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서문-한국의 독자들에게--11
1부 다시,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 이 부재하는 것의 광채--19
영상의 이론에서 이론의 영상으로--46
영화, 황당무계한 반기호--80
영화와 떨어지는 것--94
제도로서의 영화--128
영화와 비평--137
2부 거장들, 작품들 - 변모하는 풍경 속에서
돈 시겔과 리차드 플라이셔 또는 그 혼탁과 투명--145
프리츠 랑 혹은 원환의 비극--167
장 르누아르 또는 촉각도시의 흔적--188
존 포드, 뒤집어지는 하얀색--209
<기적>의 기적-드레이어의 경우--231
영화작가 클린트 이스트우드--246
흡혈귀한테 보내지 못한 편지: 소네 추세이 --257
시네마의 선동장치--261
헨리 폰다는 결국 영화와 행복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284
파국적 슬로모션--286
영화는 어떻게 죽는가:할리우드의 50년대--302
어두어져 가는 시간 속에서: 미조구치 겐지 <치카마츠 이야기>--333
일본영화의 황금시대: 미조구치, 오즈, 나루세--348
고다르와 트뤼포를 동시에 사랑하는 것의 귀중함--354
<풀 메탈 자켓>의 큐브릭은 실패작을 찍는 것조차 실패했다--357
파라자노프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허우샤오시엔의 <동동의 여름방학>에 넘치고 있는 영화의 기척에 몸을 드러내보면 어떨까--360
지금 영화는 완고하게 침묵하고 있다. 그런 영화의 침묵에 대해 비평가는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363
‘모든 영화는 미국영화이다’(고다르)라고는 농담으로도 말할 수 없게 된 할리우드의 영화의 참상을 앞에 두고 사람들은 새로운 세기를 향해서 영화에의 기대를 어떻게 조직하면 좋을 것인가--371
액션영화 베스트 50--379
3부 이동하는 영화들
알프스 남쪽 사면의 마조레 호반에 남쪽의 영화도시가 출현한다--397
영평인으로 홍콩영화제에 출석해 12일 간을 보냈다. 신작으로는 허우샤오시엔과 첸카이거의 영화가 틀림없이 일급의 작품이었다--423
마드리드의 거리에서 영화를 말하다: 빅토르 에리세와의 대화--429
광주의 존 포드--441
절대의 화폐: 사고와 감성을 둘러싼 단편적 고찰 1--445
4부 영화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작가주의에 거스르면서 팀 버튼을 옹호하는 것의 곤란--457
고다르의 고독--465
선악의 피안에서: 구로사와 기요시 <밝은 미래>--488
영화의 21세기는 페드로 코스타의 <반다의 방>과 함께 시작된다--502
연출가의 지능지수의 이상한 높음: 마이클 만 <콜래트럴>--506
존 포드와 던진다는 것--509
존 포드의 <웨건 마스터>: 이 사치스러운 B급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516
21세기에 걸맞은 진정한 픽션을 처음 인류에게 제시하다: <스티브 지소의 해저 생활>--525
리얼타임 비평을 권함--528
에드워드 양 추도--561
몽고메리 클리프(트) 문제에 관해서: 영화사의 캐논화는 가능한가--570
이 영화작가의 겸허함의 결여는 보는 사람의 관용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테렌스 맬릭 <트리 오브 라이프>--588
영화붕괴전야에 부쳐/영화붕괴전야를 향해서--592
해설: ‘영화광인’ 하스미 시게히코--임재철--603
옮긴이 후기--611
원제 및 출전--613
하스미 시게히코 연보--618
찾아보기--624
영화의 맨살
하스미 시게히코
63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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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 시리즈 4권. 하스미 시게히코가 영화비평가로 데뷔한 1969년부터 최근까지의 글에서 대표적인 것들을 선별하여 번역한 것으로 일종의 ‘비평선집’이다. 영화 비평가로서 활동한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발표한 글들에서 정선한 것을 모은 것인 만큼 그의 비평의 특징과 지향점을 한 눈에 볼 수가 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세계영화계 전체를 뒤져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비평가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와 아오야마 신지를 포함해 오늘의 일본 영화계를 이끄는 쟁쟁한 중견들을 감독의 길로 이끌고, 수많은 저술을 통해 영화관객들에겐 둘도 없는 지침을 제공한 인물이 바로 하스미 시게히코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그가 프랑스에서 플로베르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들뢰즈와 푸코를 일찌감치 일본에 소개한 선구적 학자이며, 동경대 총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던 거물 지식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평론이 그의 화려한 지적 배경과는 달리 철저히 영화광적이며, 기존의 평론이 이르지 못한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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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 소개
