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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엠

연엠

6 years ago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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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신세계

책 ・ 2015

평균 4.0

옷, 음식, 집, 섹스는 무제한적으로 공급된다. 굶어죽는 일도 없고 얼어죽는 일도 없고 병으로 죽는 일도 없다. 사람들은 진실만 말하고 사랑과 육체적 성애에 솔직하며 연애는 자유롭다. 전쟁도 없고 마녀사냥도 없다. 슬픔과 고통은 약한 수준의 허가된 마약으로 다스릴 수 있다. 언제 어디서나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고 아무런 대가도 필요하지 않다. 멋진 신세계는 유토피아다. 욕망은 신성하다. 멋진 신세계의 인간들이 분노할 때는 욕망이 부정당할 때다. 욕망의 부재는 불건전한 것으로 취급된다. 욕구불만의 상태로 빠지지 않는 것이 좋다는 생각은 욕구충족은 필수라는 믿음으로 이어졌다. 욕망은 무한정 긍정된다. 사회 시스템은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데 맞추어져 있다. 이들은 노예다. 흔히들 노예의 삶을 끔찍한 것으로 여긴다. 좋아하는 물건을 살 수도 없고 원할 때 산책을 나갈 수도 없고 좋아하는 사람과 연애를 할 수도 없으므로. 그러나 이는 부자유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욕망 거세에 대한 두려움이다. '할 수 있음의 제거'가 아니라 '원하는 것의 제거'에 그 두려움의 뿌리가 있다. 노예에 대한 공포는 자유로이 욕망을 탐하지 못하는 데에 대한 공포다. 욕망을 무제한적으로 긍정받는 노예라면? 멋진 신세계의 주민들이 그렇다. 그들은 대체로 행복하지만 욕망을 무한히 '실현받을' 뿐 자기만의 고유한 욕망을 위해 살아가지 못한다. 독립적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노예들의 유토피아다. 그래서 겉으로는 자유를 갈망한다고 말하며 동시에 행복을 갈망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완전한 자기모순에 빠져 있는 것이다. 행복은 자유의 여러 부속물 중 하나에 불과하다. 진정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은 행복에 목매지 않는다. '오직 행복'은 족쇄기 때문이다. 자유는 자유롭지 않을 자유를 포함한다. 자유롭지 않은 자유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자유, 욕망이 부정될 자유, 고통스러울 자유, 헉슬리에 따르면 이 자유는 동시에 권리이기도 한 것으로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이가 들끓을 권리,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끊임없이 불안에 떨 권리, 장티푸스에 걸릴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다. 이런 자유와 권리를 박탈당한 인간은 노예다. 일시적인 행복의 박탈을 하나의 피하고픈 가능성으로만 여기면서 그것이 중대한 권리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은 자유의 대가를 모르는 것이다. 진정으로 자유를 원한다고 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려 할 만큼의 용기는 쉬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정말로 소중한 무엇은 얻을 수 있지만 얻지 못할 수도 있는 무엇이다. 유토피아아야말로 끔찍한 디스토피아다. 욕망 긍정은 단순하게 비유하면 3S정책이고 과감하게 비유하면 성매매 제도고 고급지게 비유하면 자유주의다. 물론 이때의 자유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니라 '행복'으로 오도되는 자유다. 욕망 성취의 표준화는 인간의 표준화나 계급화와 마찬가지로 사회 안정을 위한 것이다. 혹시나 싶어 덧붙이자면 사회 안정은 긍정적인 것이 아니며 만인의 노예상태를 의미한다.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세계야 말로 자유로운 세계다. 그러나 이 책이 구세계에 대한 찬미라고 볼 수 없는 건 강간과 끔찍한 전쟁과 마녀사냥과 거짓말이 판치는 구세계에 대한 환멸이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신세계는 범죄가 없을지언정 인간을 노예화한 곳이고 구세계는 인간의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대가로 범죄를 피하지 못한다. 흥미로운 건 마르크스다. 그는 욕망을 제대로 긍정받지 못하는 결여된 인간이며 그래서 반사회적이다. 그가 가진 인간 고유성에 대한 갈망과 혁명성은 겉으로는 우아하고 멋져보이지만 실상은 정상이 되지 못한다는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제도권에 편입됐을 때 그는 누구보다 저열해졌다. 오래된 책인데도 1:1연애나 결혼제도의 맹점을 정확히 비판한다. 오래된 책이라서 동성애와 자유연애를 과도한 욕망 긍정의 예시로 삼거나 욕망 추구를 '탄력적인' 여성과 섹스하는 일로 간편하게 치환해버린다. 저자가 21세기를 살았다면 과도한 욕망 긍정의 사례로 동성애가 아니라 소아성애나 비인간에 대한 성애를 들진 않았을까 싶지만, 그것도 100년 뒤엔 구식 비유가 될 수 있단 걸 감안한다면 확실히 사회는 바뀐다 싶다. 물론 욕망의 제거나 무한긍정은 둘 다 노예화일 뿐이며 그렇다고 불안한 인간이 노예보다 나은 건 아니라는 헉슬리의 지적은 여전히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