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마늘빵

마늘빵

2 years ago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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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영화 ・ 2011

평균 3.6

공론화된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작품. 허구든 실화에 기초한 영화와 드라마든 가해와 피해가 일어나는 작품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가해자는 끝까지 자신이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비슷한 워딩을 시전한다. ”저에게 왜 이런 고난을 주는지 모르겠다.“ ”나는 모른다. 절대 안 했다. 믿어달라.“ 가해자와 가까운 인물인 2차 가해자는 이런 가해자의 워딩을 받아(여기서 주변인들이 자신을 믿어준다고 여기며 가해자 미소 한 스푼), 다음 과 같은 류의 워딩을 시전한다. “우리 땡땡이가 그랬을리 없어요.”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이의 발언만 있는 거 아니냐?” “(주장하는) 사건이 발생한 지 한참 지났는데 왜 이제와서 그러냐. 어떻게 믿느냐?“ 2차 가해자들은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이에게 피해자다움을 강요한다. ‘피해자다움’이란 피해를 당했다면 그 이후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야 하고, 슬퍼해야 하며,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야 한다는 것. 이런 피해자다움이 그동안 피해자에게 강요되어 온 모습이고, 피해자가 법정에서나 일상에서 생활이 불가능하지 않을 정도의 보통사람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정도가 되면 피해자로 바라보지 않는 시각이 있었다. 이를 깬 것이 더 글로리다. 그리고 유튜브에서 요새 핫한 피해자 표예림이다. 피해자는 최초 신고 당시에나 이후 시간이 지난 뒤에도 마음이 힘들다. 사건 당시에도 힘들었지만 자신이 참자 하고 넘어간 것이고, 이후의 심경 변화에 따라 참지 않고 주변에 알릴 수 있다. 피해를 당한 사실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도가니에서도 아이들에게 추궁한다. 어린여자아이가 성인남자와 삽입이 이루어지려면 강제로는 불가능하지 않느냐, 여자아이의 자발적 협조가 있어야 가능한 거 아니냐, 왜 이제와서 이런 피해를 고하느냐. 우리 주변에서도 이와 같은 비슷한 워딩을 많이 본다. 다만, 우리 주변의 사례는 피해가 매우 심각하여 언론에 오를 정도가 되고, 드라마나 영화화될 정도가 돼서 대중이 가해자를 욕할 때 나도 덩달아 욕하게 되는 데까지 이르지 않을 뿐이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화되지 않는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피해와 가해에서는 합리적이고 합당한 사고판단은 개똥이다. 공동체에서 피해자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많냐, 가해자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많냐의 숫자놀음에 따라 진실 여부가 달라진다. 정말 개똥같은 상황이다. 그래서 늘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를 드러내기 주저하고, 힘들게 드러냈다 해도 마녀가 되는 것이다. 이런 시각을 가진 2차 가해자들이 자신들의 평범한 일상에서는 ‘선한 가해자’이기에 더 현실은 개똥같은 것이다. (선한 가해자는 두 단어가 서로 상충하는 형용 모순을 보인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의 ’선한 가해자’들이 내가 속한 공동체와 우리 주변 사회를 나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다음은 주목해야 할 주제다. "왜 평범한 착한 사람들은 제 주변인의 악행에 대해서는 눈감거나 가해자에게 온정적인 모습을 보이는가?" 가해자는 늘, 자신이 가해를 해도 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한다. 더 글로리의 유명 대사도 그 지점을 지적한다. (정확한 워딩은 아님)”너희들은 나를 참 잘도 찾아내는구나.“ 평범하고 선한 모습을 보이는 가해자, 가해자를 감싸는 2차 가해자, 가해자에게 온정적 시선을 보내는 이들 모두 자신들이 가담한 악행의 정도에 따라 고스란히 돌려받아야 마땅하다.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오늘날에도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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