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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아르놀트 하우저
46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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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태생으로 20세기를 빛낸 지성, 아르놀트 하우저가 선사시대부터 오늘날 대중영화의 시대까지, 인간과 사회와 예술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풀어낸다. 예술이 시대와 사회가 빚어낸 산물이라는 '예술사회학'의 관점을 선구적으로 펼친 책이다. 1951년 영문판으로 첫선을 보인 이래 지금까지 20여개 언어로 번역되며 '새로운 예술사'로서 전세계 지식인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2016년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한국에 처음 소개된 지 만 50년이 되는 해다. 1966년 계간 「창작과비평」 가을호를 통해 책의 마지막 장인 '영화의 시대'가 번역됐고, 이후 1974년 '창비신서' 1번으로 책이 출간되며 한국 지성계에 놀라운 반향을 일으켰다. 이번 개정판은 1999년 개정판에 이은 두번째 개정판이다. 이 책의 새로운 독자들, 이제 막 예술과 사회에 발 디디려 하는 독자들은 물론, 그동안 이 책을 읽으며 예술과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을 키워온 오랜 독자들의 기대를 충족하려 한 결과물이다. 총 500점에 달하는 컬러도판과 새로운 디자인으로 텍스트를 더 쉽고 재미있게 따라갈 수 있도록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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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문교양 필독서로 사랑받은 우리 시대 고전!
창비 50년을 독자와 함께한 스테디셀러!
이제 500점에 달하는 컬러도판으로 새롭게 만난다!
헝가리 태생으로 20세기를 빛낸 지성, 아르놀트 하우저가 선사시대부터 오늘날 대중영화의 시대까지, 인간과 사회와 예술의 관계를 역동적으로 풀어낸다. 예술이 시대와 사회관계 속에 빚어진 산물이라는 ‘예술사회학’의 관점을 선구적으로 펼친 이 책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1951년 영문판으로 첫선을 보인 이래 지금까지 20여개 언어로 번역되며 ‘새로운 예술사’로서 전세계 지식인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2016년 올해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가 한국에 처음 소개된 지 만 50년이 되는 해다. 1966년 계간 『창작과비평』 가을호를 통해 책의 마지막 장인 ‘영화의 시대’가 번역됐고, 이후 1974년 ‘창비신서’ 1번으로 현대편(지금의 제4권에 해당)이 출간되며 한국 지성계에 놀라운 반향을 일으켰다. 이번 개정판은 1999년 개정판에 이은 두번째 개정판이다. 이 책의 새로운 독자들, 이제 막 예술과 사회에 발 디디려 하는 독자들은 물론, 그동안 이 책을 읽으며 예술과 사회를 바라보는 안목을 키워온 오랜 독자들의 기대를 충족하려 한 결과물이다. 총 500점에 달하는 컬러도판과 새로운 디자인으로 텍스트를 더 쉽고 재미있게 따라갈 수 있도록 구성했다.
유럽의 변방에서 떠올라 한국 지성계의 아이콘이 되다
헝가리 유대계 출신으로 독일어를 제1언어로 삼아 글을 쓴 저자 아르놀트 하우저(1892-1978)는 생애 대부분을 이국에서 보낸 디아스포라 지식인이다. 부다페스트에서 공부하던 20대 초반, 그는 죄르지 루카치, 카를 만하임, 벨라 발라스 등과 어울리며 헝가리 혁명정부 문화기관에서 잠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 반(反)혁명이 일어나자 고국을 떠나 이딸리아로, 베를린으로, 다시 나치를 피해 빈으로 옮겨 다녔다. 같이 예술사를 공부하던 아내가 빈의 대학에 들어가고, 남편 하우저는 영화사에 취직해 생계를 꾸렸다.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접수하며 빈에 더 머물 수 없게 되자 친구 만하임의 권유로 런던에 건너갔다. 그리고 ‘예술사회학’에 묶일 만한 글을 수집해달라는 청탁을 받아 작업에 착수했다. 평일에는 저녁 6까지 영화사에서 일한 뒤 밤늦은 시간을 쪼개 작업하며, 휴일에는 대영박물관 도서실에 틀어박혀 타자기를 두드리는 생활을 10년간 이어갔다. 예술사회학 선집은 끝내 미완으로 남았지만, 그 지난한 여정은 하우저 자신의 언어로 내놓은 책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로 결실을 맺는다. 도서실에 눌러앉은 그를 미술평론가이자 출판인이던 허버트 리드가 눈여겨보고 출간 제안을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51년 영어판(Social History of Art)이 세상에 나왔고, 그 성공에 힘입어 하우저 본래의 언어로 독일어판(Sozialgeschichte der Kunst und Literatur)이 1953년 뮌헨에서 출간되었다.
