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김재민

김재민

10 months ago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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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백

영화 ・ 2024

평균 4.0

한국 상영판 자막의 심각한 오역을 인지하고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작중 "京本も私の背中見て成長するんだなー [쿄모토모 와타시노 세나카 미테 세-쵸- 스룬다나]"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내 뒤에만 있으면 너도 나아질 거야."는 작품의 주제를 해치는 심각한 오역입니다. 대사의 원래 의미는 "쿄모토도 내 등을 보면서 성장하는구나."입니다. ㅡ 아래는 중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작품 감상 후에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1. 저는 영화를 처음에 일본에서 봤는데, 원작 만화를 두 번, 영화를 두 번 보고 난 후에야 look back이 look (at my/your) back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목에서 너무 강하게 오아시스의 곡 Don't look back in anger를 연상해버린 탓에 깨닫는 게 느렸네요. 한국 상영판 자막에서는 마지막 4컷 만화 제목 背中を見て를 바로 '룩 백'이라고 번역해버렸더라고요. 이렇게 한 단계를 건너뛰어 번역함으로써 背中を見て(등을 보고/등을 봐)가 자기 등에 도끼가 꽂힌 걸 모른다는 유머러스한 상황을 나타내는 제목이라는 1차적인 의미가 전달되지 않을 우려도 크고, 무엇보다 look back은 원래 되돌아보다/회상하다 라는 의미일 뿐이고 작품의 주제를 대입하여 문학적 허용을 거쳤을 때 (원래는 문법적으로 틀린) '등을 보다'의 의미가 되는 것이기에 이런 강제주입적인 번역은 매우 아쉬웠습니다. 2. 룩 백 원작 만화는 쿄애니 방화 사건에 대한 추모적인 의미를 담은 작품이지만, 그 사고와 원작 만화 발표로부터도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지금 이 작품을 단지 쿄애니 사고 추모작으로만 한정해서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또한 <룩 백>은 물론 만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쿄애니 방화 사건에 대한 추모를 담았다는 점과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들어졌으므로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죠.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공통 요소인 그림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노력과 창작의 고통, 그게 인정받았을 때의 기쁨, 더 잘하고 싶다는 욕망은 모든 창작자 누구든 공감하는 감정이겠죠. 그런 점에서 룩백은 쿄애니 추모작, 또는 만화나 애니메이션에 대한 이야기라는 틀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창작과 창작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3. 작중 클라이막스에서 쿄모토가 "그럼 후지노는 왜 (만화를) 그리는 거야?"라고 묻는데 작중에서 후지노는 그 질문에 말로 대답하지 않고, 대신 "만화를 계속 그린다"는 행동으로 대답하죠. 자기가 그림을 잘 그린다는 자신감과 오만함, 쿄모토에게 지기 싫다는 질투심과 경쟁심, 자기가 그렇게 질투했던 쿄모토에게 인정받았다는 기쁨, 쿄모토와 함께 그림을 그리는 일의 즐거움, 우정, 사랑, 더 그림을 잘 그리게 되자는 쿄모토와의 약속, 쿄모토를 방에서 꺼내버린 것에 대한 속죄, 내가 그린 만화를, 내 등을 보며 성장할 또다른 쿄모토를 위해, 그 모든 것이기도 하고, 그 너머의 무언가이기도 할, 말로는 미처 표현할 수 없는 이유 때문에 후지노는 다시 펜을 잡은 것이겠죠. 후지모토 타츠키의 만화, 그리고 오시야마 키요타카가 감독한 애니메이션은 작품 전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창작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메타적인 대답이라고 생각합니다. 4. 감상평을 나누다가 동생이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창작이란 게 만들기 전에는 자기 머리속에만 있는 자신의 것이지만, 창작물로 만들어져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부터 그것을 보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버리고, 그럼 그때부터 창작물은 창작자 혼자만의 것이 아닌 그것을 좋아하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 됩니다. 그때부터 창작은 단지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자기가 그만두고 싶다고 마음대로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니게 되는 거죠. "그럼 후지노는 왜 (만화를) 그리는 거야?"라는 질문 뒤의 후지노의 회상은 온통 쿄모토였습니다. 말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그 답을 굳이 한 단어로 나타낸다면 "쿄모토"가 그것일 거 같네요. 모든 창작자에게는 마음속에 하나의 "쿄모토"가 존재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엇이건, 어떤 형태이건. 5. 쿄모토는 후지노를 만화의 천재라고 부르며 존경과 찬양심을 숨기지 않는데, 자존심 강한 후지노는 단 한 번도 쿄모토에게 그림을 잘 그린다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후지노가 질투심에 죽어라 그림 연습을 한 것도, 만화를 그만둔 것도, 다시 시작한 것도 전부 쿄모토 때문이죠. 후지노 본인도 그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을 테고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동생은 "쿄모토도 내 등을 보며 성장하는구나."라는 대사가 '사실 나도 쿄모토의 등을 보면서 성장해왔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대사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더더욱 핵심적이고 중요한 대사인데 그걸 "내 뒤에만 있으면 너도 나아질 거야."라고 번역한 자막은 매우 아쉽습니다. 6. 이것도 동생 코멘트인데, 결말부에서 후지노가 쿄모토의 가운 등 부분에 싸인해줬던 자기 이름을 봅니다. 그런데 藤野 歩라는 글자가 藤野、歩め。라는 의미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자기 이름이자, 어쩌면 쿄모토가 자기에게 남긴 메시지인 그 문구를 따라서 후지노가 다시 걸어나간다는 해석도 뭉클하게 다가옵니다. 7. 페북에서 「京本も私の背中見て成長するんだなー」라는 대사에 대해 제가 한 "쿄모토도 내 등을 보면서 성장하는구나."라는 번역은 틀렸고 "내 뒤에만 있으면 너도 나아질 거야."는 자막판의 번역이 더 적절하다는 의견을 봐서 여기저기 물어봤는데, 마지막에는 제 생각이 맞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다른 분의 주장은 "~するんだな"가 명령형의 문장이고, 따라서 "내 등을 보며 성장하도록 해"의 의미이며 그런 의미로 본다면 "내 뒤에만 있으면 너도 나아질 거야."라고 번역하는 게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배틀물이나 스포츠물 애니에서 주인공이 상대방에게 "僕の名前をよく覚えておくことだな。"라고 말하면 이건 "내 이름을 잘 기억해두도록 해"이라는 의미일 테니까, 이런 용법의 문장과 헷갈린 게 아닌가 싶군요. 챗지피티와 페북 일본어 스터디 그룹의 일본인들에게 물어본 결과 문제의 문장은 "~하는구나"의 뉘앙스가 맞다고 결론 내렸지만, 어째서 저러한 오역이 나왔는지의 과정은 이해가 된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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