‘영화광인’ 하스미 시게히코, 그 40년간의 궤적의 기록
이 책은 하스미 시게히코가 영화비평가로 데뷔한 1969년부터 최근까지의 글에서 대표적인 것들을 선별하여 번역한 것으로 일종의 ‘비평선집’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비평가로서 활동한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발표한 글들에서 정선한 것을 모은 것인 만큼 그의 비평의 특징과 지향점을 한 눈에 볼 수가 있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세계영화계 전체를 뒤져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든 비평가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와 아오야마 신지를 포함해 오늘의 일본 영화계를 이끄는 쟁쟁한 중견들을 감독의 길로 이끌고, 수많은 저술을 통해 영화관객들에겐 둘도 없는 지침을 제공한 인물이 바로 하스미 시게히코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그가 프랑스에서 플로베르로 불문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들뢰즈와 푸코를 일찌감치 일본에 소개한 선구적 학자이며, 동경대 총장으로 재직하기도 했던 거물 지식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의 평론이 그의 화려한 지적 배경과는 달리 철저히 영화광적이며, 기존의 평론이 이르지 못한 독특한 경지를 개척했다는 점일 것이다.
‘연주자’로서의 비평가
하스미의 영화비평은 자신의 압도적인 영화체험을 바탕 삼아 종횡무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의 영화 글이 보여주는 일견 현학적으로 보이는 공세에 독자는 아무래도 움츠러들 수밖에 없고 과연 빈약한 영화 체험밖에 없는 자신이 영화를 논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하는 두려움까지 갖게 한다. 영화를 말하는 그의 열정에 의심을 가질 수는 없지만 또 한편으로는 과연 이 정도까지의 열정을 쏟아야하는가 하는 의아함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스미 시게히코의 이러한 태도는 결코 영화 체험의 양에 의해 자신의 영화적 판단에 우월성을 부여하려는 태도, 즉 아무래도 자기과시적이라고 생각되기 쉬운 그런 태도가 아니다. 그의 비평에서 중요한 것은 영화 체험의 ‘폭넓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체험의 ‘강도’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강렬한 응시의 힘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체험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최고의 수확은 화면을 뚫어지게 봄에 의해 얻어지는 예상치 못한 발견, 하스미식의 용어로 말하자면 ‘조우’의 순간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조우가 가능해지려면 화면을 볼 때 절대 화면 밖의 요소를 개입시키지는 않는다는 태도를 견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스미 비평의 진수는 이러한 응시의 힘을 통해 얻은 조우의 체험을 자기류의 테마틱스(주제론)로 재구성하는 데에 있다. ‘부정한다는 것’, ‘먹는다는 것’,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 ‘산다는 것’, ‘보는 것’, ‘멈춰서 있는 것’ 등을 각 장의 주제로 내세우고 있는 <감독 오즈 야스지로>는 하스미류의 테마틱스를 본격적으로 전개했다는 의미에서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하다. 