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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한 섬, 그곳을 관리하는 고위공무원 드 롤러가 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섬에는 핵실험이 수십년 만에 재개될 것이란 이야기와 함께 여러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 롤러는 섬의 주민들과 다른 관료들, 군인과 외국인 사이를 오가며 소문의 정체를 파악하고 자신의 입지와 섬의 안정을 모두 챙길 수 있는 방향을 찾으려 한다. 이렇게 적으면 <퍼시픽션>은 태평양의 작고 아름다운 섬에서 벌어지는, 어딘가 급박한 정치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영화는 느리다. 무지하게 느리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압축"을 수행하는 예술이지만, 차이밍량이나 라브 디아즈 등의 감독들은 느림을 영화에 복각시키는 작업을 수행한 바 있다. 알베르 세라의 영화들도 종종 그래왔다. <루이 14세의 죽음>은 루이 14세가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시간을, 마치 관객도 그 시간을 견디며 함께 죽어가길 바라는 것처럼 담아냈다. <퍼시픽션>의 관객은 롤러와 함께 무기력 속으로 침잠한다. 국방력을 과시하기 위한 비밀작전, 폴리네시아 식민지를 착취하는 외부의 권력, 그 권력과 주민의 이익 사이에서 바쁘게 자리를 오가지만 무엇 하나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상황, 그야말로 바다속의 잠수함처럼 그것의 존재를 알 수는 있으나 볼 수는 없는 힘과 힘의 투쟁. 이제는 '슬로우 시네마'라는 명명도 어딘가 낯간지럽게 느껴지긴 하지만, <퍼시픽션>은 너무나도 빠른 지하수의 움직임을 알지 못하는 지상의 인간들을 우롱하듯 그들을 정교한 '느림' 속으로 밀어 넣는다. 너무나도 느릿하게 감각되지만 모든 것이 재빠르게 진행되는 곳, <퍼시픽션>은 우리를 마비시키는 정치의 감각을 그대로 옮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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