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서 직접 봐봐
Tenéis que venir a verla
2022 · 코미디/드라마 · 스페인
1시간 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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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트 버진>(2020)의 호나스 트루에바의 신작 <와서 직접 봐봐>는 젊은 지식인들의 불안과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까지의 힘든 순간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스냅숏이다. 30대 커플인 엘레나와 다니엘은 클래식 콘서트에서 만난 친구 커플로부터 마드리드를 떠나 교외에서 살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6개월 후, 엘레나와 다니엘은 기차로 30분 떨어진 시골로 그들을 방문하러 떠난다. 마드리드를 향한 무한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도시에서 행복한 걸까? 시골에 안착한 커플은 남들에게 과시하는 것만큼 새로운 환경에 만족하고 있을까? 미니멀한 상황, 고정 슛, 가끔 길고 당황스러운 대화는 호나스 트루에바를 마드리드에 거주하는 홍상수 감독의 사촌 동생쯤으로 만든다. 감독은 아름답고 신비로운 방식으로 도시와 시골, 디지털과 필름을 대비시키며 작지만 큰 영화 하나를 완성했다. (서승희) [2022년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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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y Oh
3.5
와서 보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 Because that's just the first step. 첫 장면, 연주를 바라보는 눈빛들이 서로 확연하게 달라보였는데, 후반부 책 내용에 대한 반응들을 볼 때서야 다시 그 눈빛들이 떠올랐다. 두 개의 시간 속 각 인물이 위치한 두 점을 보여주고, 이를 잇는 선들을, 그 각자의 삶을 보이게끔 배치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아무리 어떠한 시작점을 공유한들, 그 후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내게 소중한 것이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마저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점만 보아도 그렇다. 이 영화는 어쨌든 또 하나의 시작점을 만들어주었다.
권영민
3.0
'그럴 것이라 적당히 예상하고 속단하는 것'과 '와서 직접 보고 판단하여 결론내린 것' 사이에서 얼핏 차이가 없어보이겠지만 결과보단 과정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생각의 일치란 애초에 불가능하지만, 경험의 일치에서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 와서 직접 보고 나서야 타인과 제대로 얘기할 수 있는 장이 열린다. . . 다소 현학적인 대사들과(대개는 굳이 이해할 필요까진 없어보이지만) 다분히 편의적으로 느껴 지는 내레이션의 삽입은 영화적 매력을 떨어트린다고 생각한다. 그런 부분들은 책과 같은 텍스트로만 받아들일 때 더 매력적이었을 것 같다. 비교대상이 좀 가혹할지는 몰라도, 홍상수의 영화가 훨씬 더 세련되고 재밌다는 생각이 들게 해준다.
JE
3.5
연주곡을 소개하는 보이스 오버가 들리고, 그 아름다운 연주를 감상하는 인물의 얼굴로부터 영화가 시작한다. 몇 분인가 지나면 연이어 다른 인물들도 차례로 비춰지는데, 알고 보면 모두 일행이다. 기본적으로 음악 선율이 마음을 사로잡기도 하지만,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듯 미묘한 표정들을 한 이 알 수 없는 오프닝에 완전히 마음을 뺏겼다. 이후의 이야기가 오히려 아쉬워질 정도. 돌연 '영화'의 바깥으로 향하는 엔딩 역시 묘한 위안을 안기는 아름다움과 흥미로움이 있음에도 결국 마음은 오프닝을 향한다. 철학적인 대사마냥 영화가 그려내는 어떤 실존의 스케치들을 다 주워담진 못하겠으나, 고독함을 비롯한 시큰한 관계의 풍경이 느껴지는데, 오프닝은 바로 그런 감각의 집약이다. 같은 테이블에 있지만 따로인 양 홀로 숏 안에 자리하고, 반대로 프레임으로 분리되어 있어도 슬쩍 걸쳐진 신체 부위(어깨)나 아웃포커싱 등이 옆사람의 존재를 은근히 암시한다. 그러면서도 각자의 숏 안에서는 알기도, 설명하기도 어려운 저마다의 미묘한 정동을 드러낸다. 분리, 단절과 같은 어떤 팬데믹의 감각을 닮아 보이기도 하면서, 결국 함께해야 하는 공동체 같기도 하며, 그 안에 놓인 개인의 모습도 보인다. 함께 또 각자, 따로 또 같이라는 것. 그런 와중에, 이들을 나누는 것도 프레임이란 예술이고, 이어내는 것도 음악이란 예술이 된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대사들이 등장하면서도 현실적인 문제와도 닿는 <와서 직접 봐봐>를 어떻게 소화해야 할진 잘 알지 못하지만, 쓸쓸하고도 아름다운 오프닝만큼은 분명 영화의 하이라이트처럼 느껴진다.
