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느 딜망
Jeanne Dielman, 23 Quai Du Commerce, 1080 Bruxelles
1975 · 드라마 · 벨기에, 프랑스
3시간 2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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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매춘하는 젊은 가정주부의 일상을 건조하게 담은 영화, 성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의 공간 가정에 대한 고찰. 잔느는 어린 아들을 키우며 집에서 매춘하는 젊은 가정주부이다. 그러나 한 손님의 방문과 함께 잔느의 일상은 기이하게 무너지고, 그녀는 실수를 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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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드
5.0
일상은 피로하고 일탈은 허망하다
Jay Oh
4.0
단조로워 보이는 일상의, 수압을 견뎌내던 댐의 균열. The menial serenity of overbearing strain.
JE
5.0
그야말로 첫 숏에서부터 숨이 턱하고 막힌다. 헤드룸을 비롯해서 인물의 위아래 모두 여백이 거의 없을 정도로 딱 맞는 숏 사이즈에다 가스레인지와 식탁 사이에 인물을 위치시킨다. 그러고는 돌연 프리즈 프레임이 이어지고, 웬 남자를 맞이하더니 ㅡ남자와 대화를 나눌 때조차 잔느의 머리와 허리 부분은 잘린 채 파편적으로 프레이밍된다ㅡ 방으로 들어간다. 캄캄해지고 나서야 말없이 나와 돈을 주고 받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노동의 반복. 거실엔 저녁마다 밖에서 비쳐 들어오는 정체 모를, 착란적인 조명이 어른거린다. <잔느 딜망>은 관습적인 일반 영화에서라면 몽땅 내다 버렸을 장면들로만 거의 채워진다. 몸을 씻는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여준다든지, 요리를 하고 음식을 차리는 장면을 리얼타임에 가깝도록 비춘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들을 깨우고, 옷을 꺼내고, 구두를 닦고, 커피를 내리고, 아침을 차린다. 학교가는 아들을 배웅하고 나서도 계속해서 노동의 연속. 설거지를 하고, 침구를 정리한다. 외출해서도 마찬가지다. 은행에 들르고, 아들의 구두 수선을 맡긴다. 집에 돌아와 다시 요리를 하고, 지인의 아이를 잠시 맡아 돌보고, 혼자 점심을 먹는다. 다시 외출, 아들의 잃어버린 단추와 똑같이 생긴 걸 찾아다니고, 귀가, 매춘. 다시 청소를 하고, 재료를 다듬고, 요리. 아들과 식사를 하고, 잠시 산책을 나갔다 집에 돌아와 잠에 든다. 일반적인 영화는 물론이거니와 일상생활에서조차 거의 의식하지 않을 데드 타임, 말 그대로 ‘일상’으로 체화된 리듬을 끊임없이 그려낸다. 그리고 그 순간들은 침묵적으로, 또 눈높이보다 살짝 아래에서 찍은 구도에다 잔느의 키에 맞게끔 위아래가 꽉 막힌 사이즈, 갖가지 가구들과 벽들로 이루어진 좁은 프레임으로 질식할 것처럼 구성된다. 특히 집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장면은 거의 관에 갇혀 있는 듯이 보일 정도다. 가사 노동과 성 노동, 엄마와 창녀의 역할만을 수행하는 잔느에게 일상이라는 데드 타임은 문자 그대로 ‘dead’ time처럼 보인다. 만약 <패터슨>이 일상-노동의 희망 편이었다면, <잔느 딜망>은 그 절망 편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패터슨>이 일주일간 반복되는 일상 속 자그마한 변주들로 삶의 행복과 아름다움을 발견했다면, 첫째 날에서부터 셋째 날까지의 노동을 그린 <잔느 딜망>의 변주는 위태로운 균열이다. 단지 사흘간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이토록 숨 막히는 리듬을 보고 있자면, 셋째 날의 살인, 그러니까 반-일상을 (개연성 따위는 상관없이) 그저 수용하게 된다. 살인마저도 지극히 무심하게,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잔느의 살인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던 일-또 다른 노동-처럼 느껴진다. 