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문영 평론가 봇

영화의 맨살
평균 3.8
1. 수재에게는 배울 수 있어도 천재에게는 배울 수 없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천재다. 그와 비교하기에 아주 적절한 가라타니 고진은 수재다. 가라타니에게는 배울 수 있어도 하스미에게는 배울 수 없다. [[영화의 맨살]]을 읽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여기서 말하는 천재와 수재는 지능이나 지식의 차이가 아니라 지적 태도의 차이로 구분된다(배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골치 아픈 비평가를 말해야 하는 지면이니, 이 정도의 자의적 구분은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또한 대상은 넓은 의미의 비평가에 한정한다). 수재는 논리적이고 정의(定義)에 엄격하며, 일관된 문제의식을 지닌 채 더 깊고 넓은 앎을 향해 나아간다. 느리지만 집요한 그의 글쓰기는 대답될 수 있는 질문과 대답될 수 없는 질문을 명료화하며 체계적이고 총체적인 계보학으로 향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없다 해도 그의 사상의 행적과 윤곽을 짐작할 수 있다. 천재는 은유의 수사학에 능하며 종종 자의적 개념을 사용하는 한편, 자기모순과 비약도 서슴지 않고 앎의 추구를 은근히 경멸한다. 민첩하고 모호하고 종잡을 수 없는 그의 글쓰기는 임의적이고 일회적인, 때로는 황당무계한 계보도(혹은 분류학)를 작성한다. 그의 말은 충격적이지만 명료한 논리가 아니라 중첩된 수사로 제시되는 까닭에 지식으로 흡수되지 않으며 그의 사상의 윤곽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 결과 수재는 학파를 낳지만 천재는 신도를 낳는다. 무협지 용어를 빌리면 수재는 정파(正派)이고 천재는 사파(邪波)이다. 이창호와 이세돌이 함께 바둑 천하를 호령하던 2005년 무렵 중국의 한 기자는 "이창호는 신의 인도에 따라 바둑을 두고, 이세돌은 악마와의 계약에 따라 바둑을 둔다"고 쓴 적이 있는데, 이 비유를 가라타니와 하스미에게 적용해도 좋을 것이다(뛰어난 산문가이기도 한 바둑평론가 박치문은 이창호와 유창혁의 전성기인 1990년대에 이창호를 사파, 유창혁을 정파라고 부른 적이 있다. 정파와 사파의 구분은 상대적이다. 일본학계 안에서라면, 새외무림(塞外武林)에 비유할 수 있는 아즈마 히로키와 나란히 놓을 때 하스미는 정파에 더 가까워보인다. 물론 이 비유들은 지적 위계와 무관하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글을 '읽어버렸다'. 영화에 관해 쓰는 사람에게 이 경험은 치명적일 수 있다. 우리는 좋은 글을 쓰고 나면 대개 지식의 부가를 경험한다. 그것을 흔히 배운다고 표현한다. 읽기를 통해 나는 조금 더 많이 알게 된 것이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글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의 글을 읽고 나면 내 머릿속에서 뭔가 무너진다. 무너지고 난 뒤 어떻게 다시 세울지 막막해진다. 나는 캄캄한 폐허에 내던져졌고 이제 읽기 전으로 되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내 준거들을 그가 쑥밭으로 만들었는데, 그렇다고 그의 강렬하지만 모호한 준거들을 알겠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차라리 읽지 말 것을, 또한, 이런 글은 다른 사람들도 읽지 말기를, 하고 중얼거리게 된다. 천재에게는 배울 수 없다. 2. [[영화의 맨살]]에서 단 하나의 글을 추천하라면, [프리츠 랑, 혹은 원환(圓環)의 비극](이하 [원환의 비극])이다. 이런 글을 읽고 나면 정신이 멍해져서, 적어도 며칠 동안은 쓰는 일 같은 건 엄두를 낼 수 없다. 글의 첫머리부터 주눅들게 한다. "프리츠 랑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바로 독일 표현주의를 떠올리지 않으면 안 되는 정신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빈곤한 정신에 틀림없고......"