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끼나루

잔느 딜망
평균 4.0
<잔느 딜망>이 2022년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선정한 'Greatest Film'의 맨 윗자리를 차지했다. (누군가에게는 당황스러운 목록의 연속일 것이며 어떤 이들은 거절의 제스처를 보낼 것이다. 하지만 그 거절의 몸짓이 커질수록 담론의 각주는 사라지고 그들의 결론은 오히려 단순해질 것이다. 나는, 보편적인 것을 지향한다고 주장하며 고전주의자로 위장한 이들의 방어기제를 경계한다.) 그들의 호들갑에게는 미안하지만, <잔느 딜망>이 적어도 열손가락 안으로 들어올거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무려 '10년'의 시간이었다. 알다시피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새로운 '족보'를 준비하는 시간이었으며 그동안 우리는 충분히 '어떤 순간'을 마주해왔다. 그리고 그 순간은 '기어코' 왔다. 현재 흔히 이야기하는 'PC함'이라고 하는 것을 '현상'으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여기서 옳고 그름을 따져 물으려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건, PC함이라고 하는 것을 경멸하는 이들에게 작금의 이런 현상은 어디까지나 '오지 않았으면 하는 상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이것을 예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이 특별하게 '주장'하는 것이 있지도 않다. 그들은 '주장하지 않기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언어는 갈수록 영화비평보단 판결문에 가까워진다. (물론 못난 판결문은 어느 방향에서나 닮아있다.) 판결문을 속독하는 사람들이 늘때마다 세상은 그만큼 변해갔다. '창작'과 '시청' 사이에 간극 사이에서 그들은 독립된 섬이 되어갔다. 창작을 부정하거나, 시선을 부정하거나. 일종의 러시안 룰렛. 때로는 명백하게 작품을 향해 쏘지만 이따금 그것은 자신의 머리를 겨냥한 위태로운 외줄타기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것은 영화를 단지 '마스터베이션'의 도구로 베팅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전언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그것이 과연 <잔느 딜망>을 '체감'하는 것과 어떤 관련이 있느냐는 것이다. 자신의 감각을 기호덩어리로 만든 다음에 자신의 예민한 사회적 감각을 자랑하며 <잔느 딜망>을 창고에 방치하는 것이 '겨우' 대답이 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다. 아직도 <잔느 딜망>은 물음을 요청해야 하는 영화다. 히치콕에 대한 질문이 유효하듯이, 샹탈 애커만에 대한 질문도 유효하다. 질문은 그들을 잊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다. 만약 그 방어가 선별적이라면 그것은 갇혀진 미적취향 때문인가, 아니면 정리되어진 자신의 영화사가 권력을 쥐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그들의 선택은 왜 <잔느 딜망> 이었는가? 물론 샹탈 애커만에 대한 추모의 의미도 있을 것이다. 지난 10년 사이에 우리는 샹탈 애커만의 신작을 볼 행운을 영영 잃어버렸다. 이렇게 표현해 볼 수도 있다. 고작 20대의 나이에 샹탈 애커만은 <잔느 딜망>을 연출했다. 그리고 또 한명의 천재, 오슨 웰스가 당시의 애커만과 멀지 않은 나이에 <시민 케인>을 연출했다. '이제는' 이 둘의 솜씨와 천재성을 같은 선상에서 논해볼 여지가 있지 않은가라고 질문해볼 수 있다. 하지만 함정도 있다. <잔느 딜망>에 대해 충분히 질문해 볼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채 그 명성이 섣불리 다가왔다고 느끼는 평자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잔느 딜망>은 아시다시피 '1975년'의 영화다. 영화산업은 빠른 속도로 영역을 확장했고 이것을 달리 얘기하면 그만큼 시네필에게 '죽기 전에 꼭 봐야할 영화'의 리스트가 넓어져 간다는 의미기도 하다. 더군다나 이 과정이 '다시보기'를 요청하는 순간에 이르렀을때, 또는 충분히 안다고 생각했던 고전의 시대가 자신을 '다시 발굴'하기를 시네필에게 요청했을때. 그 당혹감은 해당영화가 누리게 된 영예보다도 더 먼저 찾아온다. 결국 이렇게 자문하게 된다. 고전을 '과식'하는 시대에, 고전을 재발견하는 것은 과연 '기쁨'인가? 분명, 당신이 영화를 사랑한다면 이것은 슬픔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반드시 희열로 작용하는가. 이번의 리스트는 전반적으로 당신에게, '고전'을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기까지 나름대로 쌓아왔던 사유에 새로운 허들이 되거나 찬물을 끼얹는 냉대가 될 것이다. 연장전에 들어선 축구선수의 허벅지처럼 슬슬 과부하에 돌입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달리고 있다면 당신은 이 고통에 중독된 사람이다. 분명히 이 리스트는 누군가에게 '통증'의 연속이다.
