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떡
4 years ago

여름과 루비
평균 3.5
나는 깜빡인다, 세상에서, 아주 작은 점처럼 깜빡이며 존재한다. 나는 존재하는 것을 깜빡 잊는다. 잊는다는 것을 또 잊는다. 19p 신발장 아래 멈춰 있는 신발의 포즈, 흐름의 정적 같은 게 좋았다. 74p '못생긴 그림'처럼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물감이 덕지덕지 뭉치고 섞여, 저희들끼리 끔찍한 포옹을 하고 있는 그림이다. 그건 대체로 못생긴 그림이지만 저녁 8시엔 고즈넉해지고, 자정이 넘으면 우아해진다. 그때를 빌려 감상해야 하는 그림. 아침이 되면 평범해지고, 그 밖의 시간엔 여전히 못생긴 그림. 78p 유년은 '시절'이 아니다. 사랑에, 이별에, 지속되는 모든 생활에, 지리멸렬과 환멸로 치환되는 그 모든 숨에 유년이 박혀 있다. 80p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먼저 내 인생의 찢어진 페이지 몇 장에 대해 들려줄 것이다. 그러고는 지켜볼 테다. 사람들이 이야기에 상처받는 순간을. 기억과 기억이 만나 상처를 조율해나가는 동안 얼굴에 드리워지는 무늬들을 보고 싶다. 161p 잃어버리기 전, 그 전, 그 전의 일들이 말들을 밀치고 장면을 건너 다가온다. 마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듯이. 186p 사소한 이별이라 해도 그게 이별이라면, 올라선 곳에서 내려와야 한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건 낙차 때문이다. 당신이 있는 곳과 없는 곳, 거기와 여기, '사이'라는 높이. 197p 어떤 영원한 여름을 통과하는 여름의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