼아 살아남은 것이다. 현대 독일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낳고 기른 나치 아버지를 살해했다. 끝까지 무지의 가면을 쓴 채. . 바로 여기서 그라스의 죄책감과 부끄러움이 발생한다. 자신의 조국이 무고한 아버지와 범죄자 아버지를 모두 죽이고 돌아온 탕아라는 부끄러움 때문에 그라스는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이다. 마체라트의 죽음 이후 작가는 조금이나마 위를 올려다보려고 시도한다. “이제는 ‘자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가 아니라 ‘자라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판 위에다 북을 던졌다.”(2; 177) 오스카를 성장시켜 어른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무고한 아버지의 핏값을 위해서 범죄자 아버지의 무덤을 파헤쳐야 한다는 딜레마, 어떤 방식으로든 배은망덕한 패륜아가 되어야 한다는 딜레마가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오스카의 성장은 120cm에서 긑나고, 그의 어깨에는 커다란 혹이 달린다. 완전한 불구조차 되지 못하는 진정한 불구가 된 오스카, 그리고 3부의 자전적 줄거리가 드러내다시피 오스카의 원본인 작가 그라스가 술에 잔뜩 취해 고향길을 헤맨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수치심에 젖고, 트라우마에 갇힌 채 그들은 읽는 이에게 일그러진 독일사를 들려주는 것이다. 마술과 음담패설과 헛소리와 양파 냄새와 눈물을 섞어 가며. . 술에서 깬 독일은 시체 냄새를 지우려고 전력을 다한다. 오스카의 투박한 양철북과 대비되는 플루트를 연주하는 클레프는 간절히 부활을 꿈꾼다. “클레프는 틀어박혀 있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체 냄새도 그를 따라 나왔다. 그는 창을 활짝 열고 신문지로 연통 구멍을 막았으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의 천연색 사진을 갈기갈기 찢으면서 왕권주의 시대의 종결을 선언하였다. 그러고는 수도꼭지로부터 설거지대로 물을 쏟아지게 하여 몸을 씻기 시작했다. 그는 씻고 또 씻었다. 클레프는 방금 씻기 시작하여, 모든 것을 씻어버리려 했다. 그것은 단순한 씻음이 아니라 일종의 목욕재계였다. 몸을 깨끗이 씻은 그는 수도꼭지를 떠나, 벌거벗은 뚱뚱한 몸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돌진하다시피 다가와서는 꼴불견의 성기를 축 늘어뜨린 채 내 앞에 우뚝 섰다. 그러고는 나를 안아 올렸다. 두 팔을 뻗쳐서 나를 안아 올렸다. 이때 나는 깨달았다. 오스카의 북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클레프까지도 부활했던 것이다.”(2; 351) . 하지만 두 아버지의 망령은 사라지지 않는다. 폴란드 기병대의 환영을 불러내 우체국에서 죽은 이들의 원혼을 풀어내는 결정적 장면에서조차 과거의 흉터는 굳건하다. 항상 1인칭 시점으로 ‘나’나 ‘오스카’라는 지시어를 사용하던 작가가 갑자기 이 대목에서 시점을 바꿔 주인공을 ‘마체라트 씨’라고 칭하는 것이다. “마체라트 씨가 우리 어머니의 과수원 안에서 울려 퍼지게 한 그 행진곡이 폴란드 기병대를 나타나게 했던 것입니다.”(2; 467) 자신이 죽였던 나치 아버지의 이름을 빌려 역시 자신이 죽인 폴란드인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는 오스카의 모습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천 쪽에 달하는 문학적 반성문의 끝에서까지 악착같이 자신의 가슴팍에 마체라트의 이름을 새기려는 작가의 죄책감이 겹쳐 보이기에 더욱 그렇다. 나치를 미화하지도 악마화하지도 않으면서 그들의 시대를 기록하려는, 폴란드 혈통의 나치 단원 귄터 그라스의 작품이기에 미지의 미래를 두려워하는 모호한 결말에도 화가 나지 않았다. 그 자신이, 독일의 양심이 도대체 어떻게 과거를 소화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토로에 전적으로 공감했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 서글픈 토로가 ‘양철북’만이 가지는 매력이고 ‘양철북’을 읽을 만한 책으로 만드는 가치이다. 오늘의 정치와 어제의 역사에서 악을 찾아내 공격하는 일은 분명 고귀하다. 그러나 거의 모든 소설가는 자신과 무관한 악을 골라 손쉽게 물어뜯었다. 독재를 증오했던 마르케스는 독재정권을 물어뜯었고 인종차별을 혐오했던 타란티노는 나치 정권을 물어뜯었다. 자책과 부끄러움의 정서조차 악을 꾸짖는 데 쓸 수 있었다. 작가들 자신만큼은 문제의 악과 무관하다는 강한 자기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식민주의를 증오했던 윤동주는 일본인이 아니었기에 일제에 맞서지 않는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저항시를 쓸 수 있었다. 하지만 귄터 그라스는 자기 자신이 속했던 거악을 공격하며 느낀 순수한 부끄러움을 작품으로 남겼다. 친부 살해를 통해서만 친부 살해의 죄를 씻을 수 있는 복잡미묘한 시대, 그 한복판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지식인의 반성과 사과를 읽는 건 ‘양철북’을 통해서만 할 수 있는 드문 경험이었다. . 그런 독서경험이 늘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부쩍 드는 요즘이다. 지난주에 일본의 모든 검정교과서는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같은 용어들을 전부 지운 채 시중에 나왔다. 과거사 이야기를 누구보다 좋아하는 한국 정치인들이라지만 한 번도 자책과 반성을 동반한 담론을 보지 못했다. 자신이 속한 악을 공격하면서도 어쩔 줄 몰라 하는 작품을 만나고 싶다. 일본 제국주의의 과오에 소독약을 바르면서 아파하는 일본 소설을,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 군부 세력이 스스로 남기는 문학적 반성문을, 무지의 가면을 쓴 채 여성을 착취하고 혐오해왔음을 인정하고 그 기억을 이겨내려 고군분투하는 남성 작가의 소설을 만나고 싶다. 한국인이 쓰는 반일 소설을, 민주화 운동가가 쓰는 반독재 소설을, 여성 작가가 쓰는 페미니즘 소설에서 묻어나는 은근한 당당함의 정서가 아닌, 뼈아픈 죄책과 부끄러움의 정서를 우리말과 우리글로 느껴보고 싶다. 그런 소설에 별점 5점을 매길 수 있게 되는 미래의 어느 날을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