이 책에 실려 있는 글 중에서는 곡선을 주제로 한 히치콕에 대한 글, 원환을 주제로 한 프리츠 랑에 대한 글, 흡혈귀를 주제로 한 소네 추세이에 대한 글 등이 이러한 하스미류의 테마틱스의 대표적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스미 자신이 일본에서 한참 영향력이 높아지던 시기, 스스로의 비평 활동에 대해서 스스로를 어떻게 평가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 한 1981년의 좌담회에서의 발언에서 그의 테마틱스적 글쓰기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내가 영화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라는 것은 지금 영화에 있어서 19세기가 끝나고 영화에서의 20세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19세기 음악의 분야에서는 위대한 작곡가가 많이 있었고 20세기가 되자 이번에는 위대한 연주가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1960년 이후 연주가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영화에 있어서 연주가라고 하는 것은 누구냐고 하면 그것은 보는 사람 즉 관객입니다. 우리가 인터프리테이션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의해 환경으로서의 영화가 풍부해지기도 하고 빈곤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있어서 19세기의 대작곡가에 해당하는 감독들이 차지하는 지위라고 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명백히 저하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작가에 대한 비평가의 강세라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현실인 것입니다. 초인적인 작가들, 하워드 혹스, 오즈 야스지로라든지 히치콕이라든지 혹은 마키노 마사히로 같은 굉장한 작가들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거나 혹은 젊은 사람들이 그들 위대한 작가들과 같은 작품을 만들어 주기를 초조해하며 기다리고 있어보았자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들이 만든 영화를 평가하기는 합니다만 결코 여기에 미래를 걸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미래를 걸어야 하는 것은 연주가 쪽으로, 영화 그 자체를 연주해가는 우리 관객의 감성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그 영화의 연주 그 자체를 수동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영화적인 환경을 바꿔 가는 방식으로 연주해가면 좋을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하스미적인 스타일’의 확립
플로베르 연구로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하스미가 1965년 일본에 돌아와 한 최초의 작업은 롤랑 바르트, 미셀 푸코, 질 들뢰즈 등의 인터뷰를 발표한 것이다. 60년대 후반 즉, 일본에서도 구조주의 이후의 프랑스의 지적 동향에 지극히 민감했던 시대에 그는 첨단의 흐름을 대단히 명석하게 소개함으로써 문명을 얻기 시작했다. 문학평론가로서의 그의 입지를 확고히 해준 것은 1979년에 발표한 <표층비평선언>이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이 책은 어떤 부자유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읽는 것, 쓰는 것 그리고 사고하는 것에 반드시 끼어드는 그런 부자유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부자유라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자유에 가까운 그런 경험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자유라고 믿고 있는 것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야기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는 아주 드물게 자신을 잊고 심지어는 세계를 잊어버리는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경이적인 예술작품을 조우했을 때나 아니면 놀라운 영화를 발견했을 때 말이다. 이러한 결정적인 순간은 항상 언어화,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이야기로의 탈바꿈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이야기의 틀로 편입돼야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 가능한 그런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있어서의 어떤 결정적인 체험, 즉 한계체험이라고 해도 좋을 이 체험은 일상적인 레벨 즉 평준화된 세계로 끌어내려지고 만다. 