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천수경

천수경

4 years ago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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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함께 여름!

영화 ・ 2020

평균 3.6

남자친구랑 헤어지고 빛나네 집에서 3주간 지냈던 적이 있다. 어떻게 염치도 없이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 집의 펭귄 인형을 안고 하도 울어서 내 애착 인형이 되었다. 어릴 때도 애착 인형 따위 없었는데. 집 앞에 밥을 먹으러 나갈 때도 껴안고 나갔다. (뭐든 제때 안 하면 나중에 과도해진다). 승일이는 “들고 나왔구나. 제대로 퇴행했네,”라고 했다. 빛나랑 헤어진 주제에 빛나 집에 너무 자주 놀러 오던 G는 나한테 집으로 언제 돌아갈 거냐고 수시로 물어봤다. G와 나의 최대 공통점은, 혼자라면 절대 안 할 일을 빛나가 한다는 이유로 군말 없이 한다는 것이었다. 매주 일요일 빛나가 보는 돌싱글즈2를 함께 앉아서 보는 것도 포함이었다. 거슬리는 구석이 많은 그 리얼리티 쇼를 함께 보고 밥도 간식도 불필요하게 많이 먹으며 G와 거의 절친이 되었다. 가끔 빛나랑 G가 과거의 해묵은 사건에 관해 논쟁을 벌일 때 내가 G의 편을 들어주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헤어졌는데도 둘이 사이좋게 싸우는 이상한 관계가 부러워서 눈물이 날 때도 있었지만. 재택근무를 하는 빛나의 뒷모습을 보고, 걔가 내려주는 커피를 마시고, 같이 요리를 해 먹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정신 차리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온 날, 빛나와 G에게 새우 파스타를 한 통씩 해줬다. 각자 냉장고에 넣어두고 언제든 데워 먹을 수 있게.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며 챙겨준 우산은 지하철에 놓고 내렸고, 동생한테 전화해서 데리러 나와달라고 하는 바람에 잔소리를 들으며 돌아왔다. 펭귄은 데려왔다. 도저히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았던 내 방에 돌아오고서야 알았다. 한 발짝도 그 애와 멀어지지 못했다. '내일부터 추워진다던데..' 혼잣말을 육성으로 뱉었다. 낯선 집에서의 몇 주는 나를 어디로도 밀어주지 못했구나. "그냥 좀 말해줘라, 나 실연당했잖아," 라는 말을 무기 삼아 승일이가 생전에 털어놓지 않은 썰을 풀게 만들었고.. 합정에서 한강진까지 걸어가면 두 시간이 걸린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수건을 예쁘게 개는 법도 배웠고.. 터키식 빵을 먹어봤고.. 쓸모 있는 시간으로 치자고 다짐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 가만히 누워 동생이 출근 준비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이건 쓸모 있는 시간일 거야, 했다. 이후에 일부러 쓰레기 같은 드라마를 정주행하면서도. 다 먹지 못할 만큼의 배추를 (유튜브에서 본 다섯 가지 배추 요리를 하기 위해) 잘게 썰던 한밤의 시간에도. 쓸모가 있겠지, 했다. 불 끈 거실에 앉아서 동생들이 각자의 방에서 하는 통화 소리를 들을 때가 많았다. 내가 조용한 만큼 다른 이들의 소리에 집중한 겨울이었다. 넘어졌는데도 일어날 생각을 안 하고 누워있는 계절이 나쁘지 않다는 걸 이제는 안다. 더 나은 사람이 되지도 못했고, 그닥 유식해지지도 않았다. 내가 그 계절로 이룬 거라곤, 겨우 한 사람으로부터 달력 세 장만큼 멀어진 것이다. 그러고 또 달력 몇 장이 지났다. 나는 봄이 끝날 때까지도 “야 나 실연당했잖아, 좀 해줘라,”라는 말을 요긴하게 던졌다. 그 마법의 멘트를 남용했다간 다음 실연 때 효력이 떨어질 거라는 승일이의 협박에 이제는 넣어뒀다. 그리고 여름이 지나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