(167쪽)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곧바로 특유의 종잡을 수 없는 은유의 수다들이 이어진다. "그렇다. 모든 랑적 필름이란 고독한 구체(球?)의 무상의 팽창-수축 운동인 것이다."(169쪽) "랑적 필름이란 직선의 억압에 의해 팽창을 저지당한 곡선의 세계라고 바꾸어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173쪽)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스미가 말하는 구체란 무엇보다 랑 영화의 주인공들인 둥근 얼굴과 둥근 체형의 배우들이다. 피터 로레(), 진 록하트(<사형집행인 또한 죽는다>), 에드워드 G. 로빈슨(<창가의 여자> <진홍의 거리>), 실비아 시드니(<한 번뿐인 삶>) 등이 그들이다. '직선의 억압'이란 표현에서 직선은 감방, 높은 담, 옥사의 벽, 혹은 실내를 장악하는 거대한 초상화의 프레임 등으로 나타나며 궁극적으로는 장방형의 필름 프레임을 뜻한다. 그러니까 랑의 영화는 이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직선의 세계 안에서 수축을 강요당하며 살아가는 둥근 형상의 인물들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이야기와 플롯은 물론이며 프리츠 랑이 속했던 독일 표현주의 특유의 기법들인 명암대조법, 그림자와 어둠의 강조, 사각(斜角)의 구도, 기괴한 세트 등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하스미에게 랑의 영화는 무엇보다 직선과 곡선의 기하학적 긴장이다. 예컨대 <사형집행인 또한 죽는다>는 "과포화에 도달한 하나의 구체가 참으로 자신을 팽창시킨 외계의 대기압의 압력에 의해 기묘하게 수축하기 시작한 사태에 벌벌 떨고 있는 비극"(169쪽)이고, <한 번뿐인 삶>에서의 구체는 "팽창-수축하는 부드러운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경질의, 응고하는 의지에 닮은 어떤 것"이며 "공감이나 동정을 배척하고 자신을 지키는 고독한 구체, 그것도 강고한 원형성을 띤 구체"(183쪽)이다. 미장센과 동선에서 직선과 곡선의 활동성을 포착하는 것도 매우 섬세한 안목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배우의 얼굴과 몸을 하나의 도형으로 파악하고 그것으로부터 영화 전체를, 그리고 한 작가의 작품세계 전체를 꿰뚫는 이미지-주제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적어도 이 글을 읽기 전까지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스미는 한술 더 떠 영화사에서 "단지 둥근 얼굴인 자신을 견디는 것에서 자신을 현시하는"(172쪽) 배우의 계보를 작성한다. <게임의 규칙>(장 르누아르)의 마르셀 다리오, <의리 없는 전쟁>(후카사쿠 긴지)의 가네코 노부오, <전사의 용기>(존 휴스턴)의 오디 머피, <국외자들>(장 뤽 고다르)의 클로드 브라쇠르, 그리고 클로드 샤브롤의 배우들인 미셸 부케, 장 얀, 그리고 <어느 날 밤에 생긴 일>(프랭크 캐프라)의 클로데트 콜베르와 무성영화 시대의 여신인 릴리언 기시까지. 나는 이 영화들, 이 배우들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고 중얼거리게 만드는 기막힌 계보도이다. 이 글이 쓰인 1976년에는 극장 외엔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글쓰기를 위해 다시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환경에서 하스미는 일회적 관람의 기억만으로 이런 계보를 작성한다(더구나 그의 본업은 불문학 교수였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스미는 직선과 곡선의 대립으로부터 랑의 파시즘 담론을 이끌어낸다. "주박되고 움직임을 빼앗긴 것들이 그 수축하는 육체를 존재의 고통으로 견디려 하지 않고 서로 상처를 애무하면서 넓혀가는 수신(受信)의 연대의 틀이 파시즘이라 불리는 토양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그(랑)는 체험을 통해 알고 있다."