어떤 대상이 계측 가능한 깊이 혹은 내부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되면 한계체험은 더 이상 한계체험이 아니라 일상적인 체험이 돼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비평이란 존재가 과잉된 어떤 것과 황당무계한 조우를 연출하는 철저하게 표층적인 체험이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체험을 그 고유성에 있어서 그대로 살려내는 ‘표층적인 비평’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하스미의 전략은 언어를 그 극한에까지 밀어붙여서 거의 그 의미가 쉽게 포착되지 않는 지점으로까지 몰고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미작용이 거의 상실되는 지점까지 언어를 몰아붙인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그의 독특한 문체가 등장하는 것이다. 일본어 문장으로서는 구두점이 아주 적으면서도 대단히 호흡이 긴 그의 문장은 그냥 읽으면 거의 숨이 넘어갈 정도로 일종의 “주술적인 리듬”까지 느껴진다. 도발적인 어투, 그리고 종래의 일본어 문장으로는 거의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호흡이 긴 문장. 바로 이런 것이 일본의 비평계에서는 ‘하스미적인 것’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시네필의 은밀한 쾌락’에서 ‘영화적 환경에의 개입’까지
하스미는 자신의 영화체험에 대해 어린 시절부터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는 편에 가까웠다고 말하고 있다. 특별히 어떤 감독이나 배우의 작품을 골라서 보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영화는 거의 다 보는 편이었다는 것이다. 중학생 시절에는 만원의 재개봉관 맨 앞줄 구석에서 르네 클레르의 <침묵은 금>을 끝까지 보다가 안면마비를 일으켜 한 달 간 병원을 다닌 경험도



허문영 평론가 봇
1. 수재에게는 배울 수 있어도 천재에게는 배울 수 없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천재다. 그와 비교하기에 아주 적절한 가라타니 고진은 수재다. 가라타니에게는 배울 수 있어도 하스미에게는 배울 수 없다. [[영화의 맨살]]을 읽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여기서 말하는 천재와 수재는 지능이나 지식의 차이가 아니라 지적 태도의 차이로 구분된다(배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골치 아픈 비평가를 말해야 하는 지면이니, 이 정도의 자의적 구분은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또한 대상은 넓은 의미의 비평가에 한정한다). 수재는 논리적이고 정의(定義)에 엄격하며, 일관된 문제의식을 지닌 채 더 깊고 넓은 앎을 향해 나아간다. 느리지만 집요한 그의 글쓰기는 대답될 수 있는 질문과 대답될 수 없는 질문을 명료화하며 체계적이고 총체적인 계보학으로 향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그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없다 해도 그의 사상의 행적과 윤곽을 짐작할 수 있다. 천재는 은유의 수사학에 능하며 종종 자의적 개념을 사용하는 한편, 자기모순과 비약도 서슴지 않고 앎의 추구를 은근히 경멸한다. 민첩하고 모호하고 종잡을 수 없는 그의 글쓰기는 임의적이고 일회적인, 때로는 황당무계한 계보도(혹은 분류학)를 작성한다. 그의 말은 충격적이지만 명료한 논리가 아니라 중첩된 수사로 제시되는 까닭에 지식으로 흡수되지 않으며 그의 사상의 윤곽은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 결과 수재는 학파를 낳지만 천재는 신도를 낳는다. 무협지 용어를 빌리면 수재는 정파(正派)이고 천재는 사파(邪波)이다. 이창호와 이세돌이 함께 바둑 천하를 호령하던 2005년 무렵 중국의 한 기자는 "이창호는 신의 인도에 따라 바둑을 두고, 이세돌은 악마와의 계약에 따라 바둑을 둔다"고 쓴 적이 있는데, 이 비유를 가라타니와 하스미에게 적용해도 좋을 것이다(뛰어난 산문가이기도 한 바둑평론가 박치문은 이창호와 유창혁의 전성기인 1990년대에 이창호를 사파, 유창혁을 정파라고 부른 적이 있다. 정파와 사파의 구분은 상대적이다. 일본학계 안에서라면, 새외무림(塞外武林)에 비유할 수 있는 아즈마 히로키와 나란히 놓을 때 하스미는 정파에 더 가까워보인다. 물론 이 비유들은 지적 위계와 무관하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글을 '읽어버렸다'. 영화에 관해 쓰는 사람에게 이 경험은 치명적일 수 있다. 우리는 좋은 글을 쓰고 나면 대개 지식의 부가를 경험한다. 그것을 흔히 배운다고 표현한다. 