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여기 있다
Marina Abramovic: The Artist Is Present
2012 · 다큐멘터리/역사/전기 · 미국
1시간 41분 · 15세

자신의 몸을 도구로 이용하는 대담한 도전을 이어감으로써 예술의 정의를 새롭게 내렸다는 평을 받는 행위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때때로 그녀의 도전은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기에 충격적이면서도 감동적이다. 영화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일생 일대의 특별전을 앞두고 있는 마리나를 따라가며 “왜 행위예술이어야만 하는가”라고 묻는다. [제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출연/제작
코멘트
200+갤러리
삽입곡 정보

The Artist Is Present/Open Eyes

The Artist Is Present/Open Eyes

Devil Horns

Nightsea Variations

Charismatic Space

She Will Be Present
김의민
3.0
대중이 저를 우상화하는지는 모르겠어요. 투영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지만 그게 제 목적은 아니에요. 그건마치 커리어의 어떤 지점에 도착하면 우상화되는 것과 같아요.돈과 명예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예술의 목적은 아니에요. 부작용 같은거죠, 부산물 같은거에요 * 그녀의 삶과 별개로 다큐는 단순하기만하다
H.
4.0
나는 누구로부터 어떤 눈물을 흘렸고, 누구에게 어떤 눈물을 주었는지 곰곰히 생각해본다.
이준호
4.5
예술이란 무엇인가? 의자에 앉아있는 것도, 자신의 몸을 채찍질하는 것도, 나체로 전시장에 서는 것도, 결국 우리의 얼어붙은 관념을 부수는 예술이었다.
영화보고 밥먹고 커피마시고 산책해요
4.0
이 다큐 영화에서 사람들이 울거나 무표정으로 앉아 있는 장면은, 감동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기보다 인간이 감정을 처리하는 서로 다른 구조를 드러내는 실험에 더 가깝다. 침묵과 정지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장치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훈련된 자아를 잠시 해제시키는 조건이다. 어떤 이에게 그 해제는 눈물로 나타나고, 어떤 이에게는 표정의 고정으로 나타난다. 전자는 통제가 무너진 결과이고, 후자는 통제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이는 감수성의 차이가 아니라 생존 전략의 차이다. 이 퍼포먼스에서 중요한 점은 아브라모비치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위로도, 공감도, 반응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 공백 속에서 관객은 타인과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대면한다. 눈물은 교감의 증거라기보다 자기 투사의 부산물이고, 무표정은 냉담함이 아니라 자기 보호의 기술이다. 작품은 감정을 생산하지 않고, 관객 각자의 심리 구조를 노출시킨다. 이 맥락에서 울라이의 등장은 흔히 말하는 '정서적 클라이맥스'라기보다, 퍼포먼스의 조건이 흔들리는 사건이다. 이 장면이 계획된 연출이었는지, 우연한 방문이었는지는 사실상 중요하지 않다. 그는 단순한 관객이 아니라 아브라모비치의 과거이자 서사의 일부다. 이 순간 퍼포먼스는 더 이상 익명의 타자와의 관계가 아니라, 개인사가 개입된 관계로 전환된다. 손을 잡는 행위는 감동적인 화해의 제스처로 소비되지만, 냉소적으로 보면 이는 규칙 위에 세워진 퍼포먼스가 특정 인물 앞에서 얼마나 쉽게 예외를 허용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 장면은 작품의 진정성을 증명하기보다, 퍼포먼스 아트의 취약성을 노출한다. '아무와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규칙은 결국 특정한 관계 앞에서 무력해진다. 동시에 바로 그 균열 덕분에 관객은 더 강한 감정을 투사한다. 감동은 순수한 만남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규칙이 깨졌다는 사실을 목격하는 데서 증폭된다. 결국 이 다큐가 보여주는 것은 숭고한 교감이 아니라, 인간과 제도의 불완전한 작동 방식이다.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버틴다. 어떤 규칙은 유지되고, 어떤 규칙은 예외 앞에서 붕괴된다. 이 영화는 예술이 인간을 초월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술 역시 인간의 감정, 관계, 기억에 의해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을 비교적 솔직하게 드러낸다.
