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Jae-young Seo

Jae-young Seo

9 years ago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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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빛

영화 ・ 1963

평균 3.8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침묵 3부작 중 하나라고 한다. 화법이 독특하여 다소 난해하게 다가오지만 감독이 의도하는 공허한 정서가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감독의 아버지는 루터교 목사였다고 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역시 루터교 목사인 듯한데 천주교와 거의 동일한 성찬예식을 행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초반부의 예배 장면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영화가 아니라 마치 실제인 것처럼 뛰어난 리얼리즘을 보여준다. 연극적 요소도 보이는데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이 감독은 배우들에 대한 학대(?)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배우들의 탁월한 집중력 배후에는 감독의 무서운 눈초리가 있었던 것이다. 엄숙하고 정형화된 예식으로 시작된 영화는 곧 거친 생의 이면을 드러낸다. 냉정한 이성과 굳은 신앙으로 무장한 듯했던 목사는 불안 장애로 삶의 의욕을 상실해가는 한 가장 앞에서 너무도 나약하게 허물어지고 만다. 이 영화는 우리 삶의 이러한 두 측면을 나란히 보여주고 있다. 목사 옆에는 또 마르타라는 노처녀가 있다. 그래서 노처녀가 되었겠지만 연애 기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날것 그대로의 순정으로 목사에게 집요하게 다가간다. 어떻게 보면 측은하기까지 하다. 목사는 너무 잘생겼고 여자는 그의 눈에 들기는 어려운 외모인 것이 결정적 이유이겠지만 목사는 자꾸 죽은 자기 아내나 주위의 평판을 핑계댄다. 그러나 이런 시골 마을에서 선택지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므로 이 게임은 마르타에게 승산이 있다. 남자는 열 번 찍으면 넘어간다. 단 제한된 조건 속에서. 아무튼 마르타는 생의 이상적인 측면을 대변하도록 소명을 받은 목사에 비해 생의 일상적인 측면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이름이 마르타인가? 이상은 일상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항상 꾸짖는다. 마치 목사가 마르타가 지난 날 지속적으로 퍼부었던 꾸밈 없는 구애 행위를 천한 행실로 치부하며 나무라듯이. 그러나 거기에는 반전이 도사리고 있었다. 마르타를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냉혹하게 내치는 순간, 모자란 일상이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함량 미달의 구질구질한 일상은 강하게 부정되는 순간 소중해진다. 이는 가출 경험과도 비슷한 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일상은 이상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우리가 꿈꾸는 이상, 다시 말해 우리가 이상화하는 현실은 끊임없이 일상으로 하강한다. 요나스는 그날 제대 뒤편에 있는 목사의 방으로 들어갔다가 마르타가 보낸 장문의 편지를 읽고는 번민에 사로잡혀 책상에 엎드린 목사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의 아내가 목사를 찾아온 것은 적어도 자기 남편을 건전하게 도울 수 있으리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기대심에서 그렇게 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정작 목사는 의도치 않게 요나스에게 신의 부재를 역설하고 만다. 우울증 환자에게 자살 허가를 내어준 것이나 다름없는 최악의 상담이었던 것이다. 제대 앞에서 마르타의 손길에 얼굴을 맡긴 그에게 요나스의 자살 소식이 들려온다. 그는 일말의 죄책감도 표출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의 부인에게 비보를 전한다. 그러고는 다시 자신의 개인사에 매몰되고 만다. 그는 자신이 성직자가 되는 것이 부모님의 꿈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십자가 성상을 바라보며 "얼마나 우스운 형상인가"라는 자조적 독백을 내뱉는다(이것은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보이는 측면도 있다). 어쨌든 이것은 그가 성상의 이면과는 단절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그는 자신이 성직자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고백하고, 중국의 핵무장을 걱정하는 요나스의 말에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 그에게 신을 믿어야 한다고 권유하다가 갑자기 위선을 자각했는지 침묵 속에 울리는 시계 소리에 자신과 요나스의 불안감을 동조시키고 만다. 그러고는 음울한 태도로 신의 침묵을 보고한다. 세상은 잔인함에 맡겨져 있으며 신은 멀리서 방관하고 있다고 고발한다. 이러한 감독의 신학은 예배를 준비하는 한 남자 신도의 입을 빌어 계속 전개된다. 그는 열차 사고로 불구가 되어 상해연금을 받는 사람인데, 목사에게 예수의 마지막 말,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은 실제로 죽는 순간 하느님의 침묵을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묻는다. 인간은 신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존재인가? 그래서 자신을 파괴하는 데까지 이르기도 하는가? 1963년의 시대적 문제의식이 반세기가 넘게 흐른 지금은 그다지 유효하지 않다는 느낌이다. 차라리 신의 침묵을 다시 새롭게, 마치 새 봄처럼, 아니 차가운 폭설처럼 온 몸으로 맞고 싶은, 성탄을 앞둔 고요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