혁민
2.5
영화의 다른 요소들과 어울리지 않는 나레이션은 그 자체로 통찰력 있는 문장이라고 하더라도 영화의 완성도로 연결되기 어렵다. 영화가 담으려는 의미가 이미지와 연출에 비해 너무 크다. 부국제가 이 영화를 소개하며 호나스 트루에바를 '마드리드에 거주하는 홍상수 감독의 사촌 동생쯤'으로 만든다고 했는데, 오히려 나에게는 홍상수 감독이 얼마나 위대한지 역으로 체감하게 해준 영화였다.
ygh_光顯
3.5
모든 불완전함으로 완전해진다 스스로 알아가고 서로의 의견들에 맞부딪히며 쌓여가는 예술이, 삶의 다양성이 실재하고 있다.
오세일
3.5
현실과 비현실은 각각의 형태를 공유한다. 영화가 일종의 비현실을 상징하는 예술로써 우리들의 현실 곁에서 복무하는 것이라면, <와서 직접 봐봐>의 세계는 현실의 사회를 빗댄 가상의 지구이다. 하지만 그러한 가상의 지구는 필히 현실의 사회를 참고하여 만들어진 공간이기에, 관객들은 <와서 직접 봐봐>의 배경을 현실로써 비추어 바라본다. 현실에서의 사태와 같이 전염병이 퍼진 극의 사회, 그리고 현실의 인간들과 같이 삶의 고뇌라는 바다를 유영하는 영화 내의 존재들. 이처럼 영화는 서서히 현실과 맞닿고 있는 중이다. 다만 극 중에서 '그것보단 더 걸릴 테지'라는 말로 일관하던 다니엘처럼, 단지 조금 늦을 뿐이다. 영화는 코로나의 창궐로부터 벗어나 목가적인 일상을 그리워하는 정서로 가득 차 있다. 앞으로의 삶에 대한 불안감, 여러 지식의 굴레 사이에서 헤매는 청춘의 불완전함 등의 화두가 던져지지만, 끝내 생의 걱정은 일상의 평화에 묻힌다. 도시에서 시골로, 현재에서 미래로, 영화에서 현실로 향하는 그들의 여정. 감독의 머릿속에 떠다니는 관념적 언어를 시각적 이미지로써 나열한 짧은 영상에 불과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분명히 호나스 트루에바는 서서히 발전하고 있다. 마치 영화가 현실의 곁으로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제 다시 시작하려고 해>에서 흥미롭게 비추어졌던 메타적인 요소는, 이미 <와서 직접 봐봐>에서 선행되고 있었다.
조현호
4.0
직시하기, 경청하기 그리고 인정하기.
