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빛
Nattvardsgasterna
1963 · 드라마 · 스웨덴
1시간 21분 · 1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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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신에게 매달린다. 그를 사랑하는 메르타는 자신의 존재 이유가 그에 대한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녀를 경멸하고 받아주지 않는다. 한편 정신적 불안에 시달리는 요나스는 아내 카린과 토마스를 찾아오지만 끝내 자살을 한다. 토마스는 몇 명 남지 않은 신도들을 위해 예배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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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y Oh
4.0
건조한 침묵 너머 사랑이라는 구원이 도달할까. Beyond silence.
Jae-young Seo
4.0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침묵 3부작 중 하나라고 한다. 화법이 독특하여 다소 난해하게 다가오지만 감독이 의도하는 공허한 정서가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감독의 아버지는 루터교 목사였다고 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 역시 루터교 목사인 듯한데 천주교와 거의 동일한 성찬예식을 행하는 것이 흥미로웠다. 초반부의 예배 장면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영화가 아니라 마치 실제인 것처럼 뛰어난 리얼리즘을 보여준다. 연극적 요소도 보이는데 위키백과를 찾아보니 이 감독은 배우들에 대한 학대(?)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배우들의 탁월한 집중력 배후에는 감독의 무서운 눈초리가 있었던 것이다. 엄숙하고 정형화된 예식으로 시작된 영화는 곧 거친 생의 이면을 드러낸다. 냉정한 이성과 굳은 신앙으로 무장한 듯했던 목사는 불안 장애로 삶의 의욕을 상실해가는 한 가장 앞에서 너무도 나약하게 허물어지고 만다. 이 영화는 우리 삶의 이러한 두 측면을 나란히 보여주고 있다. 목사 옆에는 또 마르타라는 노처녀가 있다. 그래서 노처녀가 되었겠지만 연애 기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날것 그대로의 순정으로 목사에게 집요하게 다가간다. 어떻게 보면 측은하기까지 하다. 목사는 너무 잘생겼고 여자는 그의 눈에 들기는 어려운 외모인 것이 결정적 이유이겠지만 목사는 자꾸 죽은 자기 아내나 주위의 평판을 핑계댄다. 그러나 이런 시골 마을에서 선택지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므로 이 게임은 마르타에게 승산이 있다. 남자는 열 번 찍으면 넘어간다. 단 제한된 조건 속에서. 아무튼 마르타는 생의 이상적인 측면을 대변하도록 소명을 받은 목사에 비해 생의 일상적인 측면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이름이 마르타인가? 이상은 일상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고 항상 꾸짖는다. 마치 목사가 마르타가 지난 날 지속적으로 퍼부었던 꾸밈 없는 구애 행위를 천한 행실로 치부하며 나무라듯이. 그러나 거기에는 반전이 도사리고 있었다. 마르타를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고 냉혹하게 내치는 순간, 모자란 일상이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함량 미달의 구질구질한 일상은 강하게 부정되는 순간 소중해진다. 이는 가출 경험과도 비슷한 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일상은 이상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우리가 꿈꾸는 이상, 다시 말해 우리가 이상화하는 현실은 끊임없이 일상으로 하강한다. 요나스는 그날 제대 뒤편에 있는 목사의 방으로 들어갔다가 마르타가 보낸 장문의 편지를 읽고는 번민에 사로잡혀 책상에 엎드린 목사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의 아내가 목사를 찾아온 것은 적어도 자기 남편을 건전하게 도울 수 있으리라는, 너무나도 당연한 기대심에서 그렇게 한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정작 목사는 의도치 않게 요나스에게 신의 부재를 역설하고 만다. 우울증 환자에게 자살 허가를 내어준 것이나 다름없는 최악의 상담이었던 것이다. 제대 앞에서 마르타의 손길에 얼굴을 맡긴 그에게 요나스의 자살 소식이 들려온다. 그는 일말의 죄책감도 표출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의 부인에게 비보를 전한다. 그러고는 다시 자신의 개인사에 매몰되고 만다. 그는 자신이 성직자가 되는 것이 부모님의 꿈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십자가 성상을 바라보며 "얼마나 우스운 형상인가"라는 자조적 독백을 내뱉는다(이것은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보이는 측면도 있다). 어쨌든 이것은 그가 성상의 이면과는 단절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그는 자신이 성직자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고백하고, 중국의 핵무장을 걱정하는 요나스의 말에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 그에게 신을 믿어야 한다고 권유하다가 갑자기 위선을 자각했는지 침묵 속에 울리는 시계 소리에 자신과 요나스의 불안감을 동조시키고 만다. 그러고는 음울한 태도로 신의 침묵을 보고한다. 세상은 잔인함에 맡겨져 있으며 신은 멀리서 방관하고 있다고 고발한다. 이러한 감독의 신학은 예배를 준비하는 한 남자 신도의 입을 빌어 계속 전개된다. 그는 열차 사고로 불구가 되어 상해연금을 받는 사람인데, 목사에게 예수의 마지막 말,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은 실제로 죽는 순간 하느님의 침묵을 느꼈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묻는다. 인간은 신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존재인가? 그래서 자신을 파괴하는 데까지 이르기도 하는가? 1963년의 시대적 문제의식이 반세기가 넘게 흐른 지금은 그다지 유효하지 않다는 느낌이다. 차라리 신의 침묵을 다시 새롭게, 마치 새 봄처럼, 아니 차가운 폭설처럼 온 몸으로 맞고 싶은, 성탄을 앞둔 고요한 밤이다.
