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롬아지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평균 3.5
네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각 이야기가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것은 아니며, 주인공도 동일하다. 그렇지만 소설에선 소제목을 통해 분명히 구분하고 있다. 읽다보면 개연성이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사건과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가 뚜렷하지 않다. 기상천외한 일들도 많이 벌어진다. 그러나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꿈과 술의 속성을 떠올리며 작품을 읽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술과 밤의 분위기에 취해 정처 없이 걷는 여인이 있다. 그리고 그 여인의 뒤를 좇는 남자가 있다. 둘은 학교 선후배 사이이다. 그는 자신의 후배이기도 한 단발머리 소녀를 좋아하고 있지만 기회를 얻지 못해 무작정 그녀를 스토킹한다. 악의 없이 순수하게 그녀의 눈 앞에 알짱거리며 마음을 얻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사랑에 관해서는 무딘 감각을 지니고 있기에 최근 선배를 자주 마주치는 일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또 만났네요." 하면서 신기해할 뿐이다. 그녀가 선배와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를 공유하며 겪게 되는 일련의 사건을 그와의 인연으로 인식하고 또 하나의 세계를 알아가는 과정이 소설 속에 흥미롭게 담겨져 있다. 2. 심해어들 그녀는 밤의 거리를 활보하다가 우연히 사업에 실패하여 실의에 빠져 있는 중년 남성 도도를 만나 그로부터 인생론을 듣게 된다. 도도는 그녀를 성추행하기도하지만 정작 그녀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으며, 오히려 도도를 인생론을 들려주고 술값을 대신 내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을 향한 적의 없는 그녀의 태도는 오늘날 무척이나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그렇기에 더욱 이 소설은 신비하고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띠게 된다. 도도는 한 때 판매용 비단잉어를 길렀지만 재해로 인해 한 순간에 꿈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도도는 그녀에게 버블경제 시절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역사상 유례 없었던 호황은 마치 꿈처럼 사라지고 거품의 잔해는 절망이라는 형태로 남게 되었다. 도도의 사업 실패도 버블경제의 붕괴와 무척이나 닮아 있다. 3. 편리주의자 가라사대 대학새내기인 그녀는 얼떨결에 학교 축제의 연극에 참여하게 된다. 한 때 술과 밤의 분위기에 취해 정처 없이 떠돌던 그녀는 학교라는 또 하나의 거대한 사회에 편입하여 학교의 구성원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하나가 되어간다. 갑작스럽게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일, 그리고 상대역이 알고보니 그동안 자주 마주쳤던 선배였던 일. 만화 속 설정 같은 이러한 사건들은 그녀가 사람들과 동화되어 가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주며, 캠퍼스 생활에 대한 낭만을 불러 일으킨다. 4. 나쁜 감기 사랑 감기 그녀는 전염성이 강한 감기에 앓게 된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약을 구하러 떠난다.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모험을 하는 것이다. 그녀의 여정은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리게 한다.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서 신기하고도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면서 성장해나가듯, 소설 속 그녀는 밤의 거리를 걷기도 하고, 술 마시기 대회에 참가하기도 하고, 대학 연극에 참가하기도 하고, 마침내 약을 구하러 다니기도 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고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닫게 된다. 그녀의 적의 없는 태도, 사랑에 관한 무딘 감각, 긍정적이고 쾌활한 성격은 때묻지 않은 순수함으로부터 기인한 것이니, 그녀에게서 어리고 순수한 앨리스가 떠오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5.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그리고 <4월 이야기> 이제 막 성인이 된 술을 좋아하는 여인의 꿈결같은 성장담. 온갖 새로운 것들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며, 그것을 즐기는 여인을 보면 이와이 슌지의 영화 <4월 이야기> 속 우즈키가 생각나기도 한다. 우즈키 또한 그녀처럼 설렘으로 부푼 마음을 안고 대학생활을 시작한다. 혼자 자전거를 타고 산책을 하기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하고, 이웃과 밥을 나눠 먹기도 하는데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이와이 슌지 특유의 부드럽고 섬세한 터치로 따듯하게 표현되어 있다. 반면,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꿈속에서나 벌어질 것 같은 한 대학 새내기의 이야기를 판타지 기법으로 나타냈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사건들의 인과관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저 꿈을 꾸듯 이야기를 따라가면 그걸로 충분하다. 6. 이백(李白) 이 소설에는 만화처럼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가 많이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것은 이백이다. 이백은 고리대금업자이지만 한편으로는 신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한 때는 매정한 모습을 보이지만 호탕하고 대인배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주인공 그녀에게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라는 말을 해주기도 한다. 이백은 술을 무척 잘 마시며, 가짜 전기부랑이라는 술을 만들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그의 이름 이백(李白)은 중국의 시인 이백과 일치한다. 소설의 이백이 풍류의 화신인 이백과 이름이 같다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백을 술에 대입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술의 이중적인 속성을 생각해본다면 이백의 다양한 성격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또한 그가 그녀에게 건넸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라는 말은 놀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으니 충분히 놀아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술과 풍류, 이제 막 대학생활을 시작하는 여인, 그리고 그를 짝사랑하는 선배의 좌충우돌 스토리.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내기 어려운 내용이지만 작가는 거뜬히 이야기를 만들어 냈고 독자를 이해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잠에서 깨고 나면 꿈속에서 벌어진 여러 일들이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 소설도 그런 꿈결같은 소설이다. 그녀도 언젠가는 한낮 꿈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캠퍼스 생활을 끝내고 고된 사회생활을 하다 도도처럼 뼈저린 실패를 겪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황홀하고 낭만적이었던 청춘을 떠올리며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이 시대 청춘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