Little person
1.5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여기 있다. “그분이 자신이 연약해진 것 처럼 나 자신도 연약한 상태에서 그분을 만나길 원했다.” 나체인 상태로 관람 도중 제지당한 관객의 인터뷰 중 화제성을 겨냥한 이벤트형 전시 외에 다른 요소가 과연 있을까에 대한 강한 의구심이 있었지만 애초의 예상보다는 흥미로운 요소들이 있어 계속 보다가 이 부분에 다다르자 비로소 이전의 의구심이 확신으로 이어졌다. 언뜻 이 전시는 예술가와 관객이 마치 대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마주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러한 위장술을 채택하였다) 그 전후 단계를 통해 그들의 위치에 내재한 심각한 불평등을 읽어낼 수 있다. 대중을 위해 (높은 자리에서 친히 내려와 자신의 육체를 희생하는) 예술가와의 만남을 위해 관객들은 밤을 꼬박 새워가며 미술관 문 앞을 지키고 그 시간이 다다르자 이들은 가장 기본적인 안전수칙까지 내다버린 채 바로 저 계단 위에 계신 위대한 예술가를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야 말겠다는 열망과 이기심 하나로 계단 위를 돌진하는, 아주 괴이하고 위험한 광경을 연출해낸다.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면 관객들은 자신들의 이성 및 판단 능력을 스스로 마취시킨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마취 상태에서 행해지는 일종의 최면술이 이윽고 펼쳐진다. 철저히 우상화된 대형 예술가와의 영적인 만남을 위해 아주 먼 곳에서부터 왔다고 이야기하는 관람객은 마치 성지순례를 떠난 순례자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신화화된 행위 예술가가 그 자리에 화석처럼 앉아 있고 고고한 고개를 들어올려 신비스러운 그 두 눈을 나의 두 눈과 마주칠 때 이윽고 감격의 눈물이 떨어지고 한껏 고양된 자아는 탄성을 내지른다. 이 전시가 혐오감을 일으키는 가장 큰 이유는 거대자본과 밀접히 맞닿아 있는 대형미술관과 자본가의 위치에서 커리어의 위대한 피니쉬를 찍고자 하는 행위 예술가가 합심하여 서로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해낸 일종의 쇼 그 이상 이하도 아닌 이벤트를 마치 대단히 순수하고 영적인, 비자본적이고 평등한 만남으로 포장했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그들의 욕망을 기대 이상의 리액션으로 화답하는 관객들의 삼중주까지. 과거 어느 시점의 예술은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순수한, 적어도 그렇게 되기를 열렬히 추구하며 서로에게 재차 요구하던 저항이지 않았던가? 언젠가부터 그 저항마저 집어삼키기 시작한 자본이 정치적인 산술 과정을 거쳐 대중에게 친히 선사하는 예술적 경험은 어떤 형태이며 그 형태가 전시된 현장에서 감격의 눈물로 화답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구경꾼들이 몽상하는 예술. 미련하고 씁쓸한 자본의 뒷맛.
Magic_Sora
4.0
마리나와 마주 앉은 한시간 반이 난해한 행위예술로 시작했지만 우리의 자화상같은 그녀 일생을 보며 조금은 가까워 졌다. 전시가 끝나고 영화도 끝나지만 퍼포먼스는 멈추지 않는다.
까갸꿍갹
4.0
나도 저 앞에 앉아서 눈물 한 바가지 흘려보고 싶네 . 울라이 등장 장면은 볼때마다 느낌을 형용할 수 없다 사랑의 아련함과 추잡스러움이 공존하는 것 같아 참 복잡미묘하다. 거기에 예술 한 스푼 까지 더해지니 현실적 공간 속 비현실적 상황이 초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어찌됐건 인생이 예술 같다는 말은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싶다. . 해맑은 얼굴로 작품에 참여한 어린 아이가 의자에서 벗어나 가족들을 마주한 순간 주저앉으며 눈물을 흘렸던 장면이 인상깊다. 아이의 엄마 또한 울컥함을 참지 못하고 그저 자랑스럽다는 말만 반복했는데,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이들의 모습이야 말로 작품 의도가 제대로 드러난 장면이 아닌가 싶다. 작가, 주변환경과 동화되어 내면의 무언가를 느끼는 것. 그것이 기쁨이건 슬픔이건 경외감이건.
신 하우 평론
3.5
마리나와 울라이가 마주앉은 영상이 이 다큐멘터리까지 이끌었다. . 깊은 한숨에는 참 많은 의미가 있네. 속상하고 답답하다.
더 많은 코멘트를 보려면 로그인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