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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나루

토끼나루

3 years ago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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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느 딜망

영화 ・ 1975

평균 4.0

<잔느 딜망>이 2022년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선정한 'Greatest Film'의 맨 윗자리를 차지했다. (누군가에게는 당황스러운 목록의 연속일 것이며 어떤 이들은 거절의 제스처를 보낼 것이다. 하지만 그 거절의 몸짓이 커질수록 담론의 각주는 사라지고 그들의 결론은 오히려 단순해질 것이다. 나는, 보편적인 것을 지향한다고 주장하며 고전주의자로 위장한 이들의 방어기제를 경계한다.) 그들의 호들갑에게는 미안하지만, <잔느 딜망>이 적어도 열손가락 안으로 들어올거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무려 '10년'의 시간이었다. 알다시피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새로운 '족보'를 준비하는 시간이었으며 그동안 우리는 충분히 '어떤 순간'을 마주해왔다. 그리고 그 순간은 '기어코' 왔다. 현재 흔히 이야기하는 'PC함'이라고 하는 것을 '현상'으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여기서 옳고 그름을 따져 물으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PC함이라고 하는 것을 경멸하는 이들에게 작금의 이런 현상은 어디까지나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상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이것을 예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특별하게 '주장'하는 것이 있지도 않다. 그들은 '주장하지 않기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언어는 갈수록 영화비평보단 판결문에 가까워진다. (물론 못난 판결문은 어느 방향에서나 닮아있다.) 판결문을 속독하는 사람들이 늘때마다 세상은 그만큼 변해갔다. '창작'과 '시청' 사이에 간극 사이에서 그들은 독립된 섬이 되어갔다. 창작을 부정하거나, 시선을 부정하거나. 일종의 러시안 룰렛. 때로는 명백하게 작품을 향해 쏘지만 이따금 그것은 자신의 머리를 겨냥한 위태로운 외줄타기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것은 영화를 단지 '마스터베이션'의 도구로 베팅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전언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그것이 과연 <잔느 딜망>을 '체감'하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느냐는 것이다. 자신의 감각을 기호덩어리로 만든 다음에 자신의 예민한 사회적 감각을 자랑하며 <잔느 딜망>을 창고에 방치하는 것이 '겨우' 대답이 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다. 아직도 <잔느 딜망>은 물음을 요청해야 하는 영화다. 히치콕에 대한 질문이 유효하듯이, 샹탈 애커만에 대한 질문도 유효하다. 질문은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다. 만약 그 방어가 선별적이라면 그것은 갇혀진 미적취향 때문인가, 아니면 정리되어진 자신의 영화사가 권력을 쥐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그들의 선택은 왜 <잔느 딜망> 이었는가? 물론 샹탈 애커만에 대한 추모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 지난 10년 사이에 우리는 샹탈 애커만의 신작을 볼 행운을 영영 잃어버렸다. 이렇게 표현해 볼 수도 있다. 고작 20대의 나이에 샹탈 애커만은 <잔느 딜망>을 연출했다. 