한국에 소개된 것은 10여년이 지난 1966년, 계간 『창작과비평』이 창간된 그해 가을호 잡지를 통해서였다. 잡지를 만들고 책을 공동 번역한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다지 신속한 소개랄 수는 없지만, 당시 사정으로는 결코 느린 편도 아니었다”고 술회한다(개정1판 서문). 반응은 뜨거웠다. 읽을거리가 귀하던 시절, 맑스주의 유물사관이 녹아 있지만 아슬아슬하게 검열의 문턱을 통과할 수 있었고, 선사시대부터 20세기까지 꿰뚫는 압도적인 지식으로 교양의 빈틈을 메우기에도 적절했다. 1974년 창비신서 1번으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현대편’이 출간된 것은 이례적이면서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당시 신서 목록에는 황석영의 『객지』(3번),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4번), 『신동엽 전집』(10번) 등 국내 지식인의 굵직한 저작이 자리하고 있는데, 번역서를, 그것도 목록의 맨 앞에 놓은 사실은 이 책이 한국 독자들 사이에서 어떤 위상을 갖고 있었는지 말해준다. 서구 학계의 중심과 거리를 둔 동구권 좌파지식인의 책이 4·19와 5·16, 군부독재를 겪은 한국에서 ‘실천지성’ ‘참여지식인’의 필독서 역할을 한 것이다. 1977년 7월 「노예수첩」이라는 시가 국가기관을 모독한 혐의로 필화사건에 휘말렸을 때, 변호인 측에서는 문학이 현실과 맺는 관계를 해명하고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의 한 대목을 근거로 제시하기도 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1981년 ‘근세편 하’(창비신서 29번)를 끝으로 15년 만에 완역되었고, 1999년 한번 개정을 거치며 대학가의 필수교양서로 자리를 굳혔다.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세상과 자기 자신의 관계 정립을 고민하던 많은 이들이 이 책에서 힌트를 구했으며, 이제 이 책은 반세기의 역사를 품은 20세기 고전 반열에 올랐다.
예술과 사회를 읽는 세가지 키워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흔히 맑스주의 관점에서 쓰인 선구적인 예술사, 혹은 예술사회학의 시초로 불린다. 하우저는 예술을 신비의 영역에 몰아넣는 대신, 그것을 전문가의 ‘일’로, 또 사회적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경제활동의 일환으로 적극 해명하려고 했다. 이때 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탐사하는 데 요긴한 세가지 키워드를 꼽을 수 있다.
첫번째는 예술형식이다. 고대인의 동굴벽화, 영웅들의 서사시, 귀족여성의 연애소설, 중세 패널화, 셰익스피어 대중연극, 시민계급의 공개연주회, 네덜란드 실내화, 계몽시대 시민극, 멜로드라마, 오늘날 대중영화에 이르기까지 문학·미술·음악·연극·영화 장르에서 우리가 아는 예술형식이 어떻게 등장했으며 어떤 식으로 분화·전개해갔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개개의 사회가 그 사회의 요구에 최적화된 예술형식을 고안해내고야 마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도 흥미롭다.