시나브로
3.0
"와서 직접 봐봐" 기예르모-수산나 커플이 엘레나-데이빗 커플을 본인들의 집으로 초대하면서 건네는 대사이기도 하면서, 본 영화가 트레일러에서까지 일말의 단서마저 공개하길 거부한 채 던지는 도발적인 문구이기도 하다. 데이빗의 말처럼 어찌 보면 이 대사는 교조적인 어투를 풍기기도 한다. "와서 직접 봐야"한다는 말은 곧 경험 없이 스스로의 직관과 사유만으로는 완벽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는 선언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경험이 정말 완벽한 이해로 직결되는가? . 영화는 음악을 감상하고 있는 네 명의 주요인물들을 한 명씩 개별적으로 비추며 시작한다. 음악이 다 끝나고 컷이 전환된 후에야 이들이 같은 테이블에 앉은 일행이며 커플들끼리 앉아있는 것이라는 인물 간 관계에 대한 정보가 밝혀진다. 이는 마치 인물들 간의 상호관계 이전에 개별자들이 선행하여 존재함을 말하는 것만 같다. 내용 면에서 살펴볼 때에도 비록 데이빗은 기예르모-수산나 커플의 권유로 이들과 같이 공연을 관람하긴 하였으나, 그들만큼 긍정적인 감상에 도달하진 못하였다. 공연을 "와서 직접 봐보라"는 그들의 부름에 응답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데이빗의 감상은 기예르모-수산나 커플의 감상으로 수렴하지 못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이 총체적인 경험은 개별자들 사이의 간극을 강조한 채 막을 내리게 된다. . 이후 공연장을 떠나는 이들을 바라보며 입혀지는 내레이션처럼, 타인과의 관계를 대하는 우리의 정서가 본질적으로 얄팍한 것이기에 타자와의 동화란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랜 세월을 공유하였음에도 권태롭게 비춰지는 초반부 엘레나-데이빗 커플의 모습이 마치 이를 뒷받침하는 듯하다. 심지어 화목해보이던 기예르모-수산나 커플 또한 뒤에서 밝혀지듯 출산을 앞둔 마음가짐에서 불일치를 보인다. 이렇듯 경험의 공유에도 불구하고 개별자마다 감상이 다르게 분기하는 동상이몽의 현장에서, "와서 직접 봐보라" 한들 객이 초대자의 의도대로 스스로의 감상을 조형하겠는가? 같은 문구를 듣고도 누군가는 "환경오염"을, 누군가는 "친우를 소중히 하는 마음"을 읽어내는 마당에, 어떻게 개인의 면역작용이 세계적/범인류적인 면역작용으로 확장될수 있겠는가? . 하지만 이처럼 감상의 다원성이 당연시되는 세태에서 우리가 단일하고 확정적인 진리만을 믿어야하는 이유는 또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가 저 내레이션이 말하는 대로, 엘레나의 책이 설파하는 대로 맹목적으로 믿어야만 하는가? 그 글귀들 또한 어떠한 경험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을 제시하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기에, 그 감상을 취사선택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몫이 되는 것이다. 혹자는 "어떠한 예술은 완전한 상태보다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것이 이상적이다"는 글귀를 보고 감상자 본인의 독특한 감상이 예술을 완성시키는 것이라는 격언을 스스로 읽어내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그럼에도 자신은 여전히 예술의 힘을 믿는다는 강직한 선언을 내뱉기도 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결의 반응임에도 양쪽 모두 삶과 예술을 예찬하는 얼마나 고귀한 감상들인가! . 바로 이 지점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처음에 찾고자 하였던, 반드시 "와서 직접 봐야"만 하는 정당성이 갖춰지는 것이다. 경험의 공유가 강조되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단일하고 절대적인 "이해"의 필요조건이 되기 때문이 아니다. 경험이 공유되어야 무엇이든 시작될 수 있다. 그것이 견해의 극적인 일치가 되었든, 열띤 항변과 논쟁이 되었든, 공통된 현상에 기반을 두어야지만 타자 간 논의가 성립될 수 있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끝나도 어떠랴? 인물 간 관계성이 삭막하게만 느껴졌던 1부에 비한다면, "와서 직접 보라"는 권유에 엘레나-데이빗 커플이 응했기에 성립될 수 있었던 2부에서 네 명의 개별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조잘대던 광경이 훨씬 더 활기차 보이지 않는가? 결국에는 각자가 자신만의 견해에 고착된 채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한이 있더라도, 공통된 외재음이 지배하는 풍경에 머무르며 인물들이 계속 서로 어우러져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의 감상이 필연적으로 분기할 수 밖에 없음에도, 창작자가 자신의 얼룩진 렌즈를 통해 끊임없이 불완전한 예술을 조형함으로써 감상자들에게 도전하고, 우리가 예술을 두고 이를 맞부딪혀가며 토론해야 하는 이유와도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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