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민

데빌맨 크라이베이비
평균 3.5
수많은 걸작을 아류로 만들어버리는 눈부신 오리지널리티, 대담하고 현란하게 그것을 구사하는 유아사 마사아키 . 아래는 강한 스포일러를 포함한 캐릭터별 분석. . 1. 아스카 료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이다. 작품은 "사랑은 없다."는 료의 독백으로 시작해 아키라에게 "내 곁에 있어 줘."라고 울부짖는 사탄의 독백으로 끝난다. 알고 나서 보면 료는 사실 아키라를 사랑했다는 흔적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하지만 그는 사랑은 없다고 믿었고, 자신의 감정마저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모든 비극의 원인이며 끝내 본인까지도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에겐 미코, 미키, 아키라에게서 이어진 바톤을 료가 받지 않고 바닥에 떨어트리는 장면이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슬펐다. 그는 인류에게도 자신에게도 가혹한 대가를 치르게 한 뒤에야 사랑을 배우게 된 것이다. 원작은 안 봤지만, 원작에 비해 전체적인 캐릭터성이 어린 애처럼 변한 것 같다. 인류가 멸망해야 하는 이유가 '지구를 더럽히기 때문에'에서 단순히 '약하기 때문에'로 변한 것이나, 아키라와 싸운 이유도 '아키라를 사랑하지만 어쩔 수 없이'에서 감정을 자각하지 못한 채 '아키라가 자신을 거스르니까'로 변한 것 등. 원작의 사탄 팬이라면 실망할지 모르겠만, 내 입장에서는 적절한 변경이었다. '인간은 악하다'는 아이디어는 데빌맨 원작 이후에 너무나도 많이 우려먹어 이미 한참 낡아버린 주제기 때문이다. 하지만 힘의 논리는 어떤 의미에서 절대적이며 영원히 낡지 않을 것이다. . 2. 후도 아키라 작품의 주인공이지만, 사실 아주 수동적인 캐릭터이다. 어릴때부터 툭하면 남을 위해 우는 울보일만큼 선한 본성을 가졌다. 하지만 그때문에 남을 너무 쉽게 믿어버리고 휘둘린다. 의존할 대상이 필요한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래서 작중의 아키라를 둘러싼 인간관계는 아스카 료와 마키무라 미키가 줄다리기를 하는 모양새가 된다. 최강의 악마 아몬에게 지지 않고 마지막까지 인간으로서의 이성을 유지한 채 싸우기를 결심하는 주체성을 마지막까지 보여주지만, 그건 모두 미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 3. 마키무라 미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사건을 일으킨 건 사탄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아키라를 움직인 건 언제나 미키였다. 아키라에게 싸워야할 이유, 그 이전에 인간이어야 할 이유를 부여해준 것이 바로 미키다. 미키는 정말 강한 캐릭터이다. 사람들에게 의심받고 스스로도 확신이 없을 때 처음부터 아키라의 마음은 변한 적이 없다고 믿고 구해준 것도, 죽음을 각오하고 아키라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고 호소한 것도, 다른 데빌맨들이 "나도 데빌맨이다"를 외치며 최후에 아키라와 함께 싸우게 만든 것도 모두 미키다. 그렌라간에서의 시몬의 형 카미나와 비교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도 훨씬 근원적인 역할을 하는 캐릭터이다. 어쩌면 '사람 사이의 사랑과 믿음'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4. 마키무라네 가족들 모두 정말 강하고 올곧은 캐릭터들이었지만 그렇기에 그들이 맞은 비극은 더 끔찍하게 느껴진다. 남동생 타로는 7화 시작부터 데빌맨으로 변한다. 타로의 자아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으므로 악마가 아닌 데빌맨으로 변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하지만 식욕과 충동이 강해지는 건 마찬가지이다. 타로가 사람을 해치지 않도록 어머니인 아키코는 타로에게 자신을 잡아먹도록 한다. 그리고 그 장면을 아버지인 노엘이 보고 만다. 노엘은 갈등한다.그것은 여전히 내 아들인가, 그렇지 않은가. 그것을 쏴야하는가, 아닌가. 어느 쪽이든 지옥으로 향하는, 출구 없는 딜레마 속에서 노엘이 번뇌하는 모습은 모든 매체를 통틀어 내가 접한 절망 중 가장 깊은 것이었다. 영화 <곡성>에서 본 딜레마가 떠올랐다. 가장 깊은 절망은 딜레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 5. 쿠로다 미키(미코) 미코는 언제나 미키의 그늘에 가려 지냈고, 미코라고 불리며 미키에게 이름마저 빼았긴 셈이다. 그래서 미코에게 마유타(쿠쿤)의 "누군가 나를 사랑해서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게 해줘"라는 고백은 남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열등감과 질투심을 가지는 동시에 미키를 사랑하고 있었고, 그 마음은 데빌맨이 된 뒤 남아있는 본능 중 하나일 정도였다. 미키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는 자신을 깨닫고 분노하는 건, 그 사랑을 인정하는 게 미키에게 이길 수 없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미코에게는 미키에게 이겨 이름을 되찾는 것이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는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코는 결국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바로 미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인정하는 것이다. 미키를 미워하는 자신, 미키를 사랑하는 자신을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장면은 정말 뭉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