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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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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years ago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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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책

책 ・ 2019

평균 3.4

무민 시리즈를 그린 핀란드 국민 작가 토베 얀손이 1972년에 발표한 <여름의 책>(sommarboken, 원어로 '솜마르북큰'이라고 읽는단다. 발음 재밌다.)을 올 여름의 초입부터 정말 느릿느릿 읽었다. 핀란드의 어느 섬에 사는 할머니와 손녀 이야기다. 이 책은 이런 게 좋다. 사람이 죽으면 "아, 죽었구나."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손녀딸과 함께 살다니, 참 좋겠네."라고 심심한 말을 뱉는 친구에게 "관둬."라 말하는 할머니가 존재한다. 물론 그의 손녀딸은 그보다 더하다. "할머니는 언제 죽어?"는 거의 책을 펴자마자 손녀가 할머니에게 던지는 대사다. 읽을수록 작가가 시니컬한 사람이구나 싶어서 무민 동화책이 읽어 보고 싶어진다. 비슷한 매력이 동화에서 먼저 드러났었으니까 무민이 그렇게 사랑받았던 게 아닐까. 또 이 책 내 기억에 자전적 소설로 알고 있는데, 그 때문에 작가가 어떤 유년을 보냈을지가 그려진다. 거짓말이 아니라 할머니와 손녀가 거의 매번 이렇게 티격태격한다. 와중에 작가가 20세기 중반 핀란드의 섬 풍경을 참 아름답게도 기록해 놓아서 먼 나라의 풍경을 상상하기 즐거웠다. 성 요한 축일과 겹쳐지는 핀란드 여름 축제의 정경, 숲을 헤치고 꽃들을 따라가다 보면 나오는 섬 속 동굴, 삽으로 흙을 파다 지렁이를 두 동강 낸 손녀가 조각난 지렁이에 대한 논문을 쓰기로 결심한 낮, 이따금 친구나 친척이 흰 배에 술이나 고양이를 싣고 찾아오는 바닷가 만, 유자곡 안으로 푸른 바닷물이 차오른 피오르와 밤이 되면 수면 위로 빛을 뿜는 등대들. 그 사이로 할머니와 손녀의 대화가 백만볼트 전력으로 짜릿짜릿하게 핑퐁되는, 진짜 여름의 책이었다. 어떤 줄거리 없이 단편적인 이야기들만 옴니버스식으로 나열되어 있어서 생각을 비우고 읽기도 좋았다. 사실 뒤로 갈수록 '내가 이 아무 내용이랄 것도 없는 핀란드의 어느 섬 속 할머니와 손녀 얘기를 왜 읽고 있는 거지..' 싶어지는데 그럴수록 이상하게 계속 읽게 되는 매력이 있다. 실제로 마지막 글꼭지인 "8월"이 가장 좋았다. 할머니가 불 꺼진 손님방에서 혼자 누워 있다가 문득 일어나서는, 어둠을 지도 삼아 조금씩 더듬거리며 집 밖으로 걸어나오는 이야기. "할머니는 넘어지거나 길을 잃는 게 두렵지는 않았지만, 어둠이 절대적이라는 점을 알았고, 손을 놓쳤을 때 아무것도 잡히지 않으면 어떤지 잘 알았다. 할머니는 혼잣말을 했다. '어쨌건 난 밖이 어떻게 생겼는지 다 아니까. 안 보여도 상관 없어.' 할머니는 다리를 침대 옆으로 뻗어서 일어나 앉고 균형이 잡히기를 기다렸다." 근데 번역이 그렇게 매끄럽지는 않아서 가독성이 좀 별로였다. 심지어 핀란드 지명이나 섬 관련 고유명사가 너무 많아 읽다가 짜증나서 좀 느리게 읽었던 것도 있다. 그럼에도 책 속의 여름 묘사 보는 재미는 정말 쏠쏠했다. 여름을 맞은 섬 하나가 책 속에 묘사로 다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풀이 근저에 우거진 별장이나 섬으로 여름 휴가를 간다면 가져 가서 읽기 딱 좋겠다고 생각했다. . "꾸준히 부는 여름 남풍이 와서 집과 섬 주위를 노곤하게 스쳤다. 집 안에서 일기 예보 소리가 들려왔고, 햇빛 한 조각이 창틀을 지나갔다.", "언제나 늘 똑같은 긴 여름이었고, 모든 것이 각자의 속도로 자랐다.", "아름다운 날이었고, 바람 없이 긴 파도가 치는 날이었다.", "배들이 바닷가에서 풀려났다. 크고 신비로운 물고기들이 바다에 동심원을 남겼고, 붉은 거미들은 모이기로 한 장소에 모였다." . 이런 문장들에 밑줄을 그으면서 올 여름을 맞았다. 잘 읽히는 책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책인 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