읽기를 통해 나는 조금 더 많이 알게 된 것이다. 하스미 시게히코의 글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의 글을 읽고 나면 내 머릿속에서 뭔가 무너진다. 무너지고 난 뒤 어떻게 다시 세울지 막막해진다. 나는 캄캄한 폐허에 내던져졌고 이제 읽기 전으로 되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내 준거들을 그가 쑥밭으로 만들었는데, 그렇다고 그의 강렬하지만 모호한 준거들을 알겠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차라리 읽지 말 것을, 또한, 이런 글은 다른 사람들도 읽지 말기를, 하고 중얼거리게 된다. 천재에게는 배울 수 없다. 2. [[영화의 맨살]]에서 단 하나의 글을 추천하라면, [프리츠 랑, 혹은 원환(圓環)의 비극](이하 [원환의 비극])이다. 이런 글을 읽고 나면 정신이 멍해져서, 적어도 며칠 동안은 쓰는 일 같은 건 엄두를 낼 수 없다. 글의 첫머리부터 주눅들게 한다. "프리츠 랑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바로 독일 표현주의를 떠올리지 않으면 안 되는 정신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빈곤한 정신에 틀림없고......"(167쪽)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곧바로 특유의 종잡을 수 없는 은유의 수다들이 이어진다. "그렇다. 모든 랑적 필름이란 고독한 구체(球?)의 무상의 팽창-수축 운동인 것이다."(169쪽) "랑적 필름이란 직선의 억압에 의해 팽창을 저지당한 곡선의 세계라고 바꾸어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173쪽)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스미가 말하는 구체란 무엇보다 랑 영화의 주인공들인 둥근 얼굴과 둥근 체형의 배우들이다. 피터 로레(), 진 록하트(<사형집행인 또한 죽는다>), 에드워드 G. 로빈슨(<창가의 여자> <진홍의 거리>), 실비아 시드니(<한 번뿐인 삶>) 등이 그들이다. '직선의 억압'이란 표현에서 직선은 감방, 높은 담, 옥사의 벽, 혹은 실내를 장악하는 거대한 초상화의 프레임 등으로 나타나며 궁극적으로는 장방형의 필름 프레임을 뜻한다. 그러니까 랑의 영화는 이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직선의 세계 안에서 수축을 강요당하며 살아가는 둥근 형상의 인물들의 활동이라는 것이다. 이야기와 플롯은 물론이며 프리츠 랑이 속했던 독일 표현주의 특유의 기법들인 명암대조법, 그림자와 어둠의 강조, 사각(斜角)의 구도, 기괴한 세트 등은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하스미에게 랑의 영화는 무엇보다 직선과 곡선의 기하학적 긴장이다. 예컨대 <사형집행인 또한 죽는다>는 "과포화에 도달한 하나의 구체가 참으로 자신을 팽창시킨 외계의 대기압의 압력에 의해 기묘하게 수축하기 시작한 사태에 벌벌 떨고 있는 비극"(169쪽)이고, <한 번뿐인 삶>에서의 구체는 "팽창-수축하는 부드러운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경질의, 응고하는 의지에 닮은 어떤 것"이며 "공감이나 동정을 배척하고 자신을 지키는 고독한 구체, 그것도 강고한 원형성을 띤 구체"(183쪽)이다. 미장센과 동선에서 직선과 곡선의 활동성을 포착하는 것도 매우 섬세한 안목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배우의 얼굴과 몸을 하나의 도형으로 파악하고 그것으로부터 영화 전체를, 그리고 한 작가의 작품세계 전체를 꿰뚫는 이미지-주제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적어도 이 글을 읽기 전까지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스미는 한술 더 떠 영화사에서 "단지 둥근 얼굴인 자신을 견디는 것에서 자신을 현시하는"(172쪽) 배우의 계보를 작성한다. <게임의 규칙>(장 르누아르)의 마르셀 다리오, <의리 없는 전쟁>(후카사쿠 긴지)의 가네코 노부오, <전사의 용기>(존 휴스턴)의 오디 머피, <국외자들>(장 뤽 고다르)의 클로드 브라쇠르, 그리고 클로드 샤브롤의 배우들인 미셸 부케, 장 얀, 그리고 <어느 날 밤에 생긴 일>(프랭크 캐프라)의 클로데트 콜베르와 무성영화 시대의 여신인 릴리언 기시까지. 나는 이 영화들, 이 배우들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고 중얼거리게 만드는 기막힌 계보도이다. 