두번째는 예술가다. 선사시대의 마술사, 중세의 장인, 르네상스와 낭만주의의 천재, 19세기 보헤미안 등 시대와 함께 변모해온 예술가상은 ‘예술가의 정신적 실존이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위험에 처하기 마련’이라는 저자의 통찰에 근거를 대주며, 사회적 요구와 예외적 욕망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온 예술 주체의 갈등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일례로 17세기 네덜란드의 시민문화는 궁정에 속박돼 있던 예술가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허락했지만, 렘브란트라는 비상한 화가가 부르주아의 고전 취향에서 벗어나는 순간 가차없이 그를 시장에서 버렸다. <야간순찰>에서 말년의 자화상에 이르는 렘브란트 작품들은 부르주아 고객을 만족시키기를 포기한 듯한 그의 실험을 보여준다.
세번째는 수요자 혹은 관객이다. 흔히 예술사에서 걸작(예술작품)과 천재(예술가)에 가리기 쉬운 수요자의 비중을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 이 책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다. 작품을 주문하고 향유하며 예술 생산에 개입하는 것이 한때 귀족이나 성직자 같은 특권계층의 전유물이었다면, 근대 이후 그 저변은 시민계급으로, 20세기 이후 대중으로 점차 확산되었다. 영화를 통해 새로운 대중의 탄생을 실시간으로 목격한 하우저는, 진정한 ‘예술 민주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다수 대중의 현재 시야에 맞춰 예술을 제약하기보다 대중의 시야 자체를 될 수 있는 한 넓히도록 해야 함을 역설한다.
하우저가 예술과 사회를 오가며 수천·수만년의 인류역사를 탐사하는 과정은 ‘예술은 사회적 산물’이라는 말로 단순화할 수 없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미로”에 가깝다(『쥐트도이체 차이퉁』). 그렇기에 누구도 엄두를 내기 힘든, 여전히 “도전적인”(이주헌 『한국일보』 2007.4.25) 작업인 것이다.
고전이란 여전히 우리에게 도전적임을 일깨워주는 책,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미술사가 유홍준, 미술평론가 이주헌, 음악평론가 이강숙, 시인 황지우, 소설가 성석제, 사회학자 노명우, 물리학자 정재승, 영화감독 이창동, 김지운… 한국의 많은 독자들이 신뢰하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이다. 활동영역은 서로 다르지만 하나 접점이 있다. 모두 삶의 어느 한때 『문



김미미
5.0
읽어본 예술사 서적 중 가장 심도있게 예술을 다룬 책. 그전에 예술사서적을 여러권 읽어 둔 바가 있어 큰 기대하지 않았는데 정말 섬세하게 다뤄져있다. 다만 입문서적은 절대 아니다. 기본 지식이 어느 정도 다져진 상태에서 보면 좋은 책이다.
한나스코어
5.0
아르놀트 하우저의 예술저서들에는 의심의 여지가 단 한가지도 없다 다만 예술입문자에게는 접근성부분에서 다소 어려운점을 참고바란다 미학분야에서 최고임
함지아
3.5
한 지평으로 훑다보면 저자의 편견도 사실처럼 나열된다
무재
5.0
선사시대부터 영화까지의 예술을, 자율적 형식이 아니라 계급 구조·생산양식·이데올로기가 응축된 사회적 산물로 읽어내는 거대한 마르크스주의 예술사. 책의 구조를 매우 거칠게 요약해보자면 자연주의(리얼리즘-동적요소-형식파괴-진보-민중)와 낭만주의(이상주의-정적요소-형식존중-보수-귀족)의 이항대립으로 볼 수 있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 같기도 하다. 관점을 벗어난 예외적 사례(크리티)들도 적지 않다고 저자 역시 인정한다.) 구석기 시대의 자연주의 이후 평면적이고, 상징적이며, 형식화되고, 추상적이며, 정신적 존재와 관련된 예술이 사회가 덜 위계적이고 권위적이며, 더 상업적이고 부르주아적으로 변모함에 따라 더욱 사실적이고 자연주의적으로 변모해간다고 설명한다. 허나 끝에 가서는 "자연주의(리얼리즘)란 실상 새로운 관습을 지닌 낭만주의"(4권,p.100)라 규정한다. 현실 재현을 표방하는 리얼리즘조차 특정 계급의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보이게 만드는 하나의 허구적 구성이라고 비트는 것이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자각하고,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19세기 이데올로기들 중 하나로 상대화하는 지점으로 이 책이 단순한 교조적 텍스트가 아니라 자기비판을 내장한 문제적 고전임을 드러낸다.