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양기연

양기연

8 years ago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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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사에서 구조된 부뒤

영화 ・ 1932

평균 4.0

게임의 규칙을 쥐고 흔들며 온갖 경계를 허물던 그가 다시 물어 뛰어들었다 나오는 순간, 그의 게임판 흔들기는 관객에게까지 확장되어 온다. . (2013.3.30.) (스포일러) . 영화가 시작되면, 서점을 운영하는 부르주아 에두아르가 가정부이자 정부인 안느 마리에게 온갖 인용으로 점철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있다. 신화 속 인물까지 인용해 가며 사랑을 속삭이던 그들의 모습이 디졸브를 통해 어떤 흉상의 클로즈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화면이 바뀌면 우리는 그 흉상이 그 집 안의 장식품임을 알 수 있다. . 그 흉상이 사실상 살아 있는 실체가 아닌 어떤 실체의 죽어 있는 모사라고 생각할 때, 영화가 인용으로 잔뜩 포장한 밀어를 속삭이는 에두아르와 안느 마리의 얼굴을 디졸브로 자연스레 흉상 클로즈업으로 옮겨가는 이 장치는, 어쩌면 에두아르의 말들이 진정한 감정의 발로가 아닌 껍데기 뿐인 말들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준다. 나아가 그 흉상 클로즈업이 집의 구조로 이어지게 함으로써 영화는 이 '껍데기만을 중시하는 풍조'가 이 집 안을 지배하는 논리임을 미리 예고하고 있는 셈이다. . 에두아르와 그의 아내 엠마, 정부 안느 마리의 이야기가 '그 집 안에서' 진행되는 와중에, 영화는 거렁뱅이 부뒤의 이야기를 '집 밖의 공간에서' 병렬적으로 진행시키기 시작한다. 부뒤는 사람들에게 경멸의 대상, 싸구려 동정의 대상으로 취급당하며 이곳저곳을 전전하고, 그 와중에 그의 유일한 친구인 개가 사라진다. 부뒤가 그 개를 찾도록 도와주는 이는 하나도 없고, 결국 부뒤는 물에 빠져 죽으려 한다. . 이 때 처음으로 집 안의 세계와 집 밖의 세계가 이어 붙는다. 망원경으로 집 밖의 여자를 관찰하던 에두아르가 물에 빠진 부뒤를 목격하고 그를 구한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집 밖의 빈민층'인 부뒤를 '집 안 부르주아의 세계'로 데려온다. 그 순간부터 '집 안 세계'의 사람들과 '집 밖 세계'에서 온 부뒤 사이의 충돌이 시작된다. . 집 안의 부르주아들은 부뒤를 '야만'으로 타자화하며 그에게 새 옷을 입히고 예절을 교육하려 하며, 자신들은 생명의 은인이니 감사할 줄 알라 말한다. 그러나 부뒤는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왜 자신을 살려주었냐고 되물으며 집 밖 세계에서 체득해 온 습성대로 행동하는 와중에 공교롭게도 껍데기 뿐인 집 안 세계를 해체해 가기 시작한다. 부뒤에게 '야만적'이라 말하면서도 실상 욕정과 물질에 물들어 그 이면에 또다른 '야만'을 품고 있는 그들에게, 부뒤는 자신이 야만적이라면 그들 역시 다를 바 없다고 말하는 듯 하다. 그는 남에게 잘 보이고 으스대기 위한 인용 및 소장의 대상 혹은 판매와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한 책들에 침을 뱉고, 구두를 닦고 외출하라는 말에 오히려 구두 닦을 도구를 찾는다는 명목 하에 집 안을 잔뜩 더럽혀 버린다. 또한 그가 집안 사람들의 제안에 이발을 하고 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부르주아인 에두아르를 모방하듯 에두아르의 아내 엠마와 불륜을 저지르는 일이다(처음에는 부뒤를 거부하던 엠마가 그와 섹스를 나눈 뒤에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돌변해 그 밑바닥을 여지없이 까발려 보여준다.). 나아가 그는 우연히 사자대면 상황을 만들어 집 안 사람들로 하여금 그 집 안의 추악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 그 사자대면에 이르는 과정에서 눈여겨 볼 만한 부분이 있다. 에두아르가 서점을 비워두자 부뒤가 대신 그 서점을 지키게 되는데, 이때 손님 한 명이 찾아와 보들레르의 '악의 꽃' 초판본을 찾는다. 부뒤는 '여기는 꽃집이 아니라 서점'이라며 그를 내쫓는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 '식민지 박람회'를 홍보하며 지나가는데, 부뒤는 그 식민지 박람회라는 말에 이끌려 달려나간다. 부뒤는 왜 '식민지 박람회'에 이끌린 것일까? . 