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루비
박연준 · 소설
2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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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준 시인의 첫 장편소설. 세계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첫 순간’, 유성우처럼 황홀하게 쏟아지는 유년 시절의 그 순간들을 그녀만의 깊고 섬세한 통찰로 그려내고 있다. 정밀하고 구조적인 면과 ‘유년’의 그 위태롭고 아름다운 순간들을 이야기성으로 풀어내는 힘은, 자기 삶의 ‘찢어진 페이지’를 소설이란 장르로 복원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당위에 천착한, 꼭 써야만 했던 필연적인 작품이 되었다. 소설은 일곱 살 여름으로 시작한다. 소녀의 이름은 여름. 고모 손에 맡겨진 채 마당 한 귀퉁이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 어른들은 죄다 나갔고, 아이만 혼자 덩그러니. 여름을 돌봐줄 사람은 없다. 그때,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젊은 여자와 아빠. ‘오늘부터 엄마라고 불러.’ 아빠가 데리고 온 여자가 말한다. 새엄마. 그렇게 시작되었다. 새엄마와 아빠의 여름. 유년의 상처가 오래도록 어른의 삶에 관여하는 이유는, 아마 유년의 상처와 슬픔이 당시에 각인되지 않고 영원히 휘발되었기 때문이다. 사라져버린 상처가 흔적으로 남아 어른의 밑거름이 되고 그때의 슬픔의 흔적이 지금 우리들의 얼굴이 된다. 우리들의 첫 실패를 분명히 상기하고 있는 그 유년의 상실에 대해, 박연준의 소설은 막바지에 다다라서 공명한다. 실패하는 사랑은 영원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랑인 것처럼. 실패해버렸기에 영원히 사랑은 계속된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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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목차
1부
어린이의 정경_1986/피아노/신호등/바탕색/계절/46색/따귀/가정교육/밤의 기도/붉은 것/비행/쥐잡기/단테와 침대/어른들은 진실을 수정한다/어떤 거짓말은 솔직하다/아이들은 현실을 수정한다/가구 사용법/내 수영복이 아니야/할 수 있는 이야기/할 수 없는 이야기
2부
우리들의 실패/찌그러진 풀처럼 사람을 눕게 하는 감각/작은 배우/그건 잡으라고 난 털이 아니다/큰 배우/부스러기들/찢어진 페이지/지나간 미래/미래에도 하지 못할 이야기/학자와 나/난삽/언덕에서 내려오기/얼굴 사용하기/회상하기/전화 돌리기/오해하기/언덕에서 멀어지기/두 사람
해설 | 전승민(문학평론가)
어린 오르페우스의 여름밤
작가의 말
출판사 제공 책 소개
모든 이별은 언덕 위에서 이루어진다. 사소한 이별이라 해도 그게 이별이라면, 올라선 곳에서 내려와야 한다. 내려오기. 그게 이별이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건 낙차 때문이다. 당신이 있는 곳과 없는 곳, 거기와 여기, ‘사이’라는 높이. ―본문 중에서
나와 당신을 루비처럼 빛나게 해준 여름,
‘첫 순간’이 유성우처럼 쏟아지던 우리들의 유년에 대하여
박연준 시인의 첫 장편소설!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베누스 푸디카》 《밤, 비, 뱀》, 산문집 《소란》 《인생은 이상하게 흐른다》 《모월모일》 《쓰는 기분》 등으로 자기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온 박연준 시인의 첫 장편소설 《여름과 루비》가 출간되었다. 소설 《여름과 루비》는 세계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첫 순간’, 유성우처럼 황홀하게 쏟아지는 유년 시절의 그 순간들을 그녀만의 깊고 섬세한 통찰로 그려내고 있다.
독자들에게 박연준은 시인과 에세이스트다. 대개 그녀의 글에서 일상을 감각적으로 대하는 마음과, 시로 세상을 해독하는 방법에 대해 그녀는 친밀하게 문학을 전했고 다정하게 산문으로 말해왔다. 시의 언어 속에 가려진 삶의 쉬운 이해에 대해, 산문에서 그렸던 다채롭게 다각화된 일상에 대해.
소설. 그 중에서도 장편소설. 박연준에겐 소설이란 아무래도 낯선 장르일 것이다. 어쩌면 시와 산문의 길에서 괜하게 슬쩍 소설의 짓궂은 방향으로 선회해본 것일 수도 있겠으나, 출간된 소설 《여름과 루비》의 정밀하고 구조적인 면과 ‘유년’의 그 위태롭고 아름다운 순간들을 이야기성으로 풀어내는 힘은, 자기 삶의 ‘찢어진 페이지’를 소설이란 장르로 복원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당위에 천착한, 꼭 써야만 했던 필연적인 작품이 되었다. 문학잡지 《악스트》에서 연재를 마치고 1년여 동안 수정과 탈고를 거쳐 은행나무출판사에서 박연준 시인의 첫 장편소설이 출간되었다.
