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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months ago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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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시대

영화 ・ 2025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는 카프카의 말처럼,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 영화 <광야시대>는 더이상 사람들이 꿈꾸지 않는 세상을 다룬다. 꿈꾸지 않으면 영생할 수 있기에 꿈의 대가는 너무나도 가혹한 듯 보인다. 영화는 에필로그와 프롤로그 격인 이야기 사이에 4개의 작은 단편 영화들이 들어가있으며 각각의 이야기는 시간순대로 40년, 70년, 90년, 99년에 해당한다. (시대에 따라 화면비가 달라지는 것이 흥미롭다.) 이 4개의 이야기를 느슨하게나마 연결하는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각각의 영화가 청각, 미각, 후각, 시각의 이미지를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이다. 단편 영화들은 그 영화들 자체로도 뛰어난 완성도를 가지고 있지만 네 영화의 결말이 모두 비슷해 보인다는 점에서 특별해보인다. 결말은 판타스머가 각각의 감각을 통해 일종의 파멸을 한듯 보인다. 귀를 멀게하고 거울 세계에 들어오게 하거나, 쓴 돌을 통해 불러온 요괴가 아버지와의 안좋은 기억을 마주하게 한다거나, 후각의 속임수를 통해 부를 얻지만 죽거나, 새로운 세기의 태양을 연인과 함께하지만 죽는다. 이러한 결말들은 제 살을 깎으며 타오르는 촛불과도 닮아보인다(첫번째 에피소드의 개구리 일화도 떠오른다.) 촛불은 영화 내내 꿈과 영화를 상징하는데 그렇다면 광야시대는 우리에게 자기 파멸적인 영화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것일까? 당연히 그렇지 않다. 에피소드의 결말들은 단순한 비극처럼 보이지 않으며, 감독의 gv 표현을 빌리면 자아회복, 영어 제목을 빌리면 부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비단 영화 속 인물 뿐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페이소스를 비롯한 여러 감정을 환기시킨다. 다시 에필로그에 이르면 관객을 직접적으로 판타스머의 위치에 끌어들인다. 그리고 부활 후에도 다시 꿈꾸는 행위를 이어나가기를 기도한다. 아무리 세상이 힘들지라도. 영생이 가능한 세상에서 스스로의 시간을 깎아먹으며 꿈을 꾸는 것. 힘든 세상에서도 스크린 앞에 더 큰 비극이 있을지 모르지만 극장을 찾는다는 것. 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우리 마음속 얼음을 깨는 도끼를 마주한다는 것. 그 행위들이 100년동안 지속되어온 것의 존경과 미래에도 지속되었으면 하는 기도가 담긴 걸작으로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