서서히 균열에 이르렀다기보다는 그간의 (누적된) 균열이 마침내 가시화된 것에 지나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취향을 빌려) 빗대자면 ‘큐어’적 사건. 언젠가 매일노동뉴스에서 이런 칼럼을 본 적이 있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쓰는” 글쓰기는 지난한 작업이지만 “지난하게 쓰다 보면 인간과 사물을 더 깊게 들여다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 (...) 글의 지난함은 감정이든, 생각이든, 어떤 현상이든 당장 표현하는 걸 주저하게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틈은 숙성할 시간을 준다. / 빠르고, 간결하고, 압축적인 걸 원하는 우리 사회에서 글쓰기는 일종의 브레이크다. 그런 면에서 많은 노동자가 글을 쓰면 좋겠다. 특히 자신의 노동을 말이다. 노동자는 자본의 무자비한 속도에 노출돼 있다. (...) 자본의 구심력에 브레이크를 걸지 않으면 똑같은 사이클이 반복될 뿐이다. 노동자의 글쓰기는 자본의 시간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볼 계기를 제공해준다.” 필자는 글쓰기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긴 하지만, 문득 <잔느 딜망>을 보면서 그 글이 생각났다. <잔느 딜망>의 지난하고 지루하고 느린 노동-리듬도 어떤 브레이크인 건 아닐까. 그게 필자의 말처럼 ‘자본’에 대한 브레이크인지, 페미니즘 해석들처럼 ‘여성 억압’에 대한 브레이크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잔느 본인도 모르지 않을까. 그러나 <잔느 딜망>이 영화적, 극적, 자본적, 남성적으로 내달리던 어떤 구심력을 멈춰 세우고 말을 건네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마지막 7분은 과연 그게 무엇인지, 무엇을 멈춰 세우고, 전복하고, 혹은 죽였는지에 대한 잔느-감독-관객이 함께하는 숙고일 것이다. 앞선 글의 필자는 이런 말을 덧붙인다. “노동자가 노동자인 이유는 결국 매일 반복되는 노동에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리고 글을 쓰며 나의 노동을 낯설게 보다 보면 그것을 직시할 수 있다.” <잔느 딜망>이 보여준 사흘간의 기록 역시 친숙하고 일상적인 노동의 행위를 낯설게 바라보고, 또 직시하는 시간을 마련해준다. 물론 세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녹록지는 않지만, 일반적인 영화와 같이 두 시간 남짓이었더라면 이 시간의 무게감이 이만치 와닿진 않았을 거라 확신한다. 그러니까 <잔느 딜망>의 (너무도 일상적이라 낯설고, 영화적이지 않아 영화적인) 시간은 노동을, 여성을, 육체를, 삶을 재구성한다. 필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화가 영화인 이유는 결국 시간을 기록하기’ 때문이 아닐까. <잔느 딜망>이 재조립한 시간의 구성은, 장 엡스탱의 말처럼, “(영화는) 단순히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진실’이라 할 무한한 운동을 기록”한다.
재윤
5.0
스크린 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가사노동과 성노동을 보다보면 누구라도 이 결말이 맞다고 생각할 거다.
토끼나루
4.5
<잔느 딜망>이 2022년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선정한 'Greatest Film'의 맨 윗자리를 차지했다. (누군가에게는 당황스러운 목록의 연속일 것이며 어떤 이들은 거절의 제스처를 보낼 것이다. 하지만 그 거절의 몸짓이 커질수록 담론의 각주는 사라지고 그들의 결론은 오히려 단순해질 것이다. 나는, 보편적인 것을 지향한다고 주장하며 고전주의자로 위장한 이들의 방어기제를 경계한다.) 그들의 호들갑에게는 미안하지만, <잔느 딜망>이 적어도 열손가락 안으로 들어올거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무려 '10년'의 시간이었다. 알다시피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새로운 '족보'를 준비하는 시간이었으며 그동안 우리는 충분히 '어떤 순간'을 마주해왔다. 그리고 그 순간은 '기어코' 왔다. 