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JE

JE

6 years ago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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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

영화 ・ 1947

평균 3.9

어떤 황량한 풍경 속에서 돌연 등장한다. 부서진 담장을 넘고선 잠시 주춤이는 동작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기이한 불안이 감지되는 분투에 서서히 빠져든다. 그러다 다시금 무로 돌아가는 존재. 오직 깊고 깊은 불안으로 조형된 존재의 움직임은 그 자체로 실존적 고민 속에 던져지던 서부 사나이적 무드의 형상화는 아닐까(심지어 헨리 폰다는 '이름이 없다'). 술 취한 활기가 넘실대는 순간에도 주인공이 느끼는 불안에 함께 사로잡히고, 주인공이 부재하며 음악과 춤이 감싸도 주인공의 음울함이 마치 눈앞에 새겨진 듯 아른거린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하고, 존재의 분투를 무의미케 하는 실존적이고 성스러운 탄식이 맴돈다. 그럼에도, 또 모를 희망을 남기는 영화는 마치 심연을 헤메는 것만 같다. 성서를 알레고리로 한 추상적인 드라마지만, 그것에 무지한 사람도 경탄케 하는 표현주의적인 조명, 구도, 무드가 압도적이다. 가히 완벽한 오프닝. 빛을 받으며 얼굴을 드러낼 때 나타나는 어떤 (무기력한) 고결함, 그러나 둘러싼 끝없는 어둠이 주는 짙은 불안. 이따금 등장하는, 힘차게 타오르는 촛불은 얼마나 따스하고 아름다운가. 멕시코의 마을이 주는 이국적인 풍경과 숲과 황야의 서로 다른 심상까지. 특히 마을 장터의 활력과 멕시코 경찰의 긴박한 추격을 교묘히 잇는 음악과 편집, 장터의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이 주는 비극의 기운, 그러다 두 순간이 충돌할 때의 파열감을 이뤄내는 리듬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리고 (두 번 등장할 정도로 강조되며 화면의 심도를 극대화 하는) 기나긴 복도를 걷는 것만으로 새겨지는 무언가 구도적인 고난 내지 불안, 혹은 결의. 후반부 "Another State"의 성소에서 잠든 밤 창틀을 타넘는 부랑자의 잽싸면서도 조심스러운, 그림자에 가까운 어두운 움직임. 흡사 <웨건 마스터>의 악당들마냥 마치 뱀을 닮은, 아무래도 유다적인 존재감이다. 마지막 엘 그링고의 고해성사를 들어주는 순간에도 주인공의 얼굴은 어둠에 잠겨 있고, 이윽고 두 사람 모두에게 그림자가 드리운다. 오프닝마냥 다시금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마리아의 모습. 클로즈업. 겨우 쥐어진 나무 십자가. 어쩌면 주인공의 얼굴에 가장 환하게 빛이 비치는 마지막 순간, 계단을 오르는 비극적인 뒷모습의 결연함 혹은 신성함. 구원인지 희망인지, 또 알 수 없는 무의미한 몸짓의 예고인지, 현재에 멈추는 듯한 엔딩까지. 무성영화를 방불케 하는 강렬한 이미지와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쏟아질지언정 감상에만 종속되진 않는 음악의 조화, 그리고 그 리듬 안에서 무엇보다 헨리 폰다의 표정과 제스처, 즉 신체가 완성한다. <젊은 링컨>을 닮았달지, 히치콕의 <오인>을 연상시키는, 성스럽지만 느린 혹은 머뭇대는 동작들. 예컨대 중반부 감옥에서 양손의 물통을 놓고 촌장에게로 뛰어갈 때 그 표정과 구부정한 자세 같은 것. 뜀박질의 무기력함과 유약함이 전후로 교차되는 촌장의 단연한 표정과 대비되고, 와중에 힘없이 벗어지는 모자마저 인상적이다. 그저 우연과 이유 모를 의무에 이끌리는 <도망자>는 이야기를 이루는 인과의 무게보다 어둠을 다듬은 이미지로 어떤 견고하고 절망적인 세계를 두드리고 싶어 보인다. 웃음을 잃어버린, 아무래도 포드답지 않은 무드는 차라리 히치콕 혹은 브레송에 가까운 것인가 싶다. 어설픈 감상만 자리하는 게 슬프지만, <도망자>는 더 없이 불안하지만 아름다운 그림자가 되어 그야말로 기이한 매혹을 이끄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