우리들의 처음과 그 모든 것의 실패에 대하여
소설은 일곱 살 여름으로 시작한다. 소녀의 이름은 여름. 고모 손에 맡겨진 채 마당 한 귀퉁이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누구도 뭐라 하지 않는. 어른들은 죄다 나갔고, 아이만 혼자 덩그러니. 여름을 돌봐줄 사람은 없다. 괜히 마당에 나앉아 줄을 긋거나, 소리 내 책을 읽어도 봐주는 사람도, 들어주는 사람도 없다. 그렇다고 세상 구경을 하기 위해 밖에 홀로 나갈 수도 없다. 점처럼 깜빡이는 일곱 살 여름. 이유 없이 자주 울고, 웃고 침묵하다 떠들고. 엄마가 있는 아이가 아니라서. 엄마를 대신하는 게 고모라서 사람들은 여름을 고장난 신호등처럼 바라본다. 그런 그때,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젊은 여자와 아빠. ‘쟤는 수줍음이 많아.’ 아빠의 말에 대항하려다 멈춰버린다. 일곱 살 여름은 아빠에게 유일한 약점이자 무기. 최대한 도도하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기. 동정이 필요 없다는 듯. 반응하기를 멈춘다. ‘오늘부터 엄마라고 불러.’ 아빠가 데리고 온 여자가 말한다. 고모 말에 따르면 교양이라곤 눈을 뜨고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던 여자. 새엄마. 그렇게 시작되었다. 새엄마와 아빠의 여름.
우리 집에 갈래? 마음속에 친구라고 다짐할 때 나오는 첫마디. 공식적으로 학교에서 만난 첫 친구. 루비가 말했고 여름은 승낙했다. 그때 두 아이 삶의 궤도에 정확히 일치하며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느 누구나 처음 ‘친구’와의 강한 결속력과 유대감이란. 나의 세상과 기꺼이 맞바꿀 수 있는 또 다른 세상과의 만남 같은 것. 여름을 지배하는 루비. 루비를 스며들게 하는 여름. ‘넌 좀 특별한 것 같아.’ 특별하게 지켜주어야 할 그 무엇과 혹 지켜주지 못했던 그 무엇을 혼동한 채 결속되어버린 둘. 여름은 종이에 쓸 때가 많았고 루비는 종이를 읽는 때가 많았다. 둘은 바닥에 앉아 무언가를 읽거나 썼고 말하거나 들었다. 세상이 그들에게 내어준 그 처음에 대하여. 세상이 모르게끔 감추어둔 그 처음들에 대하여. 슬픔. 죽음. 기억. 과거. 나쁜 것. 야한 것. 좋은 것. 착한 것. 믿음. 배신. 타인. 사랑 같은 것들.
유년에게도 시간은 흐른다. 아이면서 더 이상 아이가 아닌. 상상이 펼쳐지고 펄럭이는 열 살. 이불먼지를 뒤집어쓴 채 재채기를 하며 기어나온 열한 살. 세상의 처음이 이제는 익숙한 것으로 느껴지는. 어른들이 현실이 수정하는 것에도. 어른들이 거짓말로 현실을 버텨내는 것에도. 과거가 슬프다는 사실도. 현재를 생각하면 침묵해야 한다는 사실도. 미래를 생각하면 씩씩함과 눈물이 서로 교차한다는 것도 알게 되는, 그리고 루비를 잃어버리게 된 열두 살. 불안과 질투로 루비를 잃어버린 게 아니다. 루비의 견고해진 거짓말 때문도 아니다. 여름에게는 친구가 많았고 루비에게 친구는 여름뿐이라서. 오래도록 비밀로만 친했던. 늘 혼자였고 외로웠고 침울했던 루비를 모른 척했던 그 여름 때문일까. 그래서 결국, 루비는 떠나간다. 여름은 그게 나의 ‘첫’ 사랑이란 걸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또한 ‘첫’ 이별을 처음으로 깨닫게 해준 것 또한 루비라는 것도. 루비도 여름과 같았을까. 루비에게도 여름이 그 ‘처음’이라는 걸.