현재 흔히 이야기하는 'PC함'이라고 하는 것을 '현상'으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여기서 옳고 그름을 따져 물으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PC함이라고 하는 것을 경멸하는 이들에게 작금의 이런 현상은 어디까지나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상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이것을 예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특별하게 '주장'하는 것이 있지도 않다. 그들은 '주장하지 않기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언어는 갈수록 영화비평보단 판결문에 가까워진다. (물론 못난 판결문은 어느 방향에서나 닮아있다.) 판결문을 속독하는 사람들이 늘때마다 세상은 그만큼 변해갔다. '창작'과 '시청' 사이에 간극 사이에서 그들은 독립된 섬이 되어갔다. 창작을 부정하거나, 시선을 부정하거나. 일종의 러시안 룰렛. 때로는 명백하게 작품을 향해 쏘지만 이따금 그것은 자신의 머리를 겨냥한 위태로운 외줄타기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것은 영화를 단지 '마스터베이션'의 도구로 베팅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전언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그것이 과연 <잔느 딜망>을 '체감'하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느냐는 것이다. 자신의 감각을 기호덩어리로 만든 다음에 자신의 예민한 사회적 감각을 자랑하며 <잔느 딜망>을 창고에 방치하는 것이 '겨우' 대답이 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다. 아직도 <잔느 딜망>은 물음을 요청해야 하는 영화다. 히치콕에 대한 질문이 유효하듯이, 샹탈 애커만에 대한 질문도 유효하다. 질문은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다. 만약 그 방어가 선별적이라면 그것은 갇혀진 미적취향 때문인가, 아니면 정리되어진 자신의 영화사가 권력을 쥐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그들의 선택은 왜 <잔느 딜망> 이었는가? 물론 샹탈 애커만에 대한 추모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 지난 10년 사이에 우리는 샹탈 애커만의 신작을 볼 행운을 영영 잃어버렸다. 이렇게 표현해 볼 수도 있다. 고작 20대의 나이에 샹탈 애커만은 <잔느 딜망>을 연출했다. 그리고 또 한명의 천재, 오슨 웰스가 당시의 애커만과 멀지 않은 나이에 <시민 케인>을 연출했다. '이제는' 이 둘의 솜씨와 천재성을 같은 선상에서 논해볼 여지가 있지 않은가라고 질문해볼 수 있다. 하지만 함정도 있다. <잔느 딜망>에 대해 충분히 질문해 볼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채 그 명성이 섣불리 다가왔다고 느끼는 평자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잔느 딜망>은 아시다시피 '1975년'의 영화다. 영화산업은 빠른 속도로 영역을 확장했고 이것을 달리 얘기하면 그만큼 시네필에게 '죽기 전에 꼭 봐야할 영화'의 리스트가 넓어져 간다는 의미기도 하다. 더군다나 이 과정이 '다시보기'를 요청하는 순간에 이르렀을때, 또는 충분히 안다고 생각했던 고전의 시대가 자신을 '다시 발굴'하기를 시네필에게 요청했을때. 그 당혹감은 해당영화가 누리게 된 영예보다도 더 먼저 찾아온다. 결국 이렇게 자문하게 된다. 고전을 '과식'하는 시대에, 고전을 재발견하는 것은 과연 '기쁨'인가? 분명, 당신이 영화를 사랑한다면 이것은 슬픔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반드시 희열로 작용하는가. 이번의 리스트는 전반적으로 당신에게, '고전'을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기까지 나름대로 쌓아왔던 사유에 새로운 허들이 되거나 찬물을 끼얹는 냉대가 될 것이다. 연장전에 들어선 축구선수의 허벅지처럼 슬슬 과부하에 돌입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달리고 있다면 당신은 이 고통에 중독된 사람이다. 분명히 이 리스트는 누군가에게 '통증'의 연속이다. 결국, <잔느 딜망>은 우리에게 영화를 통해 '그녀'를 다시 보길 요청하고 있다. 우리는 묻거나, 물을 것이다. 이 지난한 과정의 시간이 영화에 반드시 '필요'한가요? 