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E
5.0

잔느 딜망
영화 ・ 1975
평균 4.0
그야말로 첫 숏에서부터 숨이 턱하고 막힌다. 헤드룸을 비롯해서 인물의 위아래 모두 여백이 거의 없을 정도로 딱 맞는 숏 사이즈에다 가스레인지와 식탁 사이에 인물을 위치시킨다. 그러고는 돌연 프리즈 프레임이 이어지고, 웬 남자를 맞이하더니 ㅡ남자와 대화를 나눌 때조차 잔느의 머리와 허리 부분은 잘린 채 파편적으로 프레이밍된다ㅡ 방으로 들어간다. 캄캄해지고 나서야 말없이 나와 돈을 주고 받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노동의 반복. 거실엔 저녁마다 밖에서 비쳐 들어오는 정체 모를, 착란적인 조명이 어른거린다. <잔느 딜망>은 관습적인 일반 영화에서라면 몽땅 내다 버렸을 장면들로만 거의 채워진다. 몸을 씻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준다든지, 요리를 하고 음식을 차리는 장면을 리얼타임에 가깝도록 비춘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들을 깨우고, 옷을 꺼내고, 구두를 닦고, 커피를 내리고, 아침을 차린다. 학교가는 아들을 배웅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노동의 연속. 설거지를 하고, 침구를 정리한다. 외출해서도 마찬가지다. 은행에 들르고, 아들의 구두 수선을 맡긴다. 집에 돌아와 다시 요리를 하고, 지인의 아이를 잠시 맡아 돌보고, 혼자 점심을 먹는다. 다시 외출, 아들의 잃어버린 단추와 똑같이 생긴 걸 찾아다니고, 귀가, 매춘. 다시 청소를 하고, 재료를 다듬고, 요리. 아들과 식사를 하고, 잠시 산책을 나갔다 집에 돌아와 잠에 든다. 일반적인 영화는 물론이거니와 일상생활에서조차 거의 의식하지 않을 데드 타임, 말 그대로 ‘일상’으로 체화된 리듬을 끊임없이 그려낸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침묵적으로, 또 눈높이보다 살짝 아래에서 찍은 구도에다 잔느의 키에 맞게끔 위아래가 꽉 막힌 사이즈, 갖가지 가구들과 벽들로 이루어진 좁은 프레임으로 질식할 것처럼 구성된다. 특히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장면은 거의 관에 갇혀 있는 듯이 보일 정도다. 가사 노동과 성 노동, 엄마와 창녀의 역할만을 수행하는 잔느에게 일상이라는 데드 타임은 문자 그대로 ‘dead’ time처럼 보인다. 만약 <패터슨>이 일상-노동의 희망 편이었다면, <잔느 딜망>은 그 절망 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패터슨>이 일주일간 반복되는 일상 속 자그마한 변주들로 삶의 행복과 아름다움을 발견했다면, 첫째 날에서부터 셋째 날까지의 노동을 그린 <잔느 딜망>의 변주는 위태로운 균열이다. 단지 사흘간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이토록 숨 막히는 리듬을 보고 있자면, 셋째 날의 살인, 그러니까 반-일상을 (개연성 따위는 상관없이) 그저 수용하게 된다. 살인마저도 지극히 무심하게,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잔느의 살인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던 일-또 다른 노동-처럼 느껴진다. 서서히 균열에 이르렀다기보다는 그간의 (누적된) 균열이 마침내 가시화된 것에 지나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취향을 빌려) 빗대자면 ‘큐어’적 사건. 언젠가 매일노동뉴스에서 이런 칼럼을 본 적이 있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쓰는” 글쓰기는 지난한 작업이지만 “지난하게 쓰다 보면 인간과 사물을 더 깊게 들여다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 (...) 글의 지난함은 감정이든, 생각이든, 어떤 현상이든 당장 표현하는 걸 주저하게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틈은 숙성할 시간을 준다. / 빠르고, 간결하고, 압축적인 걸 원하는 우리 사회에서 글쓰기는 일종의 브레이크다. 그런 면에서 많은 노동자가 글을 쓰면 좋겠다. 특히 자신의 노동을 말이다. 노동자는 자본의 무자비한 속도에 노출돼 있다. (...) 자본의 구심력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똑같은 사이클이 반복될 뿐이다. 노동자의 글쓰기는 자본의 시간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볼 계기를 제공해준다.” 필자는 글쓰기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긴 하지만, 문득 <잔느 딜망>을 보면서 그 글이 생각났다. <잔느 딜망>의 지난하고 지루하고 느린 노동-리듬도 어떤 브레이크인 건 아닐까. 그게 필자의 말처럼 ‘자본’에 대한 브레이크인지, 페미니즘 해석들처럼 ‘여성 억압’에 대한 브레이크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잔느 본인도 모르지 않을까. 그러나 <잔느 딜망>이 영화적, 극적, 자본적, 남성적으로 내달리던 어떤 구심력을 멈춰 세우고 말을 건네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마지막 7분은 과연 그게 무엇인지, 무엇을 멈춰 세우고, 전복하고, 혹은 죽였는지에 대한 잔느-감독-관객이 함께하는 숙고일 것이다. 앞선 글의 필자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노동자가 노동자인 이유는 결국 매일 반복되는 노동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리고 글을 쓰며 나의 노동을 낯설게 보다 보면 그것을 직시할 수 있다.” <잔느 딜망>이 보여준 사흘간의 기록 역시 친숙하고 일상적인 노동의 행위를 낯설게 바라보고, 또 직시하는 시간을 마련해준다. 물론 세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녹록지는 않지만, 일반적인 영화와 같이 두 시간 남짓이었더라면 이 시간의 무게감이 이만치 와닿진 않았을 거라 확신한다. 그러니까 <잔느 딜망>의 (너무도 일상적이라 낯설고, 영화적이지 않아 영화적인) 시간은 노동을, 여성을, 육체를, 삶을 재구성한다. 필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화가 영화인 이유는 결국 시간을 기록하기’ 때문이 아닐까. <잔느 딜망>이 재조립한 시간의 구성은, 장 엡스탱의 말처럼, “(영화는) 단순히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진실’이라 할 무한한 운동을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