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zerkalo

zerkalo

2 years ago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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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카마츠 이야기

영화 ・ 1954

평균 3.9

2024년 02월 11일에 봄

초반부에 어느 집안의 마님과 하인이 발각된 통정으로 처형당하는 장면이 나오는 순간 영화가 향할 결말은 쉽게 짐작된다. 이렇게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들은 운명론적인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셰익스피어와 닮은 부분이 있다. 그리고 미조구치의 영화 속 비극들은 주로 남성을 돕기 위한 여성의 희생에서 비롯된다. 이 영화 속 비극의 출발점 역시 오상이 오빠의 빚을 갚아주려던 것이었다. 가족을 위한 여성의 희생이란 주제는 감독의 대표작 대부분에 등장하고 있는 주제이다. 그런데 <치카마츠 이야기>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결말에 있다. <마지막 국화 이야기>(1939), <우게츠 이야기>(1953), <산쇼다유>(1954) 등 다른 많은 영화들의 결말은 주로 여성의 희생을 발판 삼아 성장한 남성의 새출발을 그린다. 반면 <치카마츠 이야기>에서 오상과 모헤이는 서로를 놓지 않는다. 양쪽 모두 사랑을 위해 본인을 희생하는 대신, 죽더라도 끝까지 함께하는 길을 선택한다. 결말에서 처형대로 끌려가는 둘은 미소를 품고 있다. 그들의 죽음은 브레송의 영화들 속 발타자르와 무쉐뜨의 죽음이 그러했듯 어딘가 구원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구원은 평소처럼 남성만의 몫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 모두의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한편 미조구치의 영화를 논할 때 촬영에 관한 부분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영화에서 역시 주특기인 롱테이크 트래킹 숏과 크레인 숏 등이 매우 아름답게 쓰이고 있는데, 가장 감탄스러운 것은 물가에서의 촬영이다. 영화 중반 물가에서, 원래 동반 자살을 결심하고 배에 올랐던 오상과 모헤이는 그곳에서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확인하고 삶에 대한 의지를 되찾아 나온다. 짙게 안개가 낀 물가는 그렇게 죽음의 공간에서 삶의 공간으로 단번에 변모하며 영적인 분위기마저 풍긴다. 미조구치는 이러한 연출을 손쉽게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무이한 감독이다. (<우게츠 이야기>와 <산쇼다유>의 물가 신들도 굉장한데, 이는 미조구치를 동경했던 타르코프스키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