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멘트
홍준영

홍준영

6 years ago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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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책 ・ 1999

평균 4.1

끝나지 않은 이야기. . "많은 세월이 지난 뒤, 총살형 집행 대원들 앞에 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아버지에 이끌려 얼음 구경을 갔던 먼 옛날 오후를 떠올려야 했다."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난 뒤 다시 이 유명한 첫 문장을 읽으면 감회가 새롭다. 물론 '백년의 고독'이 읽는 이로 하여금 부엔디아 가문과 백 년을 동행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하는 흡입력 있는 이야기여서 그렇기도 하지만, 결말에 이르러서야 이 소설 전체가 하나의 예언서(멜키아데스의 양피지)이며, 첫 문장의 '-해야 했다'라는 어미부터가 그 사실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이어지는 "세상이 생긴지 채 얼마 되지 않아 많은 것들이 아직 이름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라는 문장은 읽는 이에게 즉시 다음 단서를 제공한다. 이 소설은 그저 예언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예언서, 천지의 창조와 만물에게 이름을 준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예언서, 성서라는 점을. 이때 읽는 이는 비로소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 물론 마르케스는 성서와 '백년의 고독'을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안일한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가령 마꼰도의 건설자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는 소설 속 태초의 인간이자 모든 인물들의 조상이라는 점에서 아담으로 볼 여지도 충분하지만, 그가 마꼰도를 건설하게 된 계기는 이웃 쁘루덴시오를 살해한 후 감행한 도주였다는 점에서 태초의 살해자 가인(그 역시 아벨을 죽인 후 추방되어 방황하며 큰 족속들의 조상이 된다)으로 볼 수도, 무리를 이끌고 새로운 낙원을 찾는 여정을 이끈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찾는 모세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어떤 해석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태초의 마꼰도를 이해하는 방식 역시 크게 달라진다. 태초의 마꼰도는 '죽음이 없는 공간'으로 아담이 머물던 에덴 동산일 수도 있고, '가인의 낙인'처럼 '돼지꼬리의 저주'가 음산하게 가문을 맴도는 죄악의 씨앗일 수도 있고, 모세의 개척 이후 같은 실수와 과오를 순환적으로 반복했던 가나안 땅일 수도 있다. 감상은 읽는 이에게 맡겨졌지만, 아마 이 모든 상징이 녹아들어 있다고 보는 게 가장 타당할 것이다. 마르케스가 소설의 다른 부분에서도 문학의 모호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성서의 상징들을 복합적으로 배열하는 작업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가령 '레메디오스'라는 이름을 가진 세 여인이 그렇다. 첫 레메디오스는 관계 없이 쌍둥이를 사산하고 죽으며, 두 번째 레메디오스는 홀연히 빨래들과 함께 승천하는데, 이러한 동정녀 출산과 승천의 모티브는 합쳐졌을 때 비로소 성모 마리아를 암시한다. (그런만큼 세 번째 레메디오스가 수녀원에 끌려가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는 점은 마르케스의 반가톨릭적 태도와 맞물려 미묘한 냉소와 풍자의 뉘앙스를 형성한다.) 그러나 마꼰도에 정부가 파견한 시장이 들어오면서 읽는 이는 잠시 성서적 퍼즐맞추기를 미루어야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가 소설에 침투하며 역사라는 더 가깝고 친밀한 레퍼런스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 마꼰도에 시장이 들어오고(그와 함께 마을에 죽음이 시작된다-이는 마꼰도를 에콰도르나 중국 같은 현실 속 국가로 간주하고 소설을 읽어도 좋다는 작가의 허락이다) 나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많은 면에서 영화 '아이리시맨'을 떠오르게 한다. 화법에서는 장애물이나 현학적인 대목 없이 술술 넘어가는 유려한 태도가 닮았고, 스케일 면에서도 수없는 등장인물들과 두어 세대를 포괄하는 시간대가 비슷하게 방대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유사점은 짙은 고독과 무상함이라는 정서를 전달하는 수법이다. '백년의 고독'에서 역사를 참고한 부분은 크게 두 가지로, 아우렐리아노 대령의 반정부 전쟁과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가 목격하는 바나나 농장에서의 학살이 그것이다. 마르케스는 그 현장으로 뛰어들어가 인물들의 행적을 자세히 좇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두 사건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세밀하게 서술되며, 작가는 원근을 조절하며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섬세하게 조망한다. 읽는 이는 정부군이 마꼰도 주민을 학대할 때 대령과 함께 분개하며, 무력 봉기가 일어날 때 같이 통쾌해하고, 대령이 총살대 앞에 섰을 때 똑같이 긴장하다가(첫 문장은 낚시였다!) 