(185쪽) 이 자각이 새겨진 랑의 영화는 "애매한 타자와의 연대를 향하는 촉수를 자르고 (......) 개개의 응축된 구체가 고독하게 그 수축을 견뎌야 한다"고, 그리고 "스스로 장방형의 직선적-직각적 세계를 모방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186쪽)고 말한다는 것이다. 하스미는 다른 글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 감독의 윤리적 주제의식을 거론하면서, 그것조차 인물과 이야기가 아니라 직선과 원의 기하학적 대립에서 찾아낸다. 이쯤 되면 비평적 기예의 현란함에 정신이 팔려 작품은 거의 잊혀질 정도다. 그리고 다시 중얼거리게 된다. 역시 이 글은 읽지 않는 게 나았다...... 내가 아는 한 영화사를 통틀어 이런 밑도 끝도 없는 계보도와 분류학을 태연하게 작성하고 그것으로 다른 비평가들을 침묵시킨 사람은 하스미 외엔 매니 파버(Manny Farber)밖에 없다. 3. [원환의 비극]을 읽고 하스미의 방법이 짐작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프리츠 랑 비평에서의 이미지 기하학은, 곡선의 문제를 다룬 히치콕 비평을 제외하면, 하스미의 다른 비평에서는 찾기 힘들다. 존 포드 비평에서는 '뒤집어지는 하얀색'이라는 제목의 색채론, 그리고 서사에서 '던진다는 것'의 중심성을 다룬 자기류의 테마틱스(thematics,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사소한 행위 혹은 사물에서 서사의 주요 모티프를 이끌어내는 방법. [[오즈 야스지로]](윤용순 옮김, 한나래, 2001)에도 적용된, 상대적으로 자주 등장하는 하스미의 방법이다)로 옮겨가고, 장 뤽 고다르 비평에서는 '여자는 여자다'라는 제목에 명시된 "'어째서'와 '왜냐하면' 사이의 자그마한 틈새"(300쪽)에서 벌어지는 '동어반복성'이라는 메타 주제론을 전개한다. 그런가 하면 돈 시겔 비평에서는 '불길한 액체' '답답한 습기'와 같은 은유를 통해 서사를 희박한 것으로 변질시키는 환경의 질감을 다루고, 칼 드레이어 비평에서는 관(棺)에 대한 매혹 혹은 "관이 시선을 획득한다는 부조리한 꿈"(244쪽)이라는 창작자의 황당무계한 집착을 발견한다. 어디서 무엇을 들고 그가 나타날지 알 수 없다. 우리가 그의 글을 읽고 만나는 건 비유컨대 한 검객의 다양한 초식이 아니라, 검객의 검술이거나 희극배우의 몸짓이거나 선동가의 웅변이거나 가객의 노래이다. 하스미는 질 들뢰즈([[시네마 1]](유진상 옮김, 시각과언어, 2002), [[시네마 2]](이정하 옮김, 시각과언어, 2005))가 작성한 영화 이미지 분류학, 그러니까 영화 일반에 적용 가능한 이미지 계열화 같은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는 천 하나를 펼치는 짧은 시간에 다른 사람으로 변하거나 무대에서 객석으로 순간 이동하는 마술사처럼 이 비평과 저 비평 사이의 다른 층위를 아무런 개념적 궤적 없이 순식간에 오간다. 그의 비평은 차라리 미셸 푸코([[말과 사물]],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12)의 인용으로 유명해진 보르헤스의 중국 백과사전식 분류학에 가깝다. 우리는 푸코의 표현을 빌려 하스미의 비평을 "항목들을 서로 연결할 공통의 바탕 자체"([[말과 사물]], 9쪽)를 무너뜨림으로써 사유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헤테로토피아'의 분류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스미의 비평이 무원칙한 언어 기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의 비평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밝히는 건 난감한 일이지만, 적어도 그의 비평이 무엇을 말하지 않으려 하는지는 알 수 있다. [원환의 비극]으로 돌아와보자. 