이 글이 쓰인 1976년에는 극장 외엔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글쓰기를 위해 다시 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환경에서 하스미는 일회적 관람의 기억만으로 이런 계보를 작성한다(더구나 그의 본업은 불문학 교수였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하스미는 직선과 곡선의 대립으로부터 랑의 파시즘 담론을 이끌어낸다. "주박되고 움직임을 빼앗긴 것들이 그 수축하는 육체를 존재의 고통으로 견디려 하지 않고 서로 상처를 애무하면서 넓혀가는 수신(受信)의 연대의 틀이 파시즘이라 불리는 토양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그(랑)는 체험을 통해 알고 있다."(185쪽) 이 자각이 새겨진 랑의 영화는 "애매한 타자와의 연대를 향하는 촉수를 자르고 (......) 개개의 응축된 구체가 고독하게 그 수축을 견뎌야 한다"고, 그리고 "스스로 장방형의 직선적-직각적 세계를 모방하거나 해서는 안 된다"(186쪽)고 말한다는 것이다. 하스미는 다른 글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 감독의 윤리적 주제의식을 거론하면서, 그것조차 인물과 이야기가 아니라 직선과 원의 기하학적 대립에서 찾아낸다. 이쯤 되면 비평적 기예의 현란함에 정신이 팔려 작품은 거의 잊혀질 정도다. 그리고 다시 중얼거리게 된다. 역시 이 글은 읽지 않는 게 나았다...... 내가 아는 한 영화사를 통틀어 이런 밑도 끝도 없는 계보도와 분류학을 태연하게 작성하고 그것으로 다른 비평가들을 침묵시킨 사람은 하스미 외엔 매니 파버(Manny Farber)밖에 없다. 3. [원환의 비극]을 읽고 하스미의 방법이 짐작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프리츠 랑 비평에서의 이미지 기하학은, 곡선의 문제를 다룬 히치콕 비평을 제외하면, 하스미의 다른 비평에서는 찾기 힘들다. 존 포드 비평에서는 '뒤집어지는 하얀색'이라는 제목의 색채론, 그리고 서사에서 '던진다는 것'의 중심성을 다룬 자기류의 테마틱스(thematics,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사소한 행위 혹은 사물에서 서사의 주요 모티프를 이끌어내는 방법. [[오즈 야스지로]](윤용순 옮김, 한나래, 2001)에도 적용된, 상대적으로 자주 등장하는 하스미의 방법이다)로 옮겨가고, 장 뤽 고다르 비평에서는 '여자는 여자다'라는 제목에 명시된 "'어째서'와 '왜냐하면' 사이의 자그마한 틈새"(300쪽)에서 벌어지는 '동어반복성'이라는 메타 주제론을 전개한다. 그런가 하면 돈 시겔 비평에서는 '불길한 액체' '답답한 습기'와 같은 은유를 통해 서사를 희박한 것으로 변질시키는 환경의 질감을 다루고, 칼 드레이어 비평에서는 관(棺)에 대한 매혹 혹은 "관이 시선을 획득한다는 부조리한 꿈"(244쪽)이라는 창작자의 황당무계한 집착을 발견한다. 어디서 무엇을 들고 그가 나타날지 알 수 없다. 우리가 그의 글을 읽고 만나는 건 비유컨대 한 검객의 다양한 초식이 아니라, 검객의 검술이거나 희극배우의 몸짓이거나 선동가의 웅변이거나 가객의 노래이다. 하스미는 질 들뢰즈([[시네마 1]](유진상 옮김, 시각과언어, 2002), [[시네마 2]](이정하 옮김, 시각과언어, 2005))가 작성한 영화 이미지 분류학, 그러니까 영화 일반에 적용 가능한 이미지 계열화 같은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는 천 하나를 펼치는 짧은 시간에 다른 사람으로 변하거나 무대에서 객석으로 순간 이동하는 마술사처럼 이 비평과 저 비평 사이의 다른 층위를 아무런 개념적 궤적 없이 순식간에 오간다. 그의 비평은 차라리 미셸 푸코([[말과 사물]], 이규현 옮김, 민음사, 2012)의 인용으로 유명해진 보르헤스의 중국 백과사전식 분류학에 가깝다. 우리는 푸코의 표현을 빌려 하스미의 비평을 "항목들을 서로 연결할 공통의 바탕 자체"([[말과 사물]], 9쪽)를 무너뜨림으로써 사유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헤테로토피아'의 분류학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스미의 비평이 무원칙한 언어 기예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의 비평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밝히는 건 난감한 일이지만, 적어도 그의 비평이 무엇을 말하지 않으려 하는지는 알 수 있다. [원환의 비극]으로 돌아와보자. 글의 말미에서 장방형과 구체의 긴장이라는 구도로부터 하스미는 "영화라는 것의 생의 조건"을 끌어낸다. "프로젝터의 구체의 광원을, 스크린의 가로로 긴 틀의 존재를 무시하고 영화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185쪽) 하스미는 영화 보기를 조건짓는 이러한 물리적인 사실에 대한 인지가 "한편의 필름을 이야기에, 인물론에, 작가의 사상에, 시대사조에, 영상의 심미취미에 환원시켜버리는 상식화된 편견을 거역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영화의 출발점이자 도달점이 구체의 광원에 의해 장방형의 벽에 비쳐지는 빛과 그림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 현실을 추상화하는 모든 영화적 담론은 무상의 요설로서 공중에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185쪽)이기 때문이다. 