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무재

무재

4 months ago

5.0


content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책 ・ 2016

평균 4.0

선사시대부터 영화까지의 예술을, 자율적 형식이 아니라 계급 구조·생산양식·이데올로기가 응축된 사회적 산물로 읽어내는 거대한 마르크스주의 예술사. 책의 구조를 매우 거칠게 요약해보자면 자연주의(리얼리즘-동적요소-형식파괴-진보-민중)와 낭만주의(이상주의-정적요소-형식존중-보수-귀족)의 이항대립으로 볼 수 있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 같기도 하다. 관점을 벗어난 예외적 사례(크리티)들도 적지 않다고 저자 역시 인정한다.) 구석기 시대의 자연주의 이후 평면적이고, 상징적이며, 형식화되고, 추상적이며, 정신적 존재와 관련된 예술이 사회가 덜 위계적이고 권위적이며, 더 상업적이고 부르주아적으로 변모함에 따라 더욱 사실적이고 자연주의적으로 변모해간다고 설명한다. 허나 끝에 가서는 "자연주의(리얼리즘)란 실상 새로운 관습을 지닌 낭만주의"(4권,p.100)라 규정한다. 현실 재현을 표방하는 리얼리즘조차 특정 계급의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보이게 만드는 하나의 허구적 구성이라고 비트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자각하고,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19세기 이데올로기들 중 하나로 상대화하는 지점으로 이 책이 단순한 교조적 텍스트가 아니라 자기비판을 내장한 문제적 고전임을 드러낸다.(맑스의 역사철학 전체의 기초가 되는 이론의 핵심은 계급적으로 분화되고 분열된 사회에서는 올바른 사유라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통찰이다.-4권,p.331) 저자는 "우리 시대가 가장 간절히 해결하고자 하는 예술과 문학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사회학적인 문제다"라며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라는 제목을 붙였다. '예술은 곧 사회다'라는 그의 극단적인 명제는 거칠고, 낡았지만 예술의 전역사를 관통하는 강력한 시각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이를 '고전'이라 부른다. p.s.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권》 p.272 낭만주의와 유물론적 역사관의 비교에 관한 저자의 생각(마르크스의 헤겔 비판이지만)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 낭만주의의 '유출설'적 역사철학 낭만주의의 해석학적 기술, 역사적 상관관계에 대한 통찰력, 역사에서 문제적인 것과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에 대한 감수성, 이러한 것들과 더불어 우리는 또한 낭만주의로부터 역사적 신비주의, 역사적 힘의 인격화와 신비화, 다시 말해 역사적 현상들이란 독립적인 원리들의 기능이자 발현이며 구체화일 뿐이라는 생각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누군가는 이런 사고방식을 의미심장하고도 그럴법하게 '유출설(emanation, 초월적 절대자에서 각 존재가 전개되어 현실세계를 완성한다는 학설)적 논리'라고 규정했는데, 이 규정은 추상적 역사관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런 사고방식을 자체에 내포하고 있는, 흔히는 의식되지도 않는 형이상학을 암시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역사는 알 수 없는 미지의 힘들이 지배하는 영역처럼 보이며, 개개 현상들 속에서는 불완전하게밖에 표현될 수 없는 한층 높은 이념들의 토대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런 플라톤적 형이상학은 국민정신, 국민 서사시, 국민문학과 기독교 예술 등에 관한 이미 낡은 낭만주의 이론들 속에서뿐만 아니라 리글(A. Riegl, 1858~1905. 스위스의 예술사가)의 '예술의욕'(Kunstwollen) 개념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리글도 개념을 절대화하는 낭만주의의 개념신비주의와 정령적 역사관의 마력에서 아직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 시대의 예술의욕을 마치 일종의 행동하는 인격체처럼 간주해서, 이 인격체가 흔히 가장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고 또 때로는 그 예술의욕의 담당자도 모르게, 심지어 그의 의사에 반하면서까지 자기를 관철한다고 생각한다. 리글에게 역사상의 여러 양식은 독립적인 개체들, 다른 어떤 것과도 교환될 수 없고 비교될 수 없으며 생성과 사멸의 과정을 거쳐 다른 하나의 개별 양식으로 교체되는 독립적인 개체들로 여겨진다. 예술사를 그 자체의 기준에 의해 평가받기를 원하고 그 가치를 자신의 개성에 두는 그런 양식현상들의 병렬이자 잇따른 발생으로 보는 견해는 어느 의미에서 역사적 힘을 인격화하는 낭만주의 역사관의 가장 순수한 본보기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인간 정신이 만들어낸 가장 중요하고 포괄적인 창작물들은 결코 처음부터 정해진 하나의 목표를 향해 곧장 나아가는 일직선적 발전의 결과는 아니다. 호메로스(Homeros)의 서사시도 아테네의 비극도, 심지어 고딕의 건축양식과 셰익스피어의 예술도 단일하고 명확한 예술적 의도의 실현이 아니라, 시간적 공간적으로 규정된 특수한 욕구들과 일련의 부적당한 기존 수단들이 한데 어울려 생긴 우연의 결과이다. 바꿔 말하면 정신적 산물이란 점진적인 기술의 혁신(이 혁신은 본래 의도했던 목적에 가까워지면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때그때의 순간적인 동기, 갑자기 떠오르는 착상, 본래의 예술적 과제와 때로는 전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개인의 체험들이 어울려 생겨나는 산물이다. 예술의욕 이론은 이처럼 전혀 비통일적이고 이질적인 발전의 최종 결과를 주도적인 이념이라고 실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고유명사 없는 예술사'(뵐플린의 예술사관에서 핵심 범주.)