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천수경

천수경

4 years ago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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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앤 유 앤 에브리원

영화 ・ 2005

평균 3.7

소녀가 방바닥에 누워 미래의 식당을 구상하거나, 금붕어 한 마리를 살리기 위해 옆 차선의 차를 가로막는 액션씬이 펼쳐지거나, 피곤에 쩌든 미술관 관장이 무명 예술가의 영상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들을 때 이 영화엔 마법이 흐른다. 만화 영화에서 주인공이 진화할 땐 적군이 건드릴 수 없는 것처럼, 이 우주엔 이따금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무적의 순간들이 있다는 걸 아는 영화다. 그런 순간엔 음악이 흐르고, 시간이 느려진다. 이 영화에서 무척 헐겁게 얽힌 주인공들보다도 현실의 우리는 더 헐겁게 연결되어 있을 터. 그럼에도 각자 무적의 순간들이 있다는 걸 잊지 말자는 당부처럼 느껴졌다. 내가 달가워하지 않는 인간도 언젠가 좋아하는 사람과의 데이트를 위해 초스피드로 집을 청소했을 것이다. 내가 그걸 구경하고 싶은지와는 무관하게, 그 사람의 설레는 발걸음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하나의 사태다. 꼴사나운 인간들의 소중한 순간들과 내 삶이 종국엔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덕분에 그나마 지옥철을 견디고, (숲속으로 은둔하지 않은 채) 인간들 사이에서 살 수 있다. 그래서 나에겐 이런 이야기가 필요하다. 주인공들은 각자의 고독 속에서 무언가에 몰입한다. 설령 만나본 적 없는 변태와의 온라인 채팅이라 하더라도. 상대는 초딩이라 많은 단어를 복사-붙여넣기로 써넣고 있더라도. 어찌저찌 버텨낸 이들이 결국엔 만나서 ‘당신이 지금 왜 여기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당신이었군요,’ 라는 표표한 눈빛을 교환하게 된다. 바로 그런 순간에 인간은 억만장자가 아닐까. 한 걸음 덜 나아갔으면 닿지 못했을 영혼과 다행히도 닿게 되는 순간에. 이른 아침의 이상한 소리를 제 발로 쫓아간 아이가 그 소리의 정체를 알게 되는 순간처럼. 누군가 시간을 때우던 소리라는 시시한 정체여도 그게 진실이라는 이유로 특별한 거니까. 버스가 오자 훌렁 떠나버린 남자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진 끝내 모르지만, 그가 준 동전과 함께 아이는 무언가를 건네받았다. 심심해서 숨 막히는 시간은 어른이 되어도 쉽게 해치울 수 없다는 것. 그러는 동안 태양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인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엄마가 가로등 불빛이 켜지는 소리라고 한 게 영 거짓말은 아니었다. 가로등을 두드리는 누군가의 지루한 손놀림이 없으면 해가 안 뜰지도 모르거든. 평범한 사람들이 출근 버스를 재촉하는 마음이 바로 지구를 돌리는 힘이다. 감독은 우정이 생기지 않을 것 같은 곳에 우정을 배치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요상한 실연을 일으킨다. 인물들은 끊임없이 기대와 실망에 휩쓸리는데 또 그 실망의 부작용처럼 새로운 인연이 탄생한다. 다 보고 나면 별 내용 없는 이야기를 이렇게 별스러운 방식으로 전개한 것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주인공 크리스틴은 결국 짝사랑하던 이를 등 뒤에서 안아줄 수 있게 되었다. 딱히 그 성취를 위해 노력한 건 없다. 그러니까 시시껄렁한 일상을 열심히 살아낸 이가 행운을 얻게 된다는 건데. 어이가 없게도 납득이 되고 만다. 리처드의 지리멸렬한 일상과 그의 아이들이 겪는 '새로운 동네에서의 노잼 분투기,' 사실상 왜 나오는지도 모르겠는 두 소녀의 성장담, 크리스틴이 운전을 담당하는 할아버지의 연애사, 전부가 그 행운의 맥락이자 개연성이다. 말이 안 되는 영화인데 우주의 균형을 제대로 담았다. 이 영화의 모든 구석이 너무 좋다. (첫 시퀀스에서 리처드가 "내가 너희 아빠가 아니라면 나를 멀쩡한 사람으로 볼 것 같니? 나 어때 보이니?" 라고 물었을 때 큰 아들은 아빠를 안심시키려 한다. 그 옆에서 작은 아들이 "혹시 저희한테 화났어요?" 라고 묻는 것에서부터 빵 터져서 내내 깔깔 웃음. 보면서 "아니 저게 뭐야.."라는 혼잣말을 열세번은 함. 진심 개웃긴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