그리고 또 한명의 천재, 오슨 웰스가 당시의 애커만과 멀지 않은 나이에 <시민 케인>을 연출했다. '이제는' 이 둘의 솜씨와 천재성을 같은 선상에서 논해볼 여지가 있지 않은가라고 질문해볼 수 있다. 하지만 함정도 있다. <잔느 딜망>에 대해 충분히 질문해 볼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채 그 명성이 섣불리 다가왔다고 느끼는 평자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잔느 딜망>은 아시다시피 '1975년'의 영화다. 영화산업은 빠른 속도로 영역을 확장했고 이것을 달리 얘기하면 그만큼 시네필에게 '죽기 전에 꼭 봐야할 영화'의 리스트가 넓어져 간다는 의미기도 하다. 더군다나 이 과정이 '다시보기'를 요청하는 순간에 이르렀을때, 또는 충분히 안다고 생각했던 고전의 시대가 자신을 '다시 발굴'하기를 시네필에게 요청했을때. 그 당혹감은 해당영화가 누리게 된 영예보다도 더 먼저 찾아온다. 결국 이렇게 자문하게 된다. 고전을 '과식'하는 시대에, 고전을 재발견하는 것은 과연 '기쁨'인가? 분명, 당신이 영화를 사랑한다면 이것은 슬픔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반드시 희열로 작용하는가. 이번의 리스트는 전반적으로 당신에게, '고전'을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기까지 나름대로 쌓아왔던 사유에 새로운 허들이 되거나 찬물을 끼얹는 냉대가 될 것이다. 연장전에 들어선 축구선수의 허벅지처럼 슬슬 과부하에 돌입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달리고 있다면 당신은 이 고통에 중독된 사람이다. 분명히 이 리스트는 누군가에게 '통증'의 연속이다. 결국, <잔느 딜망>은 우리에게 영화를 통해 '그녀'를 다시 보길 요청하고 있다. 우리는 묻거나, 물을 것이다. 이 지난한 과정의 시간이 영화에 반드시 '필요'한가요? 동시에 샹탈 애커만은 묻고 있다. 그 지난한 과정이 기어코 '삶'이라면 삶은 Life를, 인간을 어떻게 채우나요? 그 (영화에)라는 조건을 잠시 소거한 다음, 당신의 삶에 그런 '순간들'이 어떻게 함께하고 있는지 묻고 있다. 물론 영화는 온전한 'Life'가 될 수 없다. 영화는 Life가 아니라 'Life Style'을 담아낼 수 밖에 없다. 영화 역시도 예술이다. ('예술영화'라는 웃기는 표현이 여전히 유효한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영화 역시 예술이다.) 예술은 삶을 형식화하는 것이다. 그 형식과 철학과, 미학이 떨어지지 않을때. 우리는 그것을 좋은 영화라고 부른다. <잔느 딜망>은 '지난한 방식'으로 '지난한 삶'을 그려낸다. 어딘가 <잔느 딜망>보다 더 완벽한 서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지독한 '이미지 내러티브'는 달리 찾기 힘들다. (오로지 왕빙의 영화 한 편만이 맞겨룰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 지난함에서 당신이 긍정했던, 또는 연민했던, 또는 구원받았던 일상을 되찾길 원한다. 우리 일생에 한 부분을 차지했던 각자의 '그녀'를 떠올린다면 내가 표현한 구원이 무슨 의미인지는 다들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발터 벤야민은 '이미지의 복제'를 이야기했다. <잔느 딜망>은 지금도 일상에서 복제되고 있는 나, 그리고 당신, 우리의 '이미지'다. 단지 회화적 이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잔느 딜망> 속 '리듬'을 떠올려주길 바란다. 장르의 문법을 벗어난 리듬은 영화에서 어떻게 인물과 공생할 수 있을 것인가. <잔느 딜망>은 진실을 '포착'한데서 그친 영화가 아니다. 그 리듬을 '재현'한 영화다. 오슨 웰스가 말했다. "존 포드가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때, 우리가 어떻게 이 땅 위에서 빚어졌는지 볼 수 있습니다." <잔느 딜망>은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영화가 아니다. 지금 온 세상이 병원이다. 이 리듬을 갖춘 '제대화'가 영화라는 모퉁이에 걸려져 있다. 누군가는 이 복도를 운명처럼 걷게 될 것이다. 여담. 나는 이번 리스트의 1,2,3위를 <동경이야기>,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현기증>으로 예상했었다. 