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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경

천수경

3 years ago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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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요

책 ・ 2012

평균 3.7

오래 전에 그때, 너 잘 사냐. 나는 엄청 잘 지내지. 그러하군. 너도 잘 좀 지내라. 한번 그래볼까? 침묵. 좀 그래봐봐. 잘 지내면 좋거든. 너어무 좋아. 진짜 못 지내고 싶게 만드네. 싸가지 완치되면 전화해라, 같은 말이 돌아올 줄 알았다. 이럴 거면 왜 전화했냐는 기나긴 타박이 오랜만에 듣고 싶나보다- 했다. 하지만 침묵. 나 방금 혼코노 한 시간 반 했어. 라고 말하면 네가 요즘 뭘 듣는지 말해줄 줄 알았다. 너는 내 아픈 손가락이잖아. 그 뜬금 없는 말에 그래? 하면서 조용히 눈물을 쏟아냈다. 나 지금 바쁘다. 알았다. 끊을게. 내 앞엔 “벚꽃 축제는 완전히 미친 짓”이라는 팻말을 든 시위자가 있었고, 신호가 바뀌자 건너편에서 각자 토끼를 한 마리씩 껴안은 두 여자가 비현실적이게 걸어왔다. 나는 세계과자할인점에 들어갈지 말지 고민했고, 잠옷바람의 아이가 아빠 손을 잡고 가게에 들어갔다. 지하철역 입구 앞에서 버스킹을 하는 여자에겐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핸드폰 대리점의 활짝 열린 문이 조금은 의도적으로 내보내는 빵빵한 에어컨을 붕어빵 사장님께서 즐기고 계셨고. 자신의 백팩을 아령처럼 한 손으로 들었다 내렸다 하면서 길을 건너는 남자까지. 총체적 난국이었다. 이렇게 빡센 세상에서 잘 지내라고 하다니. 근데 그거 내 생각하면서 쓴 거야? 라고 물으려고 전화한 거였는데. 어쩌다 내 질문이 하나도 안 중요해졌네. 잘 지낸다니 다행이다,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다행이야. 나 이제 말 비꼬는 법 다 까먹어서 모든 말이 진심이야. 세계과자할인점에 들어가지 않고 길을 건넜다. 벚꽃 축제가 미친 짓이라는 말에 동의한다는 듯 근심이 잔뜩인 이상한 얼굴로. 내가 네 아픈 손가락이라는 말이 너무 다정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화를 내고 싶은데 그게 웃겨서. 내가 결코 버릴 수 없지만 꺼내볼 수도 없는 그런 걸 네가 또 줬구나. 하면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