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천수경

천수경

2 years ago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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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오브 인터레스트

영화 ・ 2023

평균 4.0

이태원에서 159명이 죽었을 때 시민들의 ‘트라우마’를 염려하는 기사들을 읽으며 생각했다. 전국민이 차라리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깊이깊이 입었으면 좋겠다고. 산 자들의 정신 건강이 돌이킬 수 없게 훼손되고 다함께 앓을 수 있게 언론에서 더 주구장창 다루길 바랐다. 잔혹한 현장 사진들이 우리 각막에 영구적으로 새겨지길 바랐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새로운 일상에 잊히지 않도록. ‘빨리’나 ‘안전’ 같은 단어만 들어도 5000만 명의 팔다리에 소름이 돋도록. 당사자와 비당사자를 선 긋지 말고 우리 모두가 당사자이자고. 그래서 ‘싸게 치는’ 선택을 모두가 자동반사처럼 두려워하고, 조금 지겨운 과정이 수반되더라도 사람이 타는 배에 1000톤 넘게 화물이 과적되는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면. 그걸로 된 거 아닌가. 아파트 청약을 신청하는 사람들의 고막에 그 아파트를 짓다가 죽은 사람의 절규가 들릴 수만 있다면. 뭐가 되었든 가치가 있을 거라고 너무나 믿는다. 설레는 두번째 데이트에서 내가 삼겹살을 싸먹는 바로 그 깻잎을 땄던 이주 노동자가 비닐 하우스에서 얼어죽는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 이 영화에서 불에 타 죽는 사람들과 달리 아주 고요하게 저승으로 넘어가지 않았을까. 그런 걸 두번째 데이트에서 언급해도 될까. 따위가 내가 관심 있는 유일한 ‘깻잎 논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가 안겨주는 감각적인 트라우마에 감사하다. 새 옷을 사려고 쇼핑앱을 들여다보다가, 그 옷들이 생산되는 공장이 안일하게 망가뜨린 강물에서 죽어간 생명들의 호흡이, 그 오염수로 피부병에 걸린 아이들의 눈망울이 내게 더 가까이 와닿는 데에 기여하는 경험이다. 영화는 이래서 오감의 예술이다. 이 영화에 유머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국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채상병 특검법이 어떤 폭력을 방지하기 위함인지에 관심 없으면서 이 영화에 만점을 주는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이 영화의 블랙 코미디일 것이다. 어딘가에서 무작위로 선택되어 발생한 죽음과, 죽은 군인과 또래인 아들을 생각하여 내부고발했다는 죄로 처벌 받은 박정훈의 용기에, 그 이름 석자에 경탄하지 않을 거라면 이런 영화에 감탄하는 당신의 시끄러운 육성은 영화 속 주인공들의 침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학대당하다시피 공부하는 청소년들의 인권 조례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거라면, 세상사를 따라잡기엔 ‘내 마음을 돌보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명목으로 한없이 미룰 거라면, 이 영화는 영원히 당신을 짝사랑할 수밖에 없다. 웃음을 주는 각종 영상들에서 암담한 기사들까지의 거리는 터치 하나만큼의 거리다. 당신 손가락과 화면 사이의, 깻잎 한 장만큼의 거리. 담장 하나의 차이에 경악했다면 그 정도 거리는 단숨에 넘어서길 바란다. 누가 되었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울고 싶었던 사람이라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 이해관계의 구역이자 관심이 가는 곳. 이 영화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그곳이길 바란다.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 이들의 존엄이 우리의 이해관계와 긴밀히 얽혀있다는 걸 상기시켜주는 구역이길. 모두의 관심을 붙드는 영역이길. *수많은 의제들 중 굳이 하나의 특검법을 호명한 건 지난 일년 남짓한 시간 동안 국회에서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였고 최근 야당의 0순위 사안이기도 했고, 대통령이 수사외압을 행사한 상징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문제라고 생각해서는 아닙니다. 영화 속 히틀러는 이름으로만 등장합니다. 꼭대기의 권력보단 그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직원’으로서의 군인에 집중합니다. 헌신하는 아빠, 아내를 생각하는 남편. 널리고 널린 부류. 한 사람을 갈아끼우는 것보다 구조의 문제를 생각하도록 유인합니다. 동네 식당이든 학교든 군대든, 시스템에 내는 균열이 불가능했을 때의 풍경은 유사할 것입니다. 저는 구조에 의문을 품은 목소리가 음소거당한 사건을 가져온 것입니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수상 소감으로 가자지구의 희생자들과 하마스 공격의 희생자들을 동일선상에 두어 이스라엘 지지자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가자 공격을 dehumanization이라고 불렀다. 사람을 3만 명 넘게 죽이는 일이 ‘방어’의 일환으로 불가피하다는 이스라엘의 지난한 주장에 맞서는 일이다.) 정치적으로 첨예한 문제를 건드리기 전에 그는 수백 번 고민했을 것이다. 주변에서 말렸을 것이다. 소감이 적힌 종이가 그의 손에서 덜덜 떨렸다. 나는 그를 이루 말할 수 없이 지지한다. 사람이 만든 시스템으로 죽은 모든 사람은, 사람의 노력으로 반복을 막을 수 있는 모든 죽음은, 동일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