실패하는 사랑은 영원히 사랑해야 할 수밖에 없는 사랑
유년의 상처가 오래도록 어른의 삶에 관여하는 이유는, 아마 유년의 상처와 슬픔이 당시에 각인되지 않고 영원히 휘발되었기 때문이다. 사라져버린 상처가 흔적으로 남아 어른의 밑거름이 되고 그때의 슬픔의 흔적이 지금 우리들의 얼굴이 된다. 유년의 상처와 슬픔은 서서히 어른으로의 시간이 채워지며 찾아온다. 어른이 된 후, 유년의 그 어떤 시절의 기억과 냄새와 풍경이 불현듯 묻어온다. 여름이 루비를 잃었다는 것을 어른이 되어 깨닫는 것처럼. 잃어버린 루비를 다시 되찾아야 되겠다는 다짐처럼. 우리들의 첫 실패를 분명히 상기하고 있는 그 유년의 상실에 대해, 박연준의 소설은 막바지에 다다라서 공명한다. 실패하는 사랑은 영원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랑인 것처럼. 실패해버렸기에 영원히 사랑은 계속된다는 것처럼.



nok
4.0
p.80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유년이 시절이라는 것. 유년은 '시절(時節)'이 아니다. 어느 곳에서 멈추거나 끝나지 않는다. 돌아온다.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 컸다고 착각하는 틈을 비집고 돌아와 현재를 헤집어놓는다. 사랑에, 이별에, 지속되는 모든 생활에, 지리멸렬과 환멸로 치환되는 그 모든 숨에 유년이 박혀 있다. 붉음과 빛남을 흉내낸 인조보석처럼. 박혀 있다. 어른의 행동? 그건 유년의 그림자, 유년의 오장육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시절의 루비를 만난다면 물어보고 싶다. 루비, 깨끗해져야 하는 게 정말 우리었을까?
은지
4.0
‘유년’이라는, 벗을 수 없는 옷을 입은 채 커버린 사람 곁에 서 있고 싶다. - 작가의 말
내맴
3.0
일반명사의 조합인줄 알았던 제목이 고유명사의 만남임을 깨달았을 때
물떡
4.5
나는 깜빡인다, 세상에서, 아주 작은 점처럼 깜빡이며 존재한다. 나는 존재하는 것을 깜빡 잊는다. 잊는다는 것을 또 잊는다. 19p 신발장 아래 멈춰 있는 신발의 포즈, 흐름의 정적 같은 게 좋았다. 74p '못생긴 그림'처럼 말하고 싶을 때가 있다. 물감이 덕지덕지 뭉치고 섞여, 저희들끼리 끔찍한 포옹을 하고 있는 그림이다. 그건 대체로 못생긴 그림이지만 저녁 8시엔 고즈넉해지고, 자정이 넘으면 우아해진다. 그때를 빌려 감상해야 하는 그림. 아침이 되면 평범해지고, 그 밖의 시간엔 여전히 못생긴 그림. 78p 유년은 '시절'이 아니다. 사랑에, 이별에, 지속되는 모든 생활에, 지리멸렬과 환멸로 치환되는 그 모든 숨에 유년이 박혀 있다. 80p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먼저 내 인생의 찢어진 페이지 몇 장에 대해 들려줄 것이다. 그러고는 지켜볼 테다. 사람들이 이야기에 상처받는 순간을. 기억과 기억이 만나 상처를 조율해나가는 동안 얼굴에 드리워지는 무늬들을 보고 싶다. 161p 잃어버리기 전, 그 전, 그 전의 일들이 말들을 밀치고 장면을 건너 다가온다. 마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듯이. 186p 사소한 이별이라 해도 그게 이별이라면, 올라선 곳에서 내려와야 한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건 낙차 때문이다. 당신이 있는 곳과 없는 곳, 거기와 여기, '사이'라는 높이. 197p 어떤 영원한 여름을 통과하는 여름의 이야기
한예진
3.0
은유에 잡아먹힌 소설. 거대한 작가의 세계관에 빠져 있지 않다면 겉돌 수 밖에 없게 되어버린다. 그러나 노래를 읽는 듯 운율감이 느껴지는 소설이라 흥미로웠다. 사회에서 '이성간의 감정'으로 만연히 정의내려진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람과 사람 사이 깊게 맺어지는 관계'로 재정의할 수만 있다면 보다 풍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mills
4.0
실패한 사랑은 그 실패 때문에 계속해서 사랑할 수밖에 없다
nattin
3.5
모르겠음. 단편들의 난잡한 묶음이랄까. 힌트를 주지 않아서 아쉬웠음. 머릿속에서 마음대로 여름과 루비의 인생을 상상할 수 있다지만, 우정 또는 사랑. 뻔한 두 갈래로 생각되지 않을까. 모호함이 주는 매력으로 단편을 읽고 즐기지만 모호해서 아쉬웠음. 너무 얕은 서사만 나열된 느낌. +) 여름과루비가 누굴 용서하는 책임..? 아니야 용서하지 못했음 여름이는... 여름이가 할머니 앞에서 울지 못했자나..
김두나
5.0
사랑했고 아직도 사랑한다고 벽에 이마를 대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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