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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

사평

4 years ago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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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립우주군 - 오네아미스의 날개

영화 ・ 1987

평균 3.5

오타쿠를 뛰어넘고자 한, 그야말로 오타쿠나 생각할법한 발상. 아주 당돌한 영화다. 처음부터 끝까지 혈기로 똘똘 뭉친, 치기넘치는 젊은이들의 영화다. 소위 말하는 '윗대가리'와 '노망난 늙은이'를 노골적으로 풍자하며, 왕립우주군의 제작진은 각본 단계부터 폭주하기 시작한다. 일화의 당혹스러움을 따지자면 현대의 MZ 타령도 쏙 들어갈만한 가이낙스 패밀리다운 시작이 아닐까. 왕립우주군은 당시 신생아였던 가이낙스가 본격적으로 애니 업계에 발돋움하기 위해 만든, 막대한 시간과 예산을 들인 초대형 야심작이다. 아주 상쾌한 파일럿 필름으로 투자자한테 사기극을 친 가이낙스는 이 영화를 위해 직접 NASA까지 갔다오는 등 어마어마한 공을 들였으며, 그 결과는 참담한 흥행 실패와 한가득 떠안은 빚더미였다. 당시에 그들이 어떤 마음과 각오로 이 작품을 만들었을지 우리가 알 수야 없겠지만, 팔릴만한 작품이 뭔지 훨씬 잘 알려진 지금의 우리로서는 보는 내내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영화는 팔릴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다. 미야자키의 극적이고 동화적인 세계에 반발하듯이, 완전히 새롭고 현실적인 세계관을 구축한 뒤에 일어날법한 우주비행작전을 시뮬레이션한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탄생한 영화의 드라마성이란 참으로 미약하다. 그저 사건 자체가 일어난다는 것, 이 세계를 살아 숨쉬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는데 목적이 있는 듯 하다. 거기에 작품의 몇 안되는 화려함이라 할 수 있는 추격씬은 애매모호한 템포 탓에 긴장감이랄 것도 없고, 여주인공의 노출 씬이란 것도 눈길을 끌긴 커녕 보기 불편할 뿐이다. 주인공이 겨우내 뭔가 그럴듯한 말을 한다고는 해도, 이것이 도통 뜨거워지지가 않는다. 주인공의 이야기를 따라가봤자 감정이란 것이 도통 생겨나질 않는 것이다. 험하게 말하자면 이건 야마가 히로유키의 자의식 과잉 영화다. 인류의 역사를 훑으며 읊조리는 문명을 향한 경고는 이제 촌스러울 정도다. 그러나 이제와서 각본을 따지려고 왕립우주군을 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스타가 된 애니메이터 군단이 젊고 팔팔할 때 요란스레 그려낸, 혼이 담긴 밀도높은 영상은 언제 보더라도 예술적이다. 완전히 새로운 문명을 창조해내기 위해 완전히 재구축된 이 국가의 생활상, 건축양식, 군대의 제식 등, 하나하나 공들여 조각된 잡동사니들은 그들이 얼마나 오타쿠였는지를 보기좋게 증명하고 있다. 제대로 된 sf를 만들기 위한 독특한 고증과 세계관 구축, 이를 강조하는 집요한 일상묘사는 다른 작품에서 맛보기 힘든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시킨다. 영화 전체가 이런 열의로 한가득 풍부한 화면을 만들고 있으니, 제작진과 같은 오타쿠라면 이런 정교함만으로도 두시간 내내 즐겁게 취해있을 수 있을것이다. 영화의 절정은 극 후반부의 전투씬에서 이어지는 우주선 발사 시퀀스다. 이 장면에 대한 찬사는 굳이 더 필요가 없을 것이다. 특히 이펙트 애니메이터로서 절정가도를 달렸던 안노 히데아키의 폭발 작화를 마음껏 감상 가능하단 것은 이 영화의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신화와도 같은 뜨거운 영상에 힘입어, 로켓은 멋지게 하늘을 뚫고 우주에 다다르며 이야기도 막을 내린다. 그렇게 1987년, 영화가 끝난 이래... 왕립우주군은 창공을 날아가지 못했다. 이 이후 가이낙스는 엄청난 채무에 시달렸으며, <톱을 노려라!>처럼 어른이 만든 성공공식을 따라간 작품을 통해 간신히 기사회생하게 된다. 가이낙스를 하늘 위로 쏘아올린 것은 시로츠구가 아닌 타카야 노리코였으며, 우주까지 올려준 추진제는 에반게리온이었다. 그렇지만, 판타지도 드라마도 애매모호한 이 작품에도 기억에 남는 한 줄 쯤은 있다. 본격적인 로켓 발사 직전. 여기까지 모두 힘냈다며, 역사에 실릴 정도로 잘 해왔다며 모두를 다독이는 주인공의 짧은 대사는, 가이낙스를 좋아했던 팬들에게는 꽤나 각별히 다가오는 문장이다. 가이낙스를 이룬 중추들의 노력과 열정 덕분에, 왕립우주군은 정말 역사에 남았다. 비록 하늘을 날지도 못했고, 우주비행에는 비하지도 못할 아주 작은 각주 하나라 해도 말이다. 그렇게 시대가 지난 2024년에 이런 애매한 시간대의 작은 관에서나마 다시 조용히 상영되고 있다. 열정만 담긴 영화가 매년 수백편씩 쏟아지고 또 침몰하는 문화계에서, 근성 하나만으로 역사에 남을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애니메이션은 만든 사람의 노력과 열정을 가장 뜨겁게 느낄 수 있는 매체다. 나는 그 젊고 앳된 아름다움을 마침내 커다란 화면으로 목도했다. 그 열기를 눈과 뼈에 새긴 것 만으로, 영화를 보고 돌아가는 새벽 밤공기도 차갑지 않다. 그렇지만 첫 주부터 관객수는 미약하기 그지없고, 가이낙스도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으니... 잊혀지기 전에 소중히 하고싶으므로, 다음주까지 상영해준다면 한번 더 봐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