일단 '구체의 광원과 장방형의 벽'의 논의는 뒤로 밀어두자. 여기서 하스미는 비평이 배격하는 것의 목록을 제시한다. 이야기, 인물론, 작자의 사상, 시대사조, 영상의 심미취미. 한 편의 영화를 이런 것들에 환원시키는 건 '상식화된 편견'이며 '무상의 요설'이라는 것이다. 한 편의 영화를 이야기로 환원시키지 말라는 가르침은, 우리가 충분히 실천하지는 못했다 해도(실은 거의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지당한 말씀이며 오래 들어온 훈계다. 하지만 인물론은 어떤가. 예컨대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 존 웨인의 캐릭터를, 요제프 폰 스턴버그 영화에서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차가운 정념을, 하워드 호크스 영화에서 심드렁한 전문가들을,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에서 수난과 대속의 여인들을 말해선 안 된다는 것일까. 시대사조나 작자의 사상은 그렇다 쳐도 영상의 심미취미는 또 어떤가. 시각 매체인 영화에서 심미적 영상에의 도취는 악덕이라는 뜻일까. 하스미는 이런 반문에 망설이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모두 '범용함'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평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기서 "영화의 출발점이자 도달점이 광원의 구체에 의해 장방형의 벽에 비쳐지는 빛과 그림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심상치 않은 문장에 유의해야 한다. 영화는 기계장치에 의해 조작된 빛과 그림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보고 있는 건 그저 표층의 기호 놀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비평체험이란 범용한 것들을 잊거나 모르는 '우둔함'의 상태에서 표층에 드러난 기호와의 현재적 조우라는 것이다(하스미에게는 문학도 표층의 기호 놀이이기는 마찬가지다. 1978년에 발간됐으며 올해 국내에 번역 출간될 [[나츠메 소세키론]]의 서장에서 그는 "의미해독을 용이하게 하는 거리도, 깊이도 없는 채로, 모든 것이 깨어지기 쉽게 표층에 부상해서 일제히 소란을 피우는 장이야말로 문학이 아니던가"라고 단언하며 소세키에 다가가기 위해선 "언어 이외의 어떤 것도 시계(視界)에서 일소할 것"을 주문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영화가 표층적 기호 놀이일 뿐이라는 언명은 위험한 발언이다. 이건 언어 혹은 철학의 개념이 닿을 수 없던 세계의 진실을 영화가 대면케 한다고 주장하며 전력을 다해 영화를 옹호했던 위대한 시네필 비평가-학자들(앙드레 바쟁,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스탠리 카벨, 세르주 다네, 질 들뢰즈, 알랭 바디우, 질베르토 페레스 등등. 자크 랑시에르는 제외된다)에 대한 도발이다. 경탄을 멈추고 한발 떨어져 곱씹어볼 대목이다. 기껏 빛과 그림자의 유희에 불과한 것에 하스미는 자신의 영혼을 팔았던 것일까. 아니면 이 도발적 발언조차 '무상의 요설'을 격파하기 위해 동원된 모종의 수사일까. 그는 영화의 무엇을 사랑한 것일까. 하스미의 비평은 그의 시네필리아와 분리될 수 없을 것이다. (댓글에 이어서..)
재혁짱
4.5
비평은 필리아에 기반하며 계보와 분류를 전담하고 정전을 세우려 들지 않는다 완전한 비평은 불가능하다 이는 곧 완전한 이해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세상에 없을 애정을 담아, 혼을 바쳐야 한다 그러면서도 무던하게- 덤덤하게- 글을 쓴다 영화를 뛰어넘는 비평의 아름다움은 그렇게 탄생한다
MavericK
3.5
<영화적 기억이란 영화사적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창조적인 무지의 향연이지 않으면 안된다.> (중략)요컨데, 영화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착잡한 구체적인 사회적 구속력의 관계를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도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작품의 이해라고는 절대 말하지 않으며 거기서 지적할 수 있는 정치적=문화적 개념장치를 오히려 탈구축(!)해 보일 정도의 뻔뻔함이 없으면 영화 따위 볼 자격이 없는 것으로 참으로 이 위장된 둔감함을 관철했을 때에야 영화는 겨우 그 제도적 한계에서 자유롭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책 속 내용을 그대로 발췌해온 부분입니다.)