세 편 다 10위 안에 안착했지만 오히려 가늠하지 못한 영화들이 눈에 밟혔다. <화양연화>, <아름다운 직업>, <멀홀랜드 드라이브>, <사랑은 비를 타고>가 그렇다. 네 작품 다 상위권을 내정받은 영화이지만 이렇게까지 호명도가 높을지는 몰랐다. <선라이즈>, <게임의 규칙>, <시민 케인>, <수색자>, <대부>는 건재했지만 아녜스 바르다와 마야 데렌의 이름이 더 눈길을 끈다. 누군가에게는 이 둘의 이름이 앞선 고전의 이름보다 안도감을 주었을 것이다. 지난 10년 간 우리의 곁을 떠나간 또 다른 이름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클로즈업> 역시 이전보다 높은 순위에 등재되었다.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 구로사와의 <7인의 사무라이>,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으로 이어지는 목록은 언제봐도 황홀경의 연속이다. <동경이야기>를 제외한 오즈 영화의 대표격으로 승천 중인 <만춘>은 여전히 상위권에 자리했고,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은 또 봐도 반갑다. 그리고 예상대로 스파이크 리의 <똑바로 살아라>가 고전 사이에 합류했다. (<보이즈 앤 후드>가 그 근처 순위에는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21세기에도 영화의 수도승으로 추앙받는 로베르 브레송, 광대이자 마법사인 페데리코 펠리니, 영혼의 영화장인 타르코프스키도 역시나 함께했다. 잊어서는 안 될 또 한 명의 여성감독, 베라 치틸로바의 <데이지즈>가 상위권에 랭크된 것은 <잔느 딜망> 못지 않은 '사건'이었다. <사냥꾼의 밤>, <쇼아>, <택시 드라이버> 처럼 씨네필이라면 반드시 봐야할 영화들이 이어지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리스트에 지진을 일으킨다. 롤링스톤 500대 명곡에서 비욘세의 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싸이코>는 여전히 올라갈듯말듯 10년전과 비슷한 자리를 맴돌고 있고 <라탈랑트>, <아푸 : 길의 노래>, <시티 라이트>, <엠>은 여전히 시네마가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듯 고요히 서 있다. 올해 우리와 안녕을 고한 고다르의 영화 중에선 아직까지도 <네 멋대로 해라>의 순위가 제일 높았고, 빌리 와일더의 <뜨거운 것이 좋아>는 코미디 경전의 힘을 다시금 보여줬다. <이창>, <자전거 도둑>, <라쇼몽>이 마치 '시선 3부작'처럼 연달아 랭크되었고, 찰스 버넷의 <양 살해자>는 <똑바로 살아라> 이전의 <똑바로 살아라>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배리 린든>의 랭킹은 이 작품이 큐브릭의 남바투임을 굳히는 것처럼 보이고 <알제리 전투>,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오데트>는 다시 호명됐다. <완다>는 과소평가된 걸작으로서 위치를 재점화했으며, <400번의 구타>는 트뤼포의 대표작으로 기억되고 있음을 재차 보여준다. (이제는 <아메리카의 밤>이 호명될 시간이 아닌가 싶다.) 제인 캠피온의 다른 문제작들을 제치고 역시 <피아노>가 랭크되었으며,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는 파스빈더의 다른 영화들을 대신했다. 애커만의 또 다른 걸작, <집에서 온 소식>과 고다르의 <경멸>, 이제는 SF의 고전이 된 <블레이드 러너>, 급속도로 순위가 하락한 <전함 포템킨>, 지지자가 많은 <아파트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이제는 <제너럴>을 제낀) <셜록 주니어>, (이제는 <활주로>를 제낀) 크리스 마르케의 <태양 없이>,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이 뒤를 이었다. 불현듯 등장했던 <문라이트>는 우리시대의 새로운 고전이 될 준비를 마친 듯하다. 