(맑스의 역사철학 전체의 기초가 되는 이론의 핵심은 계급적으로 분화되고 분열된 사회에서는 올바른 사유라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는 통찰이다.-4권,p.331) 저자는 "우리 시대가 가장 간절히 해결하고자 하는 예술과 문학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사회학적인 문제다"라며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라는 제목을 붙였다. '예술은 곧 사회다'라는 그의 극단적인 명제는 거칠고, 낡았지만 예술의 전역사를 관통하는 강력한 시각임에는 틀림없다. 우리는 이를 '고전'이라 부른다. p.s.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권》 p.272 낭만주의와 유물론적 역사관의 비교에 관한 저자의 생각(마르크스의 헤겔 비판이지만)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 낭만주의의 '유출설'적 역사철학 낭만주의의 해석학적 기술, 역사적 상관관계에 대한 통찰력, 역사에서 문제적인 것과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에 대한 감수성, 이러한 것들과 더불어 우리는 또한 낭만주의로부터 역사적 신비주의, 역사적 힘의 인격화와 신비화, 다시 말해 역사적 현상들이란 독립적인 원리들의 기능이자 발현이며 구체화일 뿐이라는 생각을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누군가는 이런 사고방식을 의미심장하고도 그럴법하게 '유출설(emanation, 초월적 절대자에서 각 존재가 전개되어 현실세계를 완성한다는 학설)적 논리'라고 규정했는데, 이 규정은 추상적 역사관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런 사고방식을 자체에 내포하고 있는, 흔히는 의식되지도 않는 형이상학을 암시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역사는 알 수 없는 미지의 힘들이 지배하는 영역처럼 보이며, 개개 현상들 속에서는 불완전하게밖에 표현될 수 없는 한층 높은 이념들의 토대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런 플라톤적 형이상학은 국민정신, 국민 서사시, 국민문학과 기독교 예술 등에 관한 이미 낡은 낭만주의 이론들 속에서뿐만 아니라 리글(A. Riegl, 1858~1905. 스위스의 예술사가)의 '예술의욕'(Kunstwollen) 개념에도 그대로 나타나 있다. 왜냐하면 리글도 개념을 절대화하는 낭만주의의 개념신비주의와 정령적 역사관의 마력에서 아직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 시대의 예술의욕을 마치 일종의 행동하는 인격체처럼 간주해서, 이 인격체가 흔히 가장 강력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고 또 때로는 그 예술의욕의 담당자도 모르게, 심지어 그의 의사에 반하면서까지 자기를 관철한다고 생각한다. 리글에게 역사상의 여러 양식은 독립적인 개체들, 다른 어떤 것과도 교환될 수 없고 비교될 수 없으며 생성과 사멸의 과정을 거쳐 다른 하나의 개별 양식으로 교체되는 독립적인 개체들로 여겨진다. 예술사를 그 자체의 기준에 의해 평가받기를 원하고 그 가치를 자신의 개성에 두는 그런 양식현상들의 병렬이자 잇따른 발생으로 보는 견해는 어느 의미에서 역사적 힘을 인격화하는 낭만주의 역사관의 가장 순수한 본보기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인간 정신이 만들어낸 가장 중요하고 포괄적인 창작물들은 결코 처음부터 정해진 하나의 목표를 향해 곧장 나아가는 일직선적 발전의 결과는 아니다. 호메로스(Homeros)의 서사시도 아테네의 비극도, 심지어 고딕의 건축양식과 셰익스피어의 예술도 단일하고 명확한 예술적 의도의 실현이 아니라, 시간적 공간적으로 규정된 특수한 욕구들과 일련의 부적당한 기존 수단들이 한데 어울려 생긴 우연의 결과이다. 바꿔 말하면 정신적 산물이란 점진적인 기술의 혁신(이 혁신은 본래 의도했던 목적에 가까워지면 본래의 의도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때그때의 순간적인 동기, 갑자기 떠오르는 착상, 본래의 예술적 과제와 때로는 전혀 아무런 관계도 없는 개인의 체험들이 어울려 생겨나는 산물이다. 