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준용
4.0

감각의 제국 감독판
영화 ・ 1976
평균 2.8
영화의 배경은 1936년 제국주의 일본이다. 우리에게 폭압적인 이미지로만 기억되는 당시 일본은 수십 년간 잉태해온 내외적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러일전쟁은 러시아뿐 아니라 그들에게도 심각한 재정적 타격을 입혔으며, 1929년에는 대공황이 들이닥쳤다. 정국이 어지러우면 언제나 군인이 정치에 나선다. 일본 군부는 1931년 내각의 승인 없이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그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5년 후인 1936년에는 내각 주요 인사를 살해하는 쿠데타를 준동했다. 1936년은 군국주의 폭주를 시작한 특이점의 해인 셈이다. 일반적인 국가가 아니라 ‘일본 제국’의 폭주를 다루기에 감각의 ‘제국’이라는 표현은 참으로 적절하다. 전시 체제의 총동원령 하에서 세상은 혼란에 빠진다. 반전운동가, 찬성론자, 나 몰라라 하는 자, 선동가가 마구 뒤섞인다. 개인은 존재방식을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선다. 혹자는 카오스 속에서 희망을 찾기도 하지만, 절대다수 소시민은 끊임 없는 허무주의에 빠진다. 세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이제 내 알 바가 아니게 된다. 당장 내 오감을 얼얼하게 해주는 말초적인 것에 집착한다. 1936년을 살아가는 아베 사다와 이시다 키치조는 그러한 전형이다. 경제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소시민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섹스뿐이다. 사다와 키치조의 끊임없는 섹스는 단순한 쾌락의 도구가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염세주의적 욕구의 분출이다. 골목길을 걸어오는 키치조와 일본군 제대가 마주쳐 지나가는 장면은 시대 앞에 무기력한 두 주인공을 표상한다. 일본은 사다로 표상되고, 사다의 성욕은 곧 일본의 정복욕 또는 팽창욕과 동일하다. “벌써 흥건하게 젖었네”라는 꾀죄죄한 꼴 노인의 대사는 애당초 사다에게 적지 않은 성욕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사다가 만나는 남자들은 키치조를 제외하고 아무도 발기할 수 없기에 그의 성욕은 키치조와의 섹스로만 충족할 수 있다. 시대가 일본인에게 무력감을 선사할 때, 그들에게 만족감을 줄 수 있는 것은 다이쇼 데모크라시나 국제연맹 따위가 아니라 오로지 군국주의뿐이었다. 그와의 첫 섹스는 군국주의와 일본의 첫 만남이다. 미국이 일본을 개항할 때 대포를 주렁주렁 단 군함을 앞세운 것을 고려하면, 사다와 키치조 역시 첫 만남에서부터 그 최후가 노정되어 있던 셈이다. 군국주의 폭주를 시작한 일본은 1937년 중일전쟁을, 19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키치조 없이 살아갈 수 없게 된 사다 역시 갈수록 폭력적인 섹스를 요구한다. 그 결과는 파멸, 죽음, 패전이었다. 원형 무대에 헐벗은 사다가 누워 있는 장면은 극동 전범재판에 회부된 도조 히데키를 보는 듯하다. 아이는 네가 한 짓을 다 숨겼냐고 물어본다. 그러나 냉전으로 인해 전범 청산은 흐지부지됐다. 전범들은 고스란히 목숨을 부지해서 전후 내각에서도 권력을 잡았다. 사다는 살아남고 키치조가 죽었듯이, 군국주의는 죽었으나 그를 유희하던 일본은 지금도 살아 있다. 사다가 키치조를 살해한 뒤 몸에 남긴 낙서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사다와 키치조, 영원히 함께.’ 영화가 만들어진 1976년은 60년대 말 촉발한 전학공투회의 운동이 좌절을 맞고 돌이킬 수 없는 구조적 우경화의 초입에 들어선 시기였다. 지식인은 사회 변혁에 실패하자 좌절했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도 그러했다. 전공투 일원으로 일본 사회를 바꿔보려던 그는 70년대 들어 사회가 오른쪽으로 완전히 기울어버리자 좌절감과 허무주의에 빠졌다. 그때 지식인으로서 감독이 할 수 있는 것은 진리의 탐구가 아니라 성에 대한 무한한 천착이었다. <감각의 제국>의 무수히 많은 섹스 신은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당시는 또 다른 사다들이 자신의 욕구를 채워줄 수많은 키치조를 부르짖던 시기였다. 개인을 압도하는 시대의 폭주 앞에서 개인은 얼마나 초라해지는가? 그때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는가? 이 영화는 70년대 일본 지식인의 불가역적 실패를 30년대 군국주의 폭주와 병치하는 대구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