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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어진

설어진

5 years ago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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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문

책 ・ 2018

평균 3.8

이 책은 자살로 세상을 떠난 동생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살아가는 남겨진 사람의 이야기다. 그러나 자살자의 심연에 단 한 발자국도 다가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도는 형의 걸음이다. 동생이 남기고 간 생의 복잡한 실타래를 풀어내지 못하는 괴로운 단순함이다. "죽고싶었던 게 아니라...... 살 이유가 없었던 건지도 몰라" 라는 두 문장의 의미가 같은 건지 다른 건지 알 수 없는 사람이,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가련함이다. - 세상엔 세상을 너무 선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봄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를 보다가도 잎사귀 하나를 좀먹는 진드기에 시선을 빼앗기고 마는 사람들, 맑은 햇살이 들어오는 방에 누워서도 방 모서리의 눅눅한 곰팡이에 시선을 남기는 사람들. 세상의 아프고 슬프고 괴롭고 추악한 진실을 외면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것들이 보이고 또 그런 것들을 찾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말을 좀 제대로 해봐" "됐어. 혼자만 알고 싶은 것도 있는 거야" "그럼 결국 아무도 모르는 게 되잖아" "말로 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되어 버리는 게 있다고. 내겐 빛나는데 남들에겐 아무것도 아닌 그런 거."(65p) - 초점을 풀고 바라보면 저마다의 세상은 비슷하다. 나무도, 길거리도, 그 위의 사람들도 번진 윤곽선과, 뭉뚱한 덩어리와, 그를 덮은 색깔일 뿐이다. 이렇게 낮은 화소로 세상을 살면 내가 보는 것과 네가 보는 것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쉽게 이해받을 수 있다. '내가 본 것을 너도 봤지? 내 말을 너도 이해할 수 있지?' 그러나 삶에 초점을 맞출수록, 더 예민해질수록, 섬세해질수록 내 세계와 네 세계는 달라진다. 인식하는 윤곽선의 굵기도, 자세한 형상도, 하나하나의 빛깔도 다 달라진다. '내가 본 것을 너는 보지 못했지? 내 마음을 너는 이해할 수 없겠지?' 그 다름에서 간격이 생기고 그것은 곧 괴리가 된다. 서로의 사이에 넘어갈 수도 넘어올 수도 없는 선이 그어진다. 이해받지 못할 마음이 늘어난다. 삼키는 말이 많아진다. 지근지근 갉혀 사라진 잎사귀에 어떻게 아파한들 귀기울여줄 사람도 똑같이 아파할 사람도 없다. 오해가 쌓인다. '이해할 수 없을 거야.' - 뭉뚱그린 윤곽의 세계를 살아가는 무딘 사람들 사이에서, 질감과, 그림자와, 아주 작은 요철까지 응시하며 살아가는 여린 사람들. 말할 수 없는 것이 쌓여가 점점 무거워지는 몸을 끌며 살아내는 사람들. 혹은 무엇이든 너무 쉬이 말해 갈수록 가벼워지는 삶을 지내는 사람들. 그 사이를 깊고 넓게 가르는 생의 간극에서 새어나오는 외로움. 인정받지 못할 마음들, 서로를 더듬는 부단한 손바닥들, 포개지지 않는 각자의 원을 겹쳐보려는 시도들, 무고한 오해로 가득한 인생들. - 그리하여 이 책을 읽고 다짐한다. 나는 차라리 말할 게 없는 삶을 살겠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한없이 가벼워져서, 픽셀아트 같은 세상을, 안경은 계속 쓰지 않은 채, 친구를 알아볼 때에만 잠깐씩 눈을 찡그리면서, 아주 아주 가볍고 단순하게 살 테다. 이해받지 못할 것들을 보지 않고 이해받지 못할 생각을 하지 않고, 얄팍한 세상의 아주 일부만 해석하면서, 덩어리진 나무가 흔들릴 때에는 그 거대한 물결이 춤추는 아름다움만 보고, 곰팡이 핀 잎, 자라지 못한 줄기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게슴츠레 어렴풋이 살 테다. "세상에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던 한 아티스트의 말을 늘 되새기면서. 나는 평생, 내 가까운 사람들에게 철저히 이해받고 내 소중한 타인들을 정성껏 오해하면서 정말 정말 잘 살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