예술의욕 이론은 이처럼 전혀 비통일적이고 이질적인 발전의 최종 결과를 주도적인 이념이라고 실체화하고 있는 것이다. '고유명사 없는 예술사'(뵐플린의 예술사관에서 핵심 범주.)라는 학설 역시, 바로 그것이 기본요인으로서 현실의 인간들을 예술발전에서 제거해버리기 때문에 역사적 힘들을 인격화하고 개념을 실체화하는 역사 형이상학의 또 하나의 형태일 뿐이다. 이 역사 형이상학을 통해 예술의 발전사는 고유한 내적 생명원리를 따르는, 그리고 마치 동물의 육체가 개별 기관들의 독립을 용납하지 않는 것처럼 독자적 예술가들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는 하나의 과정이라는 성격을 획득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역사적 유물론에 관해서, 정신적 산물 속에는 일정한 시점의 생산수단의 특징이 표현되어 있을 뿐이라든가 역사에서 경제적 현실이란 마치 이상주의 역사철학의 의미에서 '예술의욕' 혹은 '내재적 형식법칙'처럼 절대적 지배권을 갖는다는 식으로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여기에서도 실제 현실에서는 훨씬 더 복잡한 역사과정을 낭만화, 단순화하고 유물론적 역사관을 유출설적 역사논리의 한 단순한 변형으로 만들어내는 셈이 된다. 역사적 유물론의 진정한 의미와 낭만주의 이래 역사학에서의 가장 중요한 진보는, 역사발전의 원천이 형식원칙이나 이념, 실체나 본질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발전은 하나의 변증법적 과정을 나타낸다는 통찰에 있다. 역사발전의 근원을 형식원칙이나 이념에 두는 이상주의 역사관이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비역사적 실체의 '변형'만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면, 유물론적 역사관은 모든 요인들이 항상 유동적이고 의미가 변천하며, 정적인 것과 무시간적 보편성뿐만 아니라 일방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요인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물질적·정신적인, 경제적·이념적인 일체의 요인들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이 상호 의존관계로 맺어져 있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인식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어떤 상태의 근원이 이미 그런 상호 작용의 결과가 아닐 만큼 시간적으로 멀리 소급해 올라간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아무리 원시적인 경제라도 그것은 이미 조직화된 경제로서 이런 사실은 물론 경제를 분석함에 있어서 우리가 정신적 조직형태와는 반대로 독립적으로 주어져 있고 그 자체로 파악 가능한 물질적 전제조건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과 결코 모순되지 않는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권》 p.43 합리주의(인간을 위한 예술)와 심미주의(예술을 위한 예술)간의 긴장 그리고 예술작품의 의미에 대한 저자의 견해는 가히 이 책의 백미다. -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을 위한 예술'은 의심할 여지 없이 미학상 가장 복잡한 문제를 다룬다. 미학적 입장에 내재하는 이원적 속성을 그처럼 날카롭게 나타내는 것은 없다. 예술은 그 자체가 목적인가, 아니면 어떤 목적에 이르는 수단일 따름인가? 이 질문은 자기가 처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뿐만 아니라 예술의 복합적 구조의 어떤 요소에 주안점을 두느냐에 따라서 여러가지로 대답이 달라질 것이다. 예술작품은 유리 자체의 구조나 투명도, 색깔과는 관계없이 다만 그것을 통해 인생을 관찰할 수 있는 유리창에 비교되어왔다. 