그가 풀려났을 때 역시 숨을 돌린다. 바나나 농장에서의 학살과 그 생생한 묘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두 사건은 모두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잊혀진다. 소설은 끊임없이 그 점을 강조한다. "'오오! 그럼, 신부님도 믿지 않으시는군요.' 아우렐리아노가 말했다. '뭘 말인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서른두 번이나 반란을 일으켰고, 모두 패배를 했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군대가 삼천 명의 노무자를 몰아세워 기관총으로 난사했다는 사실, 그리고 화차 이백 량이 연결된 열차로 시체를 운반해 바다에 버린 사실 말이에요.'" 대령이 노쇠했을 때부터 이미 반정부 게릴라전은 전설 비슷한 취급을 받으며 그의 황금 물고기도 기념품이 되어가고 있었으며, 대령이 죽고 나서 전설은 신화가, 다시 잊혀진 신화가 된다. 바나나 농장의 학살은 한술 더 떠, 참사를 목격한 호세가 고향으로 귀환하자마자 주민들의 기억을 모두 지운다(이것도 마술적 리얼리즘의 일부인지, 아니면 역사와 기억마저 통제하는 권력을 고발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호세는 죽는 날까지 "삼천 명 이상이었는데, 죄다 바다에 버려졌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있거라."를 읊조리며 진실을 간직하다 홀로 죽는다. 읽는 이는 너무나 긴박했던 순간들이 세월 앞에 무참히 스러지는 대목을 바라보면서, '아이리시맨'의 늙은 프랭크가 더 이상 지미도, 러셀도 존재하지 않으며 누구도 그들을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을 때 느꼈을 거대한 무상감과 야속함에 사로잡히게 된다. (셋 다 역사의 한복판에서 종횡무진하다 결국 고독한 죽음을 맞는다는 점도 '백년의 고독'과의 감정적 연결고리를 만들어준다.) . 그렇다면 마르케스가 바라보는 역사의 결말 역시 '아이리시맨'의 그것처럼 씁쓸하고 서늘한 것일까. 언뜻 보기에는 그렇다. 태초에 우르술라가 걱정했던 '돼지꼬리의 저주'가 비로소 실현되고 가문을 구원했어야 할 유일한 메시아는 개미떼에게 잡아먹히며,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그의 이름은 성서에서 멸망의 도시를 암시한다)가 멜키아데스의 양피지 예언을 비로소 해독하는 순간 가문은 바람에 날려 소멸하고 만다. 소설은 일말의 에필로그나 후속 서술 없이, 그렇게 느닷없이 이야기를 끝낸다. 열린 문 틈새로 관객을 바라보는 프랭크의 고독한 눈빛이 남기는 여운처럼 소설은 말할 수 없는 고독감을 남긴다. 이야기를 되짚어도 타당한 결말이다. 마꼰도에 외부인이 들어올 때마다 재앙이 있어왔다. 육로로 집시들이 들어오자 불면증의 저주가, 마차로 시장과 군인들이 들어오자 전쟁의 저주가, 철도로 바나나 회사가 들어오자 대홍수의 저주가 있었던 걸 감안하면 공항(!)을 놓자는 가스똔의 제안이 강풍으로 인한 멸망으로 이어졌다고 추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읽는 이는 잠시 잊었던 성서의 존재를 기억해야 한다. 소설의 서두가 천지창조와 인류의 시작을 다룬 창세기와 대응한다면, 예언이 성취되고 현세가 소멸하는 결말은 요한계시록과 대응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멸망의 책이 아니다. 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하늘과 땅은 불타 사라지지만, 요한계시록의 엔딩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과 새 하늘, 새 땅이다. 이는 즉시 죽음에서 돌아온 멜키아데스(또는 멜키아데스의 망령)가 남겼던 예언을 상기시킨다. "마꼰도가 부엔디아 가문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유리로 지은 거대한 집들로 이루어진 번쩍거리는 도시가 될 거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광경은 소설 속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죽은 메시아는 부활해야 한다. 새 하늘과 새 땅, 번쩍거리는 유리도시가 지상에 강림해야 한다. 예언은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에 그 도시가 내려와야 하는가? 이 점에서 요한과 마르케스는 같은 대답을 내놓는다. 바로 네가 있는 그곳에. 마르케스는 반복되는 현실 속에서 고통받는 라틴 아메리카, 나아가 세계를 위해 이 소설을 쓴 것이다. 페이지 바깥, 생동하는 삶의 현장 속에서 읽는 이가 고독과 싸우고 서로 연대할 때, 형과 동생이, 정부와 시민이, 기업과 노동자가 손을 맞잡을 때 비로소 이 작품은 완성된다. 성서가 신의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가짐과 경건한 삶을 촉구하기 위해 요한계시록을 미완의 책으로 남겨둔 수법을 마르케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모방한 것이다. 그렇게 읽는 이는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야 마르케스가 보이지 않게 써둔 결말을 목도한다. 아멘, 주여 오시옵소서. . +인물들 하나하나가 매력과 개성이 흘러넘친다. 읽는 순간에는 흠뻑 빠져들지만 덮고 나서 세세한 에피소드들을 기억하려면 압도적인 분량 때문에 버거운 책이다. 내가 왜 그 인물을 인상깊게 봤는지 알고 싶으면 다시 책을 봐야 한다. +민음사 전집 판본으로 봤다. 형태야 민음사 형태고, 번역이 매끄럽지 않다. 원어인 스페인어로 봤으면 훨씬 재미있고 생생했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자가격리 기념 서문학 걸작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