이지형
1.5
이거 진짜 개어려움ㅋㅋ 최소 석사급 이상
Didi-Huberman
4.0
많이 알아가요!
요한 볼프강 폰 프리드리히 보키앵
5.0
영화인은 영화를 좋아한다고 해서 될 것이 아니라, 영화에게 선택 받아야만 한다는 구절이 참 좋다. 그 외에도 하스미 시게이코가 영화를 얼마나 사랑하는지가 느껴진다.
H.W.
4.0
이 책은 세 번 읽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된다. 초독, 관람, 재독.
푸돌이
읽고싶어요
…하스미 시게히코의 「영화의 맨살」을 꺼내 들고 싶을지 모르겠다. 이 책 앞에서는 만감이 교차한다. 물론 하스미 시게히코는 그냥 한마디로 ‘영화 광인(狂人)’이다. 자기 글을 모아놓은 (일본판) 책 제목을 그렇게 붙였고 또한 그 말에 한 점 부끄럼이 없는 분이시다. (나를 포함해서) 내 동료들 중에서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탄식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하지만 이 책은 몹시 위험하면서도 유혹적인 무시무시한 책이다. 읽고 나면 괴상하게도 하스미 코스프레를 하고 싶어진다. (일본에서는 아예 ‘하스미 벌레(蓮實蟲)’라고 부른다) 괜히 큐브릭은 이류감독이지, 라고 중얼거려보고 싶어지고 역시 영화는 아무래도 존 포드지, 라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외치고 싶어진다. 잉마르 베리만이 우스워 보이고 이마무라 쇼헤이쯤은 무시하고 싶어진다. 그건 하스미 ‘센세이(先生)’의 견해이지 당신의 생각이 아니다. 게다가 거의 기적에 가까운 통찰력만큼이나 이상할 정도로 부정확한 장면 설명이 부조리할 정도의 조화(?)를 이룬다. 나는 당신이 하스미의 영향력을 견딜 만큼 힘센 시네필이 된 다음에 읽으라고 ‘경고’하고 싶어진다. …비평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기서 "영화의 출발점이자 도달점이 광원의 구체에 의해 장방형의 벽에 비쳐지는 빛과 그림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라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문장에 유의해야 한다. 영화는 기계장치에 의해 조작된 빛과 그림자의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가 보고 있는 건 그저 표층의 기호 놀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비평체험이란 범용한 것들을 잊거나 모르는 '우둔함'의 상태에서 표층에 드러난 기호와의 현재적 조우라는 것이다. (하스미에게는 문학도 표층의 기호 놀이이기는 마찬가지다. 1978년에 발간됐으며 올해 국내에 번역 출간될 《나쓰메 소세키론》의 서장에서 그는 "의미해독을 용이하게 하는 거리도, 깊이도 없는 채로, 모든 것이 깨어지기 쉽게 표층에 부상해서 일제히 소란을 피우는 장이야말로 문학이 아니던가"라고 단언하며 소세키에 다가가기 위해선 "언어 이외의 어떤 것도 시계(視界)에서 일소할 것"을 주문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영화가 표층적 기호 놀이일 뿐이라는 언명은 위험한 발언이다. 이건 언어 혹은 철학의 개념이 닿을 수 없던 세계의 진실을 영화가 대면케 한다고 주장하며 전력을 다해 영화를 옹호했던 위대한 시네필 비평가-학자들(앙드레 바쟁,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스탠리 카벨, 세르주 다네, 질 들뢰즈, 알랭 바디우, 질베르토 페레스 등등. 자크 랑시에르는 제외된다)에 대한 도발이다. 경탄을 멈추고 한발 떨어져 곱씹어볼 대목이다. 기껏 빛과 그림자의 유희에 불과한 것에 하스미는 자신의 영혼을 팔았던 것일까? 아니면 이 도발적 발언조차 '무상의 요설'을 격파하기 위해 동원된 모종의 수사일까? 그는 영화의 무엇을 사랑한 것일까? ㅡ 허문영 평론가, 『야만적 유희자의 초상』, 계간 문학동네 2016년 봄 (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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