이 리스트에서 생전 처음 보는 영화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지만 는 내 뒷통수를 강하게 때렸으며, <좋은 친구들>, <제3의 사나이>, <카사블랑카>는 좋은 다이얼로그에 합당한 순위를 배정받았다. <투키 부키>는 10년 전에 이어 계속해 아프리칸 시네마의 힘을 대표했고, 파웰&프레스버거의 화려함, 아녜스 바르다의 정직한 재치, 프리츠 랑의 스케일이 뒤를 잇는다. <정사>와 <이탈리아 여행>은 순위하락을 감당해야 했고, 미야자키 하야오 월드의 대표작 <이웃집 토토로>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분투를 이어온 픽사와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제치고 랭크인 되었다. 훌륭한 엔딩시퀀스를 보여준 <슬픔은 그대 가슴에>가 여전히 서크의 대표작으로 인지되고 있었고, <산쇼다유>, <선셋대로>, (이제는 90년대 최고의 걸작들이라고 불려지는) <사탄탱고>와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이 <토리노의 말>과 <비정성시> 대신 자리하고 있다. <모던 타임즈>, <셀린느와 줄리, 보트 타러 가다>, <벌집의 정령>, <미치광이 피에로>, (또 다른 고다르의 역작) <영화사>가 함께한다. <샤이닝>은 100편 안에 포함된 것에 만족해야 했고, <중경삼림>은 <화양연화>와는 거리가 멀어졌고, 21세기 가족영화 속 두개의 방법론이라 할 수 있는 <기생충>과 <하나 그리고 둘>이 쌍둥이처럼 붙어있다. 이제는 고전주의자들도 조금씩 기피하는 <우게츠이야기>와 <레오파드>, <마담 드>, <사형수, 탈출하다>가 이어지며,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더 웨스트>가 스파게티 웨스턴의 자존심을 세운다. (서부극은 리스트에서 단 두 편이다.) 리스트에 포함되어야 마땅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열대병>으로 랭크인했으며 우스만 셈벤은 은 드디어 빛을 발했다. <제너럴>은 기어코 살아남았으며, 조던 필의 <겟 아웃>은 새로운 시대의 장르영화를 대변하듯 위치하고 있다. 득표한 전체 영화 리스트와, 개별 영화인들이 뽑은 리스트를 봐야 알겠지만 여성감독의 진전이 있었던 것과 별개로 여전히 아시아 영화나 남미, 아프리카 영화에 대한 자리는 요원해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서구영화 안에서도 편중된 로컬지향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관심이 있는 시네필은 알겠지만, 이 리스트를 뽑아낸 사이트 앤 사운드의 최근 호는 한국영화 특집이었다. 호기로움과 별개로 한국영화 중에서는 <기생충>이 유일하게 100위 권 안에 위치했다. <하녀>, <오발탄>, <만다라> 등을 리스트에서 보는 일은 10년 뒤로 다시 미뤄졌다. (물론 10년 뒤에 그 자리에 <하녀> 대신 김보라 감독의 신작이, <만다라> 대신 미래에 입봉할 신인 감독의 데뷔작이 자리할지도 모른다.) 장르영화에 대해선 고전영화건 21세기 영화건 평가가 야박한 편이었고, 우리시대 최고의 재능이라고 불릴만한 폴 토마스 앤더슨, 쿠엔틴 타란티노, 크리스토퍼 놀란, 알폰소 쿠아론의 자리는 그 곳에 없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도 그 자리에 없었으며, 다르덴 형제와 켄 로치는 또 다른 결산의 자리를 기대해야만 하게 되었다. 왕빙의 <철서구>가 아직 전세계 평단의 고른 지지를 받기엔 인지도가 부족하며, 이창동에 대한 서구 평단의 평가는 어쩌면 향후의 일일지도 모르겠다. 벌써부터 대안의 목록을 작성하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부디 당신의 사유가 '소통'과 '발견'의 결실을 맺길 바라겠습니다. 사담. 왓챠 혹은 왓챠피디아가 매각된다는 소문이 돈다. 누군가가 밤을 새워, 사유를 거듭해 꺼내놓은 소중한 담화들이 모래처럼 하루아침에 사라지길 원치 않는다. 그러므로 어떻게든 당신의 언어가 전이되길 원한다. 그럼에도 세상은 변할 것이다. (다시 한번) 그럼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전염시킬 것이다. 당신이 쓰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영화의 친구가 되는 것을 낙담하지 않는 이상 존재할 것들. 그것을 보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전염시키길 기도하겠습니다. 해를 넘겨가는 2022년이라는 기호. 그 안에 새겨진 감정을 통해 기호를 '기억'으로 바꿔놓고 싶습니다. 올해, 당신의 마지막 기억은 무엇입니까? 그곳도, 그 시간도, 혹시 영화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