제국주의 국가들은 약소국을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옥죄어 자생이 힘든 상황으로 몰아가는 한 편, 종교, 교육, 문화 등을 이용해 그 국민들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해 가며 접근해 서서히 식민지로 만들어간다. 또한 그 과정에서 그들은 식민 대상에 '낙후', '야만' 등의 이미지를 덧씌우고 자신들의 식민 행위가 약소국 근대화를 위한 선의의 행위라 주장한다. 영화 속에서 부뒤 역시 사람들의 외면, 경멸, 값싼 동정에 시달리던 와중에 유일한 친구인 개까지 사라져 버리는, 혼자 살아가기 힘든 극단적인 상황에 이른 상태였다. 부르주아들이 빈민층을 대하는 태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음에도, 그 부르주아들은 그를 다시 구해 놓고 마치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대하듯 그에게 감사를 강요하며 그를 '야만인'의 이미지를 덧씌우고 그를 자신들의 방식으로 교화하려 드는 것이다. 그 와중에 부뒤는 식민지 국민들이 그렇듯 어떤 면에선 자신을 교화하려 드는 부르주아들의 논리를 재생산하는가 하면 어떤 면에선 그에 반항하기도 한다. 즉, 집 안 세계의 부르주아들과 부뒤의 관계가 그 자체로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의 은유이며, 영화는 이를 '식민지 박람회'의 언급으로 드러낸 것이다. . 부뒤가 식민지 박람회를 보러 서점을 떠나자 에두아르가 다시 돌아온다. 돌아온 에두아르가 안느 마리와 방 안에서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 때 부뒤가 돌아오고, 엠마는 에두아리와 안느 마리가 함께 있는 그 방문 바로 밖에서 부뒤를 유혹한다. 이때 엠마를 부뒤가 피하는 중에 우연히 사자대면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부뒤와 에두아르가 서점 문 근처에 머무르는 프레임 상에서 자리를 바꾸고, 그 뒤 방 안팎으로 에두아르-안나 마리 / 부뒤-엠마의 상황이 겹친다는 점에서 이 장면은 빈민층 출신인 부뒤와 부르주아인 에두아르가 결국 근본적으로 같음을 드러내는 장치라고 볼 수 있다. . 한 편, 영화는 음악을 도구 삼아 영화 속에서 '집 안', '집 밖'으로 구분되고 그 집 안에서도 다시 가정 내 위계 질서에 따라 분화된 인물들이 그 계급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똑같은 인간임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같은 혹은 유사한 곡조의 음악을 끊임없이 등장시키는데, 그 등장 양상은 다양하다. 우선 옆집 청년의 악기 연주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인물들이 창을 통해 그 청년을 바라보는 장면들을 이어붙임으로써 그 시선을 통해 여러 인물들이 동일시되는 효과를 낳는다. 더불어 비슷한 곡을 부뒤의 노래, 에두아르의 피아노 연주, 안느 마리의 노래 등으로 등장시킴으로써 다시 인물들을 한 데 묶어내기도 한다. 즉, 영화는 음악을 매개 삼아 극중 인물들에 있어 그 겉으로 보이는 위계에도 불구하고 그 실질적인 경계를 모두 허물어 버리는 것이다. 게다가 영화는 이에서 그치지 않고 부뒤와 엠마의 정사 중 악기를 연주하는 소년의 그림을 클로즈업하는 와중에 배경음악으로 그 곡을 등장시키더니 이윽고 집 밖에서 악단이 그 곡을 연주하는 장면을 이어붙이는 등, 극중 세계의 외부와 내부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데 음악을 이용하기도 한다. . 영화의 결말부에 이르면, 부뒤가 십만 프랑 복권에 당첨되자 그때까지 부뒤를 거부하던 안느 마리가 그 속물적인 속을 드러내고, 결국 둘은 결혼하기에 이른다. 그토록 원하던 안느 마리와의 결혼이건만, 부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한 편,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느 마리와 사랑을 속삭이던 에두아르는 이제 안느 마리와 부뒤의 결혼을 축복하며 주례사를 하기까지 한다. 영화 첫 장면에서 사랑의 밀어를 속삭일 때 에두아르는 안느 마리가 프리아포스 신이 흠모하는 클로에라 말한 바 있는데, 주례사 장면에선 에두아르가 직접 부뒤를 프리아포스 신이라 칭하기도 한다(검색해 보니 프리아포스는 번식과 다산의 상징으로 거대한 성기를 가진 모습으로 묘사된다고... 부뒤와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복권으로 자본을 갖추자마자 그때까지 교화의 대상이었던 부뒤가 일순간에 결혼에 성공하고 자신을 교화하려던 바로 그 부르주아에게서 신에 비유되며 축복받는다. . 장 르누아르의 또 다른 영화인 '게임의 규칙'에서 부르주아 사회의 외부자로서 등장했던 주인공은 그 위선을 까발리는 하룻밤의 게임에서 일종의 촉매 역할을 하지만, 그 게임에서 드러낸 감정을 다시 위선으로 가리는 대신 현실로까지 끌고 가려 했던 탓에, 다시 말해 '게임의 규칙'을 제대로 체화하지 못한 탓에 죽음에 이르고 만다. 