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안해요 래리(이성현)

암화
평균 3.2
폭력의 가시성. 그리고 감각의 불신성. 단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는 폭력은 눈과 귀로 그것을 행할 대상을 명확히 인식했을 때만 100% 행해진다. 그런데 작가는 인물들로 하여금 폭력의 대상에 의혹과 혼란을 섞어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하고, 그로 인해 인물 간 관계가 꼬이도록 의도한다. 폭력은 악의에서 기인한 아드레날린의 폭발이기에 절대 올바른 결말로 이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액션 신 혹은 일방적인 폭력 신에서 카메라는 유독 그것의 주체와 객체의 눈에 집중한다.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 지를 특정하기 위함인데, 이는 곧 관객들이 행하는 쪽과 당하는 쪽 모두 서로 간의 행위 안에 폭력이라는 소구가 수반됨을 인지하고 있다는 걸 느끼도록 만든다. 반대로 폭력을 가하고자 하는 대상을 명확히 응시하지 못하면 그들의 시도는 대부분 무위에 그친다. 영화의 많은 총격 신에서 조금이라도 조준점이 흔들리면 총알은 절대 정확하게 몸에 박히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는 '어떤 이를 조질지'에 관한 식별 과정이 꽤나 디테일하게 묘사된다. 애초에 가장 큰 플롯 자체가 '조직을 이간질하는 스파이를 처단하라'이고 샘은 자신의 안위를 위협하는 그 자를 피범벅으로 만들기 위해 내내 돌아다니고 고민한다. 그것은 영화 내내 보여지는 어둠과 그 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며 발산하는 홍콩 특유의 불빛으로 대유된다. 샘의 폭력은 식별하기 위함이다. 이 배역을 양조위가 맡은 것도 객체를 또렷이 바라보는 눈에 집중하기 위함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토니는 반대로 폭력의 명분이 혼동이다. 모든 메인과 서브 플롯의 시작과 끝은 토니에게 있다. 그의 등장이 샘을 비롯한 인물군에게 혼란을 야기한다. 그렇게 극 내내 충돌하는 샘과 토니의 명분이 마침내 조응하고, 드디어 샘은 그것을 식별해낼 절호의 기회 아래 놓인다. 하지만 토니는 그 자체로 혼란이기에 그의 대사처럼 샘은 그 진위를 명확히 할 수 없다. 그래서 총과 상황이 모두 준비되었음에도 그는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샘은 그것을 해결할 방법으로 다름 아닌 '맞불 작전'을 택한다. 토니의 모습을 한 채로 나타나 그 또한 토니에게 혼란이 되는 것이다. 그것의 정수를 보여주는 결말부 거울 시퀀스는 주체의 감각이 명확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감각의 불신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감각의 명분은 폭력이기에 불신성의 정도는 더 극화된다. 거울이 빛의 반사를 통해 평면에 상을 맺히게 한다는 점 또한 이에 근거를 더한다. 그들 자신의 육체도 폭력은 악임을 인지하기에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거울이 파괴되고, 토니와 샘은 빛이 그들 자신의 초상을 비추지 않는 숏에서 최후를 맞는다. 만약 그들이 카메라에 얼굴을 똑바로 내밀었다면, 혹은 샘이 이전처럼 머리를 밀지 않고 얼굴을 내보였다면 적어도 목숨은 부지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부두의 진퇴양난 속에서도 기어코 살아남은 것처럼 말이다. 즉 폭력은 명확히 인지되어야만 행해진다. 하지만 폭력은 무조건적인 악이기에 그걸 행하려는 육체의 감각은 스스로를 속여 오해를 낳고, 그 오해는 점진적인 비극으로 서사를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