동시에 샹탈 애커만은 묻고 있다. 그 지난한 과정이 기어코 '삶'이라면 삶은 Life를, 인간을 어떻게 채우나요? 그 (영화에)라는 조건을 잠시 소거한 다음, 당신의 삶에 그런 '순간들'이 어떻게 함께하고 있는지 묻고 있다. 물론 영화는 온전한 'Life'가 될 수 없다. 영화는 Life가 아니라 'Life Style'을 담아낼 수 밖에 없다. 영화 역시도 예술이다. ('예술영화'라는 웃기는 표현이 여전히 유효한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영화 역시 예술이다.) 예술은 삶을 형식화하는 것이다. 그 형식과 철학과, 미학이 떨어지지 않을때. 우리는 그것을 좋은 영화라고 부른다. <잔느 딜망>은 '지난한 방식'으로 '지난한 삶'을 그려낸다. 어딘가 <잔느 딜망>보다 더 완벽한 서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지독한 '이미지 내러티브'는 달리 찾기 힘들다. (오로지 왕빙의 영화 한 편만이 맞겨룰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 지난함에서 당신이 긍정했던, 또는 연민했던, 또는 구원받았던 일상을 되찾길 원한다. 우리 일생에 한 부분을 차지했던 각자의 '그녀'를 떠올린다면 내가 표현한 구원이 무슨 의미인지는 다들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발터 벤야민은 '이미지의 복제'를 이야기했다. <잔느 딜망>은 지금도 일상에서 복제되고 있는 나, 그리고 당신, 우리의 '이미지'다. 단지 회화적 이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잔느 딜망> 속 '리듬'을 떠올려주길 바란다. 장르의 문법을 벗어난 리듬은 영화에서 어떻게 인물과 공생할 수 있을 것인가. <잔느 딜망>은 진실을 '포착'한데서 그친 영화가 아니다. 그 리듬을 '재현'한 영화다. 오슨 웰스가 말했다. "존 포드가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때, 우리가 어떻게 이 땅 위에서 빚어졌는지 볼 수 있습니다." <잔느 딜망>은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영화가 아니다. 지금 온 세상이 병원이다. 이 리듬을 갖춘 '제대화'가 영화라는 모퉁이에 걸려져 있다. 누군가는 이 복도를 운명처럼 걷게 될 것이다. 여담. 나는 이번 리스트의 1,2,3위를 <동경이야기>,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현기증>으로 예상했었다. 세 편 다 10위 안에 안착했지만 오히려 가늠하지 못한 영화들이 눈에 밟혔다. <화양연화>, <아름다운 직업>, <멀홀랜드 드라이브>, <사랑은 비를 타고>가 그렇다. 네 작품 다 상위권을 내정받은 영화이지만 이렇게까지 호명도가 높을지는 몰랐다. <선라이즈>, <게임의 규칙>, <시민 케인>, <수색자>, <대부>는 건재했지만 아녜스 바르다와 마야 데렌의 이름이 더 눈길을 끈다. 누군가에게는 이 둘의 이름이 앞선 고전의 이름보다 안도감을 주었을 것이다. 지난 10년 간 우리의 곁을 떠나간 또 다른 이름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클로즈업> 역시 이전보다 높은 순위에 등재되었다.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 구로사와의 <7인의 사무라이>,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으로 이어지는 목록은 언제봐도 황홀경의 연속이다. <동경이야기>를 제외한 오즈 영화의 대표격으로 승천 중인 <만춘>은 여전히 상위권에 자리했고,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은 또 봐도 반갑다. 그리고 예상대로 스파이크 리의 <똑바로 살아라>가 고전 사이에 합류했다. (<보이즈 앤 후드>가 그 근처 순위에는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21세기에도 영화의 수도승으로 추앙받는 로베르 브레송, 광대이자 마법사인 페데리코 펠리니, 영혼의 영화장인 타르코프스키도 역시나 함께했다. 잊어서는 안 될 또 한 명의 여성감독, 베라 치틸로바의 <데이지즈>가 상위권에 랭크된 것은 <잔느 딜망> 못지 않은 '사건'이었다. <사냥꾼의 밤>, <쇼아>, <택시 드라이버> 처럼 씨네필이라면 반드시 봐야할 영화들이 이어지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리스트에 지진을 일으킨다. 