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준

숏텀 12
평균 3.7
오랜만에 강남 길거리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파란색 로고가 박힌 모자에 발목까지 올라오는 검은 양말, 팔자좋은 걸음거리, 아 그때 그대로네. 반갑게 손인사치며 오는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다 슬그머니 시선을 옮겼다. 언제나처럼 부자연스럽게 큰 오른손, 그것 역시 그대로네. . 그는 아직도 십여년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찢어질듯한 아버지의 고함소리와 거친 허리띠의 파열음, 번뜩이는 칼날에 반사된 자신의 손과 지문 모양으로 굳어진 핏자국까지. 하얀 벚꽃이 길거리를 포근하게 쓰다듬는 4월, 이사를 간다며 마지못해 교정을 나서는 그의 눈에는 중력보다 무거운 이슬들이 하나 가득 맺혔더랬다.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의 눈에는 그저 부럽게만 보였지, 너 서울 간다며, 좋은데 간다며. . 면회는 단 한번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어짜피 곧 나온다고, 그 말을 끝으로 어느새 말을 멈춘 녀석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눈물이 그렁그렁 콧물까지 주르륵, 아 젠장, 내가 뭘 해줄 수 있겠나 그저 바라보며 굽은 등을 연신 토닥거려줄 밖에. 쨍쨍쨍쨍 부딪히는 소주잔 소리가 점점 커지며 목구멍에 넘어가는 것이 술인지 물인지 내가 방금 먹은 덩어리가 고기인지 마늘인지 헷갈리는 시점에 도달했을때쯤, 그 녀석, 슬그머니 명함을 꺼냈었지. 상처받았던 사람이 상처받은 사람을 더 잘 안다고, 중학생 또래 애들 대상으로 무슨 상담을 맡고 있다고 했었나 여하튼 술김에 자세한 이야기는 저 먼 안드로메다로. 그런데 하나 확실하게 기억나는게 있었어. 그 이야기를 하는 녀석의 표정에는 분명,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푸근한 미소가 어려있었다는 것, 다른건 몰라도 그거 하나만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