결국, <잔느 딜망>은 우리에게 영화를 통해 '그녀'를 다시 보길 요청하고 있다. 우리는 묻거나, 물을 것이다. 이 지난한 과정의 시간이 영화에 반드시 '필요'한가요? 동시에 샹탈 애커만은 묻고 있다. 그 지난한 과정이 기어코 '삶'이라면 삶은 Life를, 인간을 어떻게 채우나요? 그 (영화에)라는 조건을 잠시 소거한 다음, 당신의 삶에 그런 '순간들'이 어떻게 함께하고 있는지 묻고 있다. 물론 영화는 온전한 'Life'가 될 수 없다. 영화는 Life가 아니라 'Life Style'을 담아낼 수 밖에 없다. 영화 역시도 예술이다. ('예술영화'라는 웃기는 표현이 여전히 유효한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영화 역시 예술이다.) 예술은 삶을 형식화하는 것이다. 그 형식과 철학과, 미학이 떨어지지 않을때. 우리는 그것을 좋은 영화라고 부른다. <잔느 딜망>은 '지난한 방식'으로 '지난한 삶'을 그려낸다. 어딘가 <잔느 딜망>보다 더 완벽한 서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지독한 '이미지 내러티브'는 달리 찾기 힘들다. (오로지 왕빙의 영화 한 편만이 맞겨룰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 지난함에서 당신이 긍정했던, 또는 연민했던, 또는 구원받았던 일상을 되찾길 원한다. 우리 일생에 한 부분을 차지했던 각자의 '그녀'를 떠올린다면 내가 표현한 구원이 무슨 의미인지는 다들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발터 벤야민은 '이미지의 복제'를 이야기했다. <잔느 딜망>은 지금도 일상에서 복제되고 있는 나, 그리고 당신, 우리의 '이미지'다. 단지 회화적 이미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잔느 딜망> 속 '리듬'을 떠올려주길 바란다. 장르의 문법을 벗어난 리듬은 영화에서 어떻게 인물과 공생할 수 있을 것인가. <잔느 딜망>은 진실을 '포착'한데서 그친 영화가 아니다. 그 리듬을 '재현'한 영화다. 오슨 웰스가 말했다. "존 포드가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때, 우리가 어떻게 이 땅 위에서 빚어졌는지 볼 수 있습니다." <잔느 딜망>은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영화가 아니다. 지금 온 세상이 병원이다. 이 리듬을 갖춘 '제대화'가 영화라는 모퉁이에 걸려져 있다. 누군가는 이 복도를 운명처럼 걷게 될 것이다.
여담. 나는 이번 리스트의 1,2,3위를 <동경이야기>,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현기증>으로 예상했었다. 세 편 다 10위 안에 안착했지만 오히려 가늠하지 못한 영화들이 눈에 밟혔다. <화양연화>, <아름다운 직업>, <멀홀랜드 드라이브>, <사랑은 비를 타고>가 그렇다. 네 작품 다 상위권을 내정받은 영화이지만 이렇게까지 호명도가 높을지는 몰랐다. <선라이즈>, <게임의 규칙>, <시민 케인>, <수색자>, <대부>는 건재했지만 아녜스 바르다와 마야 데렌의 이름이 더 눈길을 끈다. 누군가에게는 이 둘의 이름이 앞선 고전의 이름보다 안도감을 주었을 것이다. 지난 10년 간 우리의 곁을 떠나간 또 다른 이름인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클로즈업> 역시 이전보다 높은 순위에 등재되었다. 잉마르 베리만의 <페르소나>, 코폴라의 <지옥의 묵시록>, 구로사와의 <7인의 사무라이>,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으로 이어지는 목록은 언제봐도 황홀경의 연속이다. <동경이야기>를 제외한 오즈 영화의 대표격으로 승천 중인 <만춘>은 여전히 상위권에 자리했고, 자크 타티의 <플레이타임>은 또 봐도 반갑다. 그리고 예상대로 스파이크 리의 <똑바로 살아라>가 고전 사이에 합류했다. (<보이즈 앤 후드>가 그 근처 순위에는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21세기에도 영화의 수도승으로 추앙받는 로베르 브레송, 광대이자 마법사인 페데리코 펠리니, 영혼의 영화장인 타르코프스키도 역시나 함께했다. 잊어서는 안 될 또 한 명의 여성감독, 베라 치틸로바의 <데이지즈>가 상위권에 랭크된 것은 <잔느 딜망> 못지 않은 '사건'이었다. <사냥꾼의 밤>, <쇼아>, <택시 드라이버> 처럼 씨네필이라면 반드시 봐야할 영화들이 이어지고,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리스트에 지진을 일으킨다. 롤링스톤 500대 명곡에서 비욘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