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나브로

와서 직접 봐봐
평균 3.3
"와서 직접 봐봐" 기예르모-수산나 커플이 엘레나-데이빗 커플을 본인들의 집으로 초대하면서 건네는 대사이기도 하면서, 본 영화가 트레일러에서까지 일말의 단서마저 공개하길 거부한 채 던지는 도발적인 문구이기도 하다. 데이빗의 말처럼 어찌 보면 이 대사는 교조적인 어투를 풍기기도 한다. "와서 직접 봐야"한다는 말은 곧 경험 없이 스스로의 직관과 사유만으로는 완벽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는 선언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경험이 정말 완벽한 이해로 직결되는가? . 영화는 음악을 감상하고 있는 네 명의 주요인물들을 한 명씩 개별적으로 비추며 시작한다. 음악이 다 끝나고 컷이 전환된 후에야 이들이 같은 테이블에 앉은 일행이며 커플들끼리 앉아있는 것이라는 인물 간 관계에 대한 정보가 밝혀진다. 이는 마치 인물들 간의 상호관계 이전에 개별자들이 선행하여 존재함을 말하는 것만 같다. 내용 면에서 살펴볼 때에도 비록 데이빗은 기예르모-수산나 커플의 권유로 이들과 같이 공연을 관람하긴 하였으나, 그들만큼 긍정적인 감상에 도달하진 못하였다. 공연을 "와서 직접 봐보라"는 그들의 부름에 응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빗의 감상은 기예르모-수산나 커플의 감상으로 수렴하지 못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이 총체적인 경험은 개별자들 사이의 간극을 강조한 채 막을 내리게 된다. . 이후 공연장을 떠나는 이들을 바라보며 입혀지는 내레이션처럼, 타인과의 관계를 대하는 우리의 정서가 본질적으로 얄팍한 것이기에 타자와의 동화란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을 공유하였음에도 권태롭게 비춰지는 초반부 엘레나-데이빗 커플의 모습이 마치 이를 뒷받침하는 듯하다. 심지어 화목해보이던 기예르모-수산나 커플 또한 뒤에서 밝혀지듯 출산을 앞둔 마음가짐에서 불일치를 보인다. 이렇듯 경험의 공유에도 불구하고 개별자마다 감상이 다르게 분기하는 동상이몽의 현장에서, "와서 직접 봐보라" 한들 객이 초대자의 의도대로 스스로의 감상을 조형하겠는가? 같은 문구를 듣고도 누군가는 "환경오염"을, 누군가는 "친우를 소중히 하는 마음"을 읽어내는 마당에, 어떻게 개인의 면역작용이 세계적/범인류적인 면역작용으로 확장될수 있겠는가? . 하지만 이처럼 감상의 다원성이 당연시되는 세태에서 우리가 단일하고 확정적인 진리만을 믿어야하는 이유는 또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가 저 내레이션이 말하는 대로, 엘레나의 책이 설파하는 대로 맹목적으로 믿어야만 하는가? 그 글귀들 또한 어떠한 경험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제시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기에, 그 감상을 취사선택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몫이 되는 것이다. 혹자는 "어떠한 예술은 완전한 상태보다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것이 이상적이다"는 글귀를 보고 감상자 본인의 독특한 감상이 예술을 완성시키는 것이라는 격언을 스스로 읽어내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럼에도 자신은 여전히 예술의 힘을 믿는다는 강직한 선언을 내뱉기도 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결의 반응임에도 양쪽 모두 삶과 예술을 예찬하는 얼마나 고귀한 감상들인가! . 바로 이 지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처음에 찾고자 하였던, 반드시 "와서 직접 봐야"만 하는 정당성이 갖춰지는 것이다. 경험의 공유가 강조되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단일하고 절대적인 "이해"의 필요조건이 되기 때문이 아니다. 경험이 공유되어야 무엇이든 시작될 수 있다. 그것이 견해의 극적인 일치가 되었든, 열띤 항변과 논쟁이 되었든, 공통된 현상에 기반을 두어야지만 타자 간 논의가 성립될 수 있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끝나도 어떠랴? 인물 간 관계성이 삭막하게만 느껴졌던 1부에 비한다면, "와서 직접 보라"는 권유에 엘레나-데이빗 커플이 응했기에 성립될 수 있었던 2부에서 네 명의 개별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조잘대던 광경이 훨씬 더 활기차 보이지 않는가? 결국에는 각자가 자신만의 견해에 고착된 채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한이 있더라도, 공통된 외재음이 지배하는 풍경에 머무르며 인물들이 계속 서로 어우러져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의 감상이 필연적으로 분기할 수 밖에 없음에도, 창작자가 자신의 얼룩진 렌즈를 통해 끊임없이 불완전한 예술을 조형함으로써 감상자들에게 도전하고, 우리가 예술을 두고 이를 맞부딪혀가며 토론해야 하는 이유와도 같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