롤링스톤 500대 명곡에서 비욘세의 <Formation>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싸이코>는 여전히 올라갈듯말듯 10년전과 비슷한 자리를 맴돌고 있고 <라탈랑트>, <아푸 : 길의 노래>, <시티 라이트>, <엠>은 여전히 시네마가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듯 고요히 서 있다. 올해 우리와 안녕을 고한 고다르의 영화 중에선 아직까지도 <네 멋대로 해라>의 순위가 제일 높았고, 빌리 와일더의 <뜨거운 것이 좋아>는 코미디 경전의 힘을 다시금 보여줬다. <이창>, <자전거 도둑>, <라쇼몽>이 마치 '시선 3부작'처럼 연달아 랭크되었고, 찰스 버넷의 <양 살해자>는 <똑바로 살아라> 이전의 <똑바로 살아라>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배리 린든>의 랭킹은 이 작품이 큐브릭의 남바투임을 굳히는 것처럼 보이고 <알제리 전투>,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오데트>는 다시 호명됐다. <완다>는 과소평가된 걸작으로서 위치를 재점화했으며, <400번의 구타>는 트뤼포의 대표작으로 기억되고 있음을 재차 보여준다. (이제는 <아메리카의 밤>이 호명될 시간이 아닌가 싶다.) 제인 캠피온의 다른 문제작들을 제치고 역시 <피아노>가 랭크되었으며,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파스빈더의 다른 영화들을 대신했다. 애커만의 또 다른 걸작, <집에서 온 소식>과 고다르의 <경멸>, 이제는 SF의 고전이 된 <블레이드 러너>, 급속도로 순위가 하락한 <전함 포템킨>, 지지자가 많은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이제는 <제너럴>을 제낀) <셜록 주니어>, (이제는 <활주로>를 제낀) 크리스 마르케의 <태양 없이>,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이 뒤를 이었다. 불현듯 등장했던 <문라이트>는 우리시대의 새로운 고전이 될 준비를 마친 듯하다. 이 리스트에서 생전 처음 보는 영화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Daughters of the Dust>는 내 뒷통수를 강하게 때렸으며, <좋은 친구들>, <제3의 사나이>, <카사블랑카>는 좋은 다이얼로그에 합당한 순위를 배정받았다. <투키 부키>는 10년 전에 이어 계속해 아프리칸 시네마의 힘을 대표했고, 파웰&프레스버거의 화려함, 아녜스 바르다의 정직한 재치, 프리츠 랑의 스케일이 뒤를 잇는다. <정사>와 <이탈리아 여행>은 순위하락을 감당해야 했고, 미야자키 하야오 월드의 대표작 <이웃집 토토로>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분투를 이어온 픽사와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제치고 랭크인 되었다. 훌륭한 엔딩시퀀스를 보여준 <슬픔은 그대 가슴에>가 여전히 서크의 대표작으로 인지되고 있었고, <산쇼다유>, <선셋대로>, (이제는 90년대 최고의 걸작들이라고 불려지는) <사탄탱고>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토리노의 말>과 <비정성시> 대신 자리하고 있다. <모던 타임즈>, <셀린느와 줄리, 보트 타러 가다>, <벌집의 정령>, <미치광이 피에로>, (또 다른 고다르의 역작) <영화사>가 함께한다. <샤이닝>은 100편 안에 포함된 것에 만족해야 했고, <중경삼림>은 <화양연화>와는 거리가 멀어졌고, 21세기 가족영화 속 두개의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기생충>과 <하나 그리고 둘>이 쌍둥이처럼 붙어있다. 이제는 고전주의자들도 조금씩 기피하는 <우게츠이야기>와 <레오파드>, <마담 드>, <사형수, 탈출하다>가 이어지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가 스파게티 웨스턴의 자존심을 세운다. (서부극은 리스트에서 단 두 편이다.) 리스트에 포함되어야 마땅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열대병>으로 랭크인했으며 우스만 셈벤은 <Black Girl>은 드디어 빛을 발했다. <제너럴>은 기어코 살아남았으며, 조던 필의 <겟 아웃>은 새로운 시대의 장르영화를 대변하듯 위치하고 있다. 