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수경

해나 개즈비: 나의 이야기
평균 4.2
얼마 전, 친구가 엄마에게 우울함을 토로하자 엄마가 “그런 얘기 좀 하지 마. 네가 그러면 나도 힘들어!”라고 했단다. 나는 우리 엄마가 한 말을 전해줬다. “난 네가 매사에 부정적이라 안타까워.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지마!” 친구와 나는 “우리 엄마도 우리 엄마지만, 너네 엄마도 참 최악이다.” “어휴 남의 엄마 욕하면 안 되는데 참..” 같은 말들을 주고받으며 깔깔 웃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가 엄마라는 존재를 괴로워했는지. 엄마를 향한 경멸 때문에 얼마나 격하게 울 수 있는지. 또 다른 친구는 남자친구랑 싸우다가 “너 지금 (‘독립심’ 운운하면서 태만하게 무관심한 모습이) 수경이네 아빠 같아,”라고 해서 싸움이 더 커졌다길래 나는 웃겨 죽는 줄 알았다. “아무리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한테 비속어는 좀 아니지 않냐,”라고 응수해줬다. 나의 아빠를 세상에서 제일 하찮은 존재로 만드는 일은 통쾌하다. 하지만 아빠는 나에게 전혀 하찮지 않다. 말 한마디로 불시에 내 일상을 뒤흔들고, 나도 몰랐던 내 안의 깊은 무기력을 순식간에 끌어올릴 수 있는 존재다. 내가 앓는 인간들을 유머에 편입시켜야만 견딜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늘 현재진행형처럼 느껴지는 과거일수록 적당히 웃음거리로 축소시켜야 진짜 과거가 되는 것만도 같다. 해나 개즈비가 이 공연의 초반부에서 웃음거리로 만들었던 사건을 들으며 나는 당연히 웃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그 사건의 뒷면을 들었을 땐 엉엉 울었다. 굳이 코미디 공연에서 그런 울음을 나눠줄 필요는 없었겠지만 해나가 그러길 선택했기 때문에 지금 이걸 쓰고 있다. 수치심이라는 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영구적인 영향력을 지닌다. 나는 청소년기에 2년간 동양인이 손에 꼽을 정도로 희소한 도시에서 살았다. 슈퍼에서 어느 아이스크림을 고를지 즐겁게 고민하다가도 모르는 사람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욕을 하고 지나가면 내 존재가 총체적으로 부끄러웠다. 나도 모르게 ‘저는 악의가 없어요, 아이스크림만 사고 나갈 거예요, 제가 착한 사람이라는 건 한 번만 대화를 해보면 알 수 있을 건데요,’ 같은 변명을 혼자서 속으로 나열했다. 분노를 느껴야 한다는 걸 몰랐다. 순수한 억울함에 휩쓸렸을 뿐. 동양인이라는 나의 생김새가 곧 나를 정의하는 전부였다. 덕분에 학교에선 내가 뭘 하든 박수 쳐 주는 이상한 분위기마저 있었다. 내가 나라는 존재로 인정받는 것과는 달랐다. 동정과 환호가 기묘하게 뒤섞인 배척이었다. 비싼 미국 학교였기 때문에 애들은 학교 밖에서 교복을 입는 것만으로도 특정 계급성을 전시할 수 있었다. 나는 외국인으로서 소수자였지만 그 애들과 계급성을 공유했다. 학교 바깥의 파티에서 애들은 나를 과하게 반겼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어느 날 다른 학교의 애가 나랑 셀카를 찍고 그 자리에서 페이스북에 올리는 걸 보고 체감했다. 그 애는 나에 대해 궁금한 점이 단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어쩌다 얼굴을 익혔다는 사실로 본인의 인맥을 증명하는 게 중요했다. 내가 대화를 시도하려 하자 도망치듯 떠났다. 나는 그 애가 지나치게 솔직한 게 매력적이라고까지 느껴졌다. 학교 애들도 나쁜 애들이긴커녕, 하나같이 사랑스러운 애들이었다. 그곳에서 내가 소속감을 느낀 관계도 있었고, 그 도시의 느슨한 분위기는 내 본성을 완전히 물들였다. 그 시절이 아니었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에도 불구하고, 그때를 떠올리면 생지옥을 탈출했다는 안도감이 크다. 내가 나를 의심하던 방식, 제어할 수 없는 속도로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내가 원하는 것에 대해선 너무 빨리 입을 닫아버리는 습성, 일말의 갈등이라도 생겼다간 돌이킬 수 없는 편견을 추가하는 것일까 봐 스스로를 360도로 점검하던 모습이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한때 너무 잘 작동하던 기제라서 언제든 조금의 자극만으로도 풀가동된다. 2022년 서울 한복판에 살면서, 누가 시비를 걸면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언어로 맞설 수 있으면서, 이성애자라서 사랑하는 사람과 어디든 손을 잡고 다닐 수 있고, 버스를 타면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할 수 있으면서. 여전히 나를 괴롭히는 수치심이 있다. 내가 하지 못한 말들과 듣고 싶었던 말들이 망령처럼 떠돈다. 아무런 논리 없이 발작적으로 주눅이 드는 순간이 있다. 나의 생김새만으로 협소한 틀에 정의되고 말았던 시간의 힘이다. 뭘 느끼든 진심을 입 밖으로 내길 2년 동안만 주저하고 나면, 사람이 이렇게 된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이상한 차림새를 한 사람을 보면 그냥 ‘저 사람이 오늘 사정이 있나 보다,’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성별을 가늠할 수 없는 머리 스타일을 보면 ‘내가 좋아하는 예능의 자막을 바로 저 사람이 쓰는 걸지도 몰라-아니면 내가 당장 주말에 가고 싶은 식당의 요리사일지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차라리 ‘오늘 연극에 출연해야 하나 보다-여자가 남자 역할까지도 해야 하는 가난한 극단의 배우인가보다,’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내가 바라는 건 딱 그 정도다. 사람들이 그냥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저 사람에게 이번 계절만큼은 사정이 있어서 웃어야 하는 농담에 못 웃는 거라고. 사정이 있어서 저들이 연인처럼 손을 잡는 거라고. 그냥 그렇게만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