최승필
5.0
'좋은 영화'란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1:1의 교감으로 구분되어야 하는건지도 모른다.. . 우연히(?) 헤르만 헤세의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읽자마자 오늘 주일엔 무심결에(?) 잉마르 베리만의 '겨울 빛'을 보게 되었다..전혀 생각조차 못했던 한 소설가와 한 영화감독의 닮은꼴이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엔 내겐 특별히 공교롭다.. . 신의 영역에 대한 깊고도 깊은 갈증같은 것..결코 남들처럼 쉽게 결론지을 수 없는 부조리 의 영역..평생에 걸쳐 끝내 해결되지 않은 채 늘 질문으로만 남아있어야 하는 영역..이즈음 내가 1:1로 만나야 할 묵직한 주제를 이렇게 만나고 있다는 경외감이 있다.. . 1963년의 이 흑백영화엔 배경음악조차 없고, 카메라는 지루할만큼 느리게 돌아가지만 (심지어 첫 도입부터 주기도문을 생략없이 끝까지 담아내는걸 보고 놀랐다)..이 재미없는 영화가 내 인생의 특별한 영화로 남게되는 것 또한 부조리한 불가사의인지도 모를 일이다.. . 20190324 Watcha Play (19.18)
다솜땅
3.5
차가운 겨울에 옆에 있었준 그녀에게 더 약속해줄 수 없어 안타가운 그 남자. 사실 누구보다 안타가운 자신 스스로가 있지만, 그는 다른 곳을 쳐다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20.11.6 (2645)
Dh
3.5
삶의 목적을 잃고 회의감에 젖어있는 토마스. 그럼에도 경건하게 이어나가는 침묵의 여정 #외로움 #무관심 #소통
정재헌
4.0
메아리치는 고통과 질문에도 끝내 침묵을 지키는 '그분', 커져만가는 회의와 흔들리는 신념, 그럼에도 이어나가야 하는 삶의 고됨과 거룩함에 대하여.
Hoon
5.0
예수의 외침에도 '그분'은 침묵으로 답하셨다고 한다.
MavericK
4.5
인류의 역사를 바꾼 분기점에는 언제나 회의주의가 있었다. 최초의 회의주의자들인 소피스트(줄곧 궤변론자로 잘못 알려진)를 시작으로 현대의 니체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보편적인 진리를 얻기위해 거듭되는 의심속에서 신의 존재를 탐색하고 규명한다. 허나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숙명을 지녔기에 생의 수레바퀴에서 늘상 고통의 무게를 동반한 채 보잘 것없는 미약한 걸음을 내딛을 뿐이다. 맹목적인 믿음을 마음에서 제하고 의심하는 태도로 신께 다가설 때, 어느 곳에나 편재하며 전에도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하실 그 분께서 역설적으로 창 너머로 빛의 형상으로 이 땅위에 임하신다. 그 분은 언제나 고난받는 자들과 함께 눈물흘리신다. 흔히 오해하는 커다랗게 왜곡된 명제. 한 손에 예리하고 날렵한 곡선의 위용을 자랑하는 검을 높게 치켜들어 하늘을 향해 겨누는 영웅이 칼 끝의 반사되는 빛을 쳐다보며 당당하게 연극조로 내뱉을 것만 같은 한 마디.신은 죽었다. 사실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는 두려움에 떨며 탄식과 회환섞인 중얼거림이다.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어떻게 한단 말인가...” 니체는 20세기의 장막 앞에서 탁월한 선구안으로 미래에 벌어질 살육의 시대를 예고한 진정한 천재다. 그가 죽고 14년 후 1차세계대전의 피의 광란이 요동치고 그것은 영화속 요나스의 막연한 불안감으로 전이되어 20세기 전체를 경유한다. 회의를 통해 인간은 발전한다. 회의적인 선언뒤에 우리는 거듭난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자 생육신으로 이 땅위에 내려오신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뒤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해 준비하신다. 그곳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가지말라 간청드리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를 사탄이라 꾸짖으시며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 한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누구든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리고 “주여 주여 어찌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외침으로 지옥을 온 몸으로 체감하신 후에 부활하신다. 그렇게 이 땅위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침묵은 존재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신이 죽어 없어졌기에,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께서 진실로 사라졌기 때문에 20세기의 한 가운데 싸늘하게 놓여있던 영화 속 60년대는 수난의 연속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니체는 인간 모두가 Übermensch가 되어 그들 스스로 초월적 존재로 변모하여 신을 대체하기를 원했다. 허무주의에 관한 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표준과 보편적인 기준점이 사멸된 영화 속 시간과 현재의 시간은 영원한 지옥을 맴돌며 거듭나지 못하고 정신없이 물질적 사고에 사로잡혀 하릴없이 표류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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