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리 from Ipanema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평균 4.3
위대한 시작이올시다 3년 전, 학교 학생회 과잠을 맞출 때 나는 오른쪽 소매에 내 이름 대신 Proust를 박았다. 읽은 거라곤 그의 시집 밖에 없었음에도 그래야만 했던 이유를 나는 이제야 이해했다. 그 순간부터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잃어야 했던가,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잃어야만 하는가.... 잠자리에 뒤척이는 주인공을 스무 페이지 가량 보며 앞으로 잃어버릴 시간에 대해 알게 모르게 내다 본 독자가 되어야만 했던 나는 책 읽을 시간에 나무위키에서 작가의 삶을 들여다 보기를 좋아하는 게으름뱅일 뿐이었다. PeterCat, 그곳은 내가 16살 때부터 즐겨 다녔던 북카페이다. 그곳의 사장님은 프루스트와 조이스를 좋아하며 잃시찾과 율리시스를 7회 이상 재독하는 굇수인데 돌이켜 생각할 수록 그곳에서 내가 시작된 것 같다고 느낄 때가 많다. 책 두 권 사면 음료가 무료라 갈 때 마다 두 권 씩 사는 바람에 내 책장엔 읽지 못한 책들이 너무 많다. 그 사람이 나에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라고 추천했지... 그 후 내가 전력으로 시간을 잃어버리는 동안 PeterCat은 문을 닫았고,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정말로 울 뻔했다. 책나눔이벤트가 있었다는 걸 알고는 정말로 울었다. 어쨌든 난 사장님의 영향으로 프루스트에 굉장한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첫 권을 읽어낼 수 있었다. 길지도 않고 나름 흥미진진한 이 한 권의 책을 읽는데 중3~고3 자그마치 3년의 시간이 나에겐 필요했고 그렇기에 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책은 시간을 잃어버린 자만이 체험할 수 있는 책이다. 그렇다면 내 앞은 뻔하다. 아무리 열을 낸다고 한들 이 책을 읽어나가는데 번번이 실패할 것이며 그만큼의 시간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만큼의 시간이란 독서의 시간을 뜻하지 않는다. 실패, 실패, 실패, 실패, 실패, 누군가는 자신을 실패조차 성공하지 못한 실패의 성자라고 칭했고, 나는 그 실패의 성자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가끔 오로지 이 책을 읽기 위해서 실패를 하기도 할 것이며, 어떤 실패는 오로지 시간을 잃어버리기 위한 것이었다며 정당화하기도 할 것이다. 실패는 무엇을 부르는가? 프루스트는 작은 방에 틀어박혀 앓는 속을 끌어안으며 글을 써내려 갔다. 그 글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까지의 (잃어버린 동시에 되찾은) 시간을 장대하게 그려낸 이야기이다. 실패는 무엇을 부르는가? 병든 삶, 죽음이 예정된 삶을 긍정하기란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닌데 강력한 눈가리개 혹은 감식안이 그에게 있어서 그는 그 모든 것의 끝에 되찾은 시간, 이라고 제목 붙일 수 있었다. 실패는 무엇을 부르는가, 어떤 형태로든지 자신의 삶을 긍정하게 될 것이다. 정말이지 살아가는 것과 자살은 닮은 점이 많아서 우린 자라나 부여받은 강력한 눈가리개 혹은 감식안으로 그 둘이 다르다는 것을 안다. 내가 실패를 두려워 하는 까닭은 내가 잃어버린 시간 속에 있기 때문이고, 내가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까닭은 이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을 것인 줄 알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내가 실패를 대하는 데 어떤 초월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게 만들지만, 정말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그 입장을 취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무척이나 모호하다. 나는 그때 왜 내가 소매에 Proust를 박았는지에 대해 이해하려고 시도하려 할 때면, 나는 정말로 과거의 나 자신과 소통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나는 그의 의도는 이해할 수 없지만 행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의도는 이해해도 행위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을 잃어버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실패를 두려워 않는다면 그것은 오로지 내 오른쪽 소매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