이 비유에 따르면 예술작품은 관찰과 인식의 단순한 도구, 즉 그 자체로는 이해관계가 없으면서 어떤 목적을 위해서 수단으로만 봉사하는 창유리나 안경 같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창문 저쪽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주의를 빼앗기지 않고 창유리의 구조에만 시선을 고정할 수 있다면, 예술작품은 또한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는 자립적 형식체로, 그 자체로 완결된 의미의 결합체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 경우 '창문를 통해서 내다보는 것'은 언제나 그 내적 구조를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예술작품의 의미는 줄곧 이 두 관점 - 생활과 모든 작품 외적 현실에서 단절된 하나의 존재라는 관점과, 생활과 사회와 실제에 의해서 제약된 하나의 기능이라는 관점 - 사이를 왕래한다. 직접적인 미적 체험의 입장에 서면 자주성과 자족성이 예술작품의 본질처럼 보이기 마련인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에서 예술을 분리시키고 현실의 자리에 예술을 대체함으로써만, 즉 총체적이고 자율적인 하나의 우주를 형성함으로써만 하나의 완전한 환영을 만들어내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환영은 결코 예술의 전체 내용이 아니며, 때로는 예술이 주는 감명과 전혀 무관할 수도 있다. 가장 위대한 작품이란 그 자체로 완결된 미학세계의 전반적인 환각주의(illusionism)를 거부하고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먼 곳글 향한다. 그것은 자기 시대의 커다란 인생문제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언제나 '인간 존재에서 어떻게 의미를 얻어낼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 의미에 참여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의 해답을 추구하는 것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4권》 p.45 자연주의는 낭만주의의 연장이자 그 해체다. 자연주의는 동일한 자연 개념에 확고하게 근거를 둔 단일하고 명백한 예술관이 아니라, 수시로 변모하면서 그때마다 일정한 목적과 구체적 과제를 지향하는, 그때그때 특별한 현상에 초점을 두는 인생 해석이다.
프로낮잠러
4.0
4권 '영화의 시대'만 발췌독 시간의 부단한 굴절과 변동을 통해, 영화 감상체험의 본질을 이루는 가동성(mobility)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시간의 참된 공간화는 평행하는 플롯들의 동시성이 묘사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우리는 공간적으로 떨어져 일어나는 두개 또는 그 이상의 각기 다른 사건들을 동시적으로 체험할 때 비로소 시간과 공간 사이로 움직이며 시간적 질서와 공간적 질서의 범주를 모두 요구하는 일종의 부동상태에 들어간다. 사물이 멀고도 동시에 가까운 상태, 시간적으로 서로 가까우면서 동시에 공간적으로는 먼 상태에서 비로소 시간과 공간의 내적 결합이 이루어지는데, 바로 이 시간과 공간의 통합 ㅡ 또는 말을 바꾸면 시간의 2차원성ㅡ이야말로 영화 본연의 세계며 영화적 대상 성립의 기본 범주가 되는 것이다. (368)
ssah
3.5
4권 - 19세기 유럽 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ㅂㄴㅊ ㅇㅁㅇ 센세의 번역이 오랜건지 원래 이렇게 까다로운 텍스트인지 모르겠지만. 뭐랄까.. 형식적 안정성이나 탁월성보다도 ‘리얼리즘의 승리’에 연장선에 있는 알고보니 ~ 체제비판 중인 작가가 아니면 지면을 할애하고 싶어하지도 않는.. ‘사회사’적 시각이 일관되게 탑재되어 있어서 좋다 화려한 부르주아 예술이나 태평한 연애소설 같은 건 혐오하는. 사조 그 자체에 대한 이해보다는 일요써클의 하우저가 어떤 양반이었는지 이해해보는 시간 물론 얼마나 많이 읽었겠냐만은 문예사조 몇세기의 흐름은 단숨에 진단 내리는 야심만만한 문체를 보면 신기하다 전기적 사실들만 나열해도 균열은 있을 테니 완전한 완전성이나 온건한 온건성 같은 환상은 일찍 버려야겠으나 그럼 뭘믿고 가는거냐 싶은거다 영국으로 망명하고 원고를 완성하기까지 10년을 인내하려면 음청난 자기확신이 필요했을 것 같음 타임머신 발명되면 저 시기로 돌아가서 세계사복판의 좌파백인남성지식인의 야심만만 좀 얻어오고싶다네
Duque
Re-read (2nd reading)
오보현
4.0
어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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