글의 말미에서 장방형과 구체의 긴장이라는 구도로부터 하스미는 "영화라는 것의 생의 조건"을 끌어낸다. "프로젝터의 구체의 광원을, 스크린의 가로로 긴 틀의 존재를 무시하고 영화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185쪽) 하스미는 영화 보기를 조건짓는 이러한 물리적인 사실에 대한 인지가 "한편의 필름을 이야기에, 인물론에, 작가의 사상에, 시대사조에, 영상의 심미취미에 환원시켜버리는 상식화된 편견을 거역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영화의 출발점이자 도달점이 구체의 광원에 의해 장방형의 벽에 비쳐지는 빛과 그림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 현실을 추상화하는 모든 영화적 담론은 무상의 요설로서 공중에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185쪽)이기 때문이다. 일단 '구체의 광원과 장방형의 벽'의 논의는 뒤로 밀어두자. 여기서 하스미는 비평이 배격하는 것의 목록을 제시한다. 이야기, 인물론, 작자의 사상, 시대사조, 영상의 심미취미. 한 편의 영화를 이런 것들에 환원시키는 건 '상식화된 편견'이며 '무상의 요설'이라는 것이다. 한 편의 영화를 이야기로 환원시키지 말라는 가르침은, 우리가 충분히 실천하지는 못했다 해도(실은 거의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지당한 말씀이며 오래 들어온 훈계다. 하지만 인물론은 어떤가. 예컨대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 존 웨인의 캐릭터를, 요제프 폰 스턴버그 영화에서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차가운 정념을, 하워드 호크스 영화에서 심드렁한 전문가들을,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에서 수난과 대속의 여인들을 말해선 안 된다는 것일까. 시대사조나 작자의 사상은 그렇다 쳐도 영상의 심미취미는 또 어떤가. 시각 매체인 영화에서 심미적 영상에의 도취는 악덕이라는 뜻일까. 하스미는 이런 반문에 망설이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모두 '범용함'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평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기서 "영화의 출발점이자 도달점이 광원의 구체에 의해 장방형의 벽에 비쳐지는 빛과 그림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심상치 않은 문장에 유의해야 한다. 영화는 기계장치에 의해 조작된 빛과 그림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보고 있는 건 그저 표층의 기호 놀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비평체험이란 범용한 것들을 잊거나 모르는 '우둔함'의 상태에서 표층에 드러난 기호와의 현재적 조우라는 것이다(하스미에게는 문학도 표층의 기호 놀이이기는 마찬가지다. 1978년에 발간됐으며 올해 국내에 번역 출간될 [[나츠메 소세키론]]의 서장에서 그는 "의미해독을 용이하게 하는 거리도, 깊이도 없는 채로, 모든 것이 깨어지기 쉽게 표층에 부상해서 일제히 소란을 피우는 장이야말로 문학이 아니던가"라고 단언하며 소세키에 다가가기 위해선 "언어 이외의 어떤 것도 시계(視界)에서 일소할 것"을 주문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영화가 표층적 기호 놀이일 뿐이라는 언명은 위험한 발언이다. 이건 언어 혹은 철학의 개념이 닿을 수 없던 세계의 진실을 영화가 대면케 한다고 주장하며 전력을 다해 영화를 옹호했던 위대한 시네필 비평가-학자들(앙드레 바쟁,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스탠리 카벨, 세르주 다네, 질 들뢰즈, 알랭 바디우, 질베르토 페레스 등등. 자크 랑시에르는 제외된다)에 대한 도발이다. 경탄을 멈추고 한발 떨어져 곱씹어볼 대목이다. 기껏 빛과 그림자의 유희에 불과한 것에 하스미는 자신의 영혼을 팔았던 것일까. 아니면 이 도발적 발언조차 '무상의 요설'을 격파하기 위해 동원된 모종의 수사일까. 그는 영화의 무엇을 사랑한 것일까. 하스미의 비평은 그의 시네필리아와 분리될 수 없을 것이다. (댓글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