라는 학설 역시, 바로 그것이 기본요인으로서 현실의 인간들을 예술발전에서 제거해버리기 때문에 역사적 힘들을 인격화하고 개념을 실체화하는 역사 형이상학의 또 하나의 형태일 뿐이다. 이 역사 형이상학을 통해 예술의 발전사는 고유한 내적 생명원리를 따르는, 그리고 마치 동물의 육체가 개별 기관들의 독립을 용납하지 않는 것처럼 독자적 예술가들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성격을 획득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역사적 유물론에 관해서, 정신적 산물 속에는 일정한 시점의 생산수단의 특징이 표현되어 있을 뿐이라든가 역사에서 경제적 현실이란 마치 이상주의 역사철학의 의미에서 '예술의욕' 혹은 '내재적 형식법칙'처럼 절대적 지배권을 갖는다는 식으로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여기에서도 실제 현실에서는 훨씬 더 복잡한 역사과정을 낭만화, 단순화하고 유물론적 역사관을 유출설적 역사논리의 한 단순한 변형으로 만들어내는 셈이 된다. 역사적 유물론의 진정한 의미와 낭만주의 이래 역사학에서의 가장 중요한 진보는, 역사발전의 원천이 형식원칙이나 이념, 실체나 본질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발전은 하나의 변증법적 과정을 나타낸다는 통찰에 있다. 역사발전의 근원을 형식원칙이나 이념에 두는 이상주의 역사관이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비역사적 실체의 '변형'만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면, 유물론적 역사관은 모든 요인들이 항상 유동적이고 의미가 변천하며, 정적인 것과 무시간적 보편성뿐만 아니라 일방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요인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물질적·정신적인, 경제적·이념적인 일체의 요인들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이 상호 의존관계로 맺어져 있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인식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어떤 상태의 근원이 이미 그런 상호 작용의 결과가 아닐 만큼 시간적으로 멀리 소급해 올라간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아무리 원시적인 경제라도 그것은 이미 조직화된 경제로서 이런 사실은 물론 경제를 분석함에 있어서 우리가 정신적 조직형태와는 반대로 독립적으로 주어져 있고 그 자체로 파악 가능한 물질적 전제조건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권》 p.43 합리주의(인간을 위한 예술)와 심미주의(예술을 위한 예술)간의 긴장 그리고 예술작품의 의미에 대한 저자의 견해는 가히 이 책의 백미다. -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을 위한 예술'은 의심할 여지 없이 미학상 가장 복잡한 문제를 다룬다. 미학적 입장에 내재하는 이원적 속성을 그처럼 날카롭게 나타내는 것은 없다.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인가, 아니면 어떤 목적에 이르는 수단일 따름인가? 이 질문은 자기가 처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뿐만 아니라 예술의 복합적 구조의 어떤 요소에 주안점을 두느냐에 따라서 여러가지로 대답이 달라질 것이다. 예술작품은 유리 자체의 구조나 투명도, 색깔과는 관계없이 다만 그것을 통해 인생을 관찰할 수 있는 유리창에 비교되어왔다. 이 비유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관찰과 인식의 단순한 도구, 즉 그 자체로는 이해관계가 없으면서 어떤 목적을 위해서 수단으로만 봉사하는 창유리나 안경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창문 저쪽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고 창유리의 구조에만 시선을 고정할 수 있다면, 예술작품은 또한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자립적 형식체로, 그 자체로 완결된 의미의 결합체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경우 '창문를 통해서 내다보는 것'은 언제나 그 내적 구조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예술작품의 의미는 줄곧 이 두 관점 - 생활과 모든 작품 외적 현실에서 단절된 하나의 존재라는 관점과, 생활과 사회와 실제에 의해서 제약된 하나의 기능이라는 관점 - 사이를 왕래한다. 직접적인 미적 체험의 입장에 서면 자주성과 자족성이 예술작품의 본질처럼 보이기 마련인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에서 예술을 분리시키고 현실의 자리에 예술을 대체함으로써만, 즉 총체적이고 자율적인 하나의 우주를 형성함으로써만 하나의 완전한 환영을 만들어내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환영은 결코 예술의 전체 내용이 아니며, 때로는 예술이 주는 감명과 전혀 무관할 수도 있다. 가장 위대한 작품이란 그 자체로 완결된 미학세계의 전반적인 환각주의(illusionism)를 거부하고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먼 곳글 향한다. 그것은 자기 시대의 커다란 인생문제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언제나 '인간 존재에서 어떻게 의미를 얻어낼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 의미에 참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의 해답을 추구하는 것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권》 p.45 자연주의는 낭만주의의 연장이자 그 해체다. 자연주의는 동일한 자연 개념에 확고하게 근거를 둔 단일하고 명백한 예술관이 아니라, 수시로 변모하면서 그때마다 일정한 목적과 구체적 과제를 지향하는, 그때그때 특별한 현상에 초점을 두는 인생 해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