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ittle person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여기 있다
평균 4.2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여기 있다. “그분이 자신이 연약해진 것 처럼 나 자신도 연약한 상태에서 그분을 만나길 원했다.” 나체인 상태로 관람 도중 제지당한 관객의 인터뷰 중 화제성을 겨냥한 이벤트형 전시 외에 다른 요소가 과연 있을까에 대한 강한 의구심이 있었지만 애초의 예상보다는 흥미로운 요소들이 있어 계속 보다가 이 부분에 다다르자 비로소 이전의 의구심이 확신으로 이어졌다. 언뜻 이 전시는 예술가와 관객이 마치 대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마주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러한 위장술을 채택하였다) 그 전후 단계를 통해 그들의 위치에 내재한 심각한 불평등을 읽어낼 수 있다. 대중을 위해 (높은 자리에서 친히 내려와 자신의 육체를 희생하는) 예술가와의 만남을 위해 관객들은 밤을 꼬박 새워가며 미술관 문 앞을 지키고 그 시간이 다다르자 이들은 가장 기본적인 안전수칙까지 내다버린 채 바로 저 계단 위에 계신 위대한 예술가를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야 말겠다는 열망과 이기심 하나로 계단 위를 돌진하는, 아주 괴이하고 위험한 광경을 연출해낸다.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면 관객들은 자신들의 이성 및 판단 능력을 스스로 마취시킨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마취 상태에서 행해지는 일종의 최면술이 이윽고 펼쳐진다. 철저히 우상화된 대형 예술가와의 영적인 만남을 위해 아주 먼 곳에서부터 왔다고 이야기하는 관람객은 마치 성지순례를 떠난 순례자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신화화된 행위 예술가가 그 자리에 화석처럼 앉아 있고 고고한 고개를 들어올려 신비스러운 그 두 눈을 나의 두 눈과 마주칠 때 이윽고 감격의 눈물이 떨어지고 한껏 고양된 자아는 탄성을 내지른다. 이 전시가 혐오감을 일으키는 가장 큰 이유는 거대자본과 밀접히 맞닿아 있는 대형미술관과 자본가의 위치에서 커리어의 위대한 피니쉬를 찍고자 하는 행위 예술가가 합심하여 서로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해낸 일종의 쇼 그 이상 이하도 아닌 이벤트를 마치 대단히 순수하고 영적인, 비자본적이고 평등한 만남으로 포장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그들의 욕망을 기대 이상의 리액션으로 화답하는 관객들의 삼중주까지. 과거 어느 시점의 예술은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순수한, 적어도 그렇게 되기를 열렬히 추구하며 서로에게 재차 요구하던 저항이지 않았던가? 언젠가부터 그 저항마저 집어삼키기 시작한 자본이 정치적인 산술 과정을 거쳐 대중에게 친히 선사하는 예술적 경험은 어떤 형태이며 그 형태가 전시된 현장에서 감격의 눈물로 화답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구경꾼들이 몽상하는 예술. 미련하고 씁쓸한 자본의 뒷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