득표한 전체 영화 리스트와, 개별 영화인들이 뽑은 리스트를 봐야 알겠지만 여성감독의 진전이 있었던 것과 별개로 여전히 아시아 영화나 남미, 아프리카 영화에 대한 자리는 요원해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서구영화 안에서도 편중된 로컬지향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관심이 있는 시네필은 알겠지만, 이 리스트를 뽑아낸 사이트 앤 사운드의 최근 호는 한국영화 특집이었다. 호기로움과 별개로 한국영화 중에서는 <기생충>이 유일하게 100위 권 안에 위치했다. <하녀>, <오발탄>, <만다라> 등을 리스트에서 보는 일은 10년 뒤로 다시 미뤄졌다. (물론 10년 뒤에 그 자리에 <하녀> 대신 김보라 감독의 신작이, <만다라> 대신 미래에 입봉할 신인 감독의 데뷔작이 자리할지도 모른다.) 장르영화에 대해선 고전영화건 21세기 영화건 평가가 야박한 편이었고, 우리시대 최고의 재능이라고 불릴만한 폴 토마스 앤더슨, 쿠엔틴 타란티노, 크리스토퍼 놀란, 알폰소 쿠아론의 자리는 그 곳에 없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도 그 자리에 없었으며, 다르덴 형제와 켄 로치는 또 다른 결산의 자리를 기대해야만 하게 되었다. 왕빙의 <철서구>가 아직 전세계 평단의 고른 지지를 받기엔 인지도가 부족하며, 이창동에 대한 서구 평단의 평가는 어쩌면 향후의 일일지도 모르겠다. 벌써부터 대안의 목록을 작성하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부디 당신의 사유가 '소통'과 '발견'의 결실을 맺길 바라겠습니다. 사담. 왓챠 혹은 왓챠피디아가 매각된다는 소문이 돈다. 누군가가 밤을 새워, 사유를 거듭해 꺼내놓은 소중한 담화들이 모래처럼 하루아침에 사라지길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당신의 언어가 전이되길 원한다. 그럼에도 세상은 변할 것이다. (다시 한번) 그럼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전염시킬 것이다. 당신이 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영화의 친구가 되는 것을 낙담하지 않는 이상 존재할 것들. 그것을 보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전염시키길 기도하겠습니다. 해를 넘겨가는 2022년이라는 기호. 그 안에 새겨진 감정을 통해 기호를 '기억'으로 바꿔놓고 싶습니다. 올해, 당신의 마지막 기억은 무엇입니까? 그곳도, 그 시간도, 혹시 영화입니까?
양기연
4.5
일상의 가장 고통스러운 일과의 직전에 프리즈 프레임으로 시간이 멈춘 척 하거나 컷으로 그 순간을 건너뛰어 줌으로써 카메라가 그 순간들을 같이 망각해 줄 때, 카메라는 일견 누군가의 어머니이자 누군가의 미망인 혹은 섹스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으로 규정된 잔느의 일상을 견디게 해 줄 버팀목이 될 것만 같다. 그러나 그 카메라조차, 잔느의 집 안에서 아무리 자리와 구도를 바꾸며 발버둥쳐 보았자 결국 또 다른 벽에 가로막힌 잔느를 바라볼 수밖에 없고, 어쩌다 그 집이란 공간에서 잔느가 벗어나는 순간을 포착하더라도 끝내 다시 집으로 돌아와 철창 같은 엘리베이터로 서서히 희미해져 가는 그 존재를 확인해야만 한다. . (스포일러) . 일상이 덜 감옥 같았던 과거를 꿈꾸게 하던 단추가 영영 되찾을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버리고, 그 일상 너머 미지의 공간을 꿈꾸게 하던 (그리고 그나마 유일하게 자신을 이름으로 불러주는) 페르난드의 선물이 다시 일상 안에 그녀를 가두는 잠옷이었음이 밝혀지고 나면, 이제 더 이상 그녀는 버텨낼 재간이 없다. 자신과 카메라가 늘 외면하고팠던 그 특정한 일과가 기어이 시각화되고 만 그 한복판에서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린 잔느의 얼굴과 집의 벽 위로 무한히 재생되고 다시 무한히 되감아지는 필름 릴의 환영이 덧씌워진다. 그 환영 아래서 그녀는 꿈으로 탈주하려는 듯 눈을 지그시 감아보지만 그 눈은 이내 다시 뜨여 좌절할 수밖에. 필름도 꿈도 단지 조금 다른 양태로 무한히 반복되는 굴레 안에 갇혀 있을 뿐이므로.
Cinephile
4.5
어떤 것이 극도로 평범하고 의례적이라는 것은 한편으로 그것의 탈선이 가져올 절망감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게 한다. 영화로서의 극과 소재를 소름이 돋을만큼 단위 수준으로 초기화시켜 탐구한다
STONE
4.0
일상의 수난은 좁고 기다란 통로처럼 무한히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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