그러나 '익사에서 구조된 부뒤' 속 부뒤는 부르주아 사회의 외부자로서 등장해 그 위선을 까발리는 게임의 촉매 역할을 한다는 점에선 같지만('게임의 규칙' 하니 생각난 건데, '게임의 규칙'에서 새 소리를 모방하는 기계 장치에 매료된 저택 주인의 모습은 '익사에서 구조된 부뒤'에서 봄이면 살아나는 새에 대한 노래를 부르며 새 박제를 닦는 안느 마리의 모습과 겹친다.), '게임의 규칙'의 주인공과 달리 그 규칙을 체화하지 못해 죽음으로 도태되는 대신 돈에 힘입어 게임의 규칙을 틀어쥐고 흔들 수 있는 위치에 선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 그러나 그 주체적 위치에 섰을 때, 부뒤는 물에 떠 있는 꽃잎을 집으려다 다시 물에 빠지는 길을 택한다. 죽은 척 둥둥 떠서 흘러가던 그는 부르주아들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헤엄쳐 뭍으로 나오더니, 자신이 입은 비싼 옷들을 내던지고 허수아비가 입은 거적대기 같은 옷들을 입고는 근처에 누워 있던 사람에게서 빵을 얻어먹는다. 영화 초반에 개 한 마리가 그의 곁에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염소 한 마리가 그에 곁에 있다. 그리고 개가 떠났던 것처럼 염소도 그의 곁을 곧 떠나지만, 부뒤는 이제 그를 찾으려 전전긍긍하는 대신 홀로 누워 이전의 그 곡을 다시 흥얼거린다. 영화 초반에 부뒤가 물에 빠졌다가 구출되었을 때 마치 한 번 죽었다가 집 밖의 영역의 빈민층에서 집 안의 영역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듯한 모습을 보였던 것처럼, 이때도 그는 마치 부르주아 세계 속 주체적 위치로서의 자신을 죽이고 다시 빈민층으로 재탄생한 듯 보인다. . 즉, 부뒤는 한 번의 부활을 통해 부르주아의 세계를 관통할 기회를 얻은 바 있지만, 막대한 돈을 통해 그 세계에서 주체적 위치를 확보하고 다시금 선택의 기회를 얻자 아이러니하게도 그 위치를 고수하기보단 다 버리고 처음의 자신으로 돌아가길 택한 것이다. 집단 밖의 타인을 '야만'이란 이름 아래 타자화하고 교화하려 드는가 하면, 그 세계 내부는 돈 하나로 모든 것이 가능하며 순 껍데기 뿐이기에 공허한 그 '집 안의 공간'에 아마도 그는 큰 환멸을 느낀 듯하다. 다시 집 밖의 세상으로 나온 그는 비로소 다시 제 자리를 찾은 듯 행복해 보인다. . 부뒤가 드러누워 노래를 부르는 바로 그 장면에서 한 번 컷이 이루어지고, 화면은 이제 긴 패닝을 통해 가교를 쭈욱 훑으며 보여주곤 다시 컷하더니, 다른 쪽 언덕에 단체로 모여 앉아 있는 부르주아들을 비춰 준다. 그들 역시 함께 물에 빠졌던 터라 지금은 모두 속옷만을 입은 채 몸을 녹이고 있다. 결국 그 패닝을 통해,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의 그 값나가 보이는 옷들을 모두 제거한 그 상황을 통해 영화는 다시 한 번 부뒤와 부르주아들을 동일선상에서 엮어내며 극중 인물들 간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다시 한 번 컷, 이번에는 빼뚜름하게 위치를 잡은 프레임을 여러 명의 노동자들이 지나간다. 그리고 그들은 이미 영화를 통해 익숙해진 바로 그 멜로디에 다른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부르며 화면을 지나간다. 지금껏 영화에 등장한 바 없는 인물들이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야 갑자기 떼거지로 등장해 영화를 관통하는 바로 그 곡을 부른다. 그 음악이 영화 속 인물들 간의 경계를 허물고 영화 안팎의 경계를 허무는 역할을 한다고 볼 때,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만 등장하는 그 노동자들은 차라리 영화 안의 인물들이라기보단 영화 밖의 인물들, 관객들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만들어졌던 1930년대에는 제국주의 시대를 그대로 함께 통과해 오며 자국의 식민 지배 정당화 논리를 그대로 수용했을 당대의 프랑스 관객들은 이처럼 관객에까지 손을 뻗어 오는 경계 허물기 시도에 꽤 많이 속이 쓰렸으리라. 그러나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있어서도 작품의 그러한 시도는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가 경멸했을 혹은 비웃었을 얼굴들이 결국엔 우리의 얼굴이라는 불편한 진실. 장 르누아르는 자신의 연출에 있어서의 놀라운 역량으로 관객들이 작품에 자연스레 녹아들도록 하였고, 그 몰입 한복판에서 비수를 꽂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