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적 사실주의의 창시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대표작이자, ‘
소설의 죽음’에 반기를 들고 소설의 부활을 예언한 대작
라틴아메리카의 비극적 역사와 인간 조건에 대한 통찰을 유머에 녹여 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사형이 선고되었을 때 그가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 아니라 삶에 대한 향수였다.”
라틴아메리카 <마술적 리얼리즘>의 창시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대표작
국내 최초로 스페인어 원전에서 완역!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며,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리얼리즘의 창시자로도 널리 알려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대표작 『백년의 고독』이 국내에 최초로 완역, 출간되었다. 민음사는 이 작품을 독점 계약하여 아르헨티나에서 1967년 처음 출판된 판본을 바탕으로 완역하여 출판했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전세계 30여 개국에서 번역 출판되었으며, 2천만 명의 독자를 사로잡은 소설이다.
민음사에서 독점 계약한 이 작품은, 민음사 보르헤스 전집을 완역한 고 황병하 선생이 번역하기로 계약되어 있었으나 1998년 불의의 사고로 타계한 까닭에, 조구호 선생이 이를 이어받아 처음부터 다시 번역한 것이다.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작품은 지금까지 여러 군데 출판사에서 번역되었고, 또 국내 독자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지만, 번역 대본으로 사용하고 있는 판본이 영어본이거나, 그마저도 중역이 아니면 출처 불분명한 번역본(중복 출판)을 사용한 경우가 많았다. 조구호 선생은 기왕에 나온 작품 중에서도 뛰어난 번역이라 할 수 있는 안정효 선생의 번역(문학사상사, 『미메시스』가 선정한 최고의 번역가와 번역작품)에도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보고, 보다 원전에 충실한 번역을 하고자 하였다. 단적인 예로, 문장의 흐름을 임의로 끊지 않았다는 점(원본에 있는 구두점과 번역서에 있는 구두점이 같다)과 단락 구분을 임의로 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옮긴이는 “스페인어로 씌어진 원본을 ‘단 하나의 가감도 없이’ 번역하려 노력”하였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번역자는 또, 흔히 번역 과정에서 하는 우리말 교열이나 윤문에도 주의했다. 교열 · 윤문이 심할 경우, 우리말로는 쉽게 이해가 될 수 있지만 원문의 의미를 해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작품의 첫머리(1장)에서는 “세상이 생긴 지 채 얼마 되지 않아 많은 것들이 아직 이름을 지니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들을 지칭하려면 일일이 손가락으로 가리켜야 했다.”라고 한 대목이 나온다. 그래서 나중에 가서야 ‘얼음’이라는 사물이 나오는데, 이때 이전까지는 ‘얼음처럼 차가운’이라는 비유는 쓸 수 없는 것이다. 나중에 그 사물이 ‘얼음’으로 불렸을 때 이후에야 비로소 ‘얼음처럼 차가운’이라는 비유가 성립될 수 있다. 그렇지만, 다른 번역본들은 원본에는 없는 이런 비유를 우리말 교열 · 윤문 과정에서 집어넣거나 창작해 낸 것이다.
또한,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사용한 다양한 어법 구사, 언어유희를 원문 그대로 살린 대목도 주목된다.
예를 들면, 안정효 번역본(문학사상사, 57-58쪽)에서는 “그들은 함께 모여 앉아서 끝이 없는 지루한 얘기들을 주고받으며, 똑같은 농담을 몇 시간씩 되풀이하고, 거세시킨 수탉 얘기를 자꾸만 계속했다. 얘기가 끝나면 얘기하던 사람이 그 얘기를 또 듣겠느냐고 묻고, 그러면 둘러앉은 사람들은 그 얘기를 또 해달라고 하고, 그러면 같은 얘기를 또 하고 ……혹시 누가 그 얘기를 듣기 싫다 하더라도 그는 그 얘기를 되풀이했고, 얘기를 또 해주랴고 물었을 때 아무 대꾸가 없어도 또 그 얘기를 되풀이했고, 그 얘기가 자꾸만 계속되는 동안에는 아무도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밤이 새도록 똑같은 얘기는 끝없이 되풀이되었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이를 조구호 선생은 “함께 모여 앉아 끝없이 얘기를 주고받고, 똑같은 농담을 몇 시간씩이나 되풀이하고, 거세시킨 수탉 얘기를 신경질이 날 정도까지 비비 꼬아서 복잡하게 만들었는데, 얘기하는 사람이 그 얘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거세시킨 수탉 얘기를 또 들려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어, 얘기를 듣는 사람이 그러라고 대답하면, 얘기를 하는 사람은 듣고 싶다고 대답하고 부탁한 적이 없으며 단지 거세한 수탉 얘기를 그들에게 해 주는 것을 원하는지만 물었다고 말하고, 얘기를 듣던 사람들이 아니라고 대답하면, 얘기를 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대답하라 부탁한 적이 없으며 단지 거세한 수탉 얘기를 그들에게 해 주는 것을 원하는지만 물었다고 말하고, 얘기를 듣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있으면, 얘기를 하는 사람은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부탁한 적이 없으며 단지 거세한 수탉 얘기를 그들에게 해 주는 것을 원하는지만 물었다고 말하고, 얘기를 듣던 사람들이 자리를 뜰라치면, 얘기를 하는 사람은 자리를 뜨라고 부탁한 적이 없고 단지 거세한 수탉 얘기를 그들에게 해 주는 것을 원하는지만 물었다고 말하는 등, 그런 식으로 며칠 밤이 새도록 지속되는 지독한 모임에서 밑도 끝도 없이 장난을 쳐 대곤 했다.”라고 번역한다.
앞의 번역에서는 원문이 축약되어 있고 가르시아 마르케스 특유의 언어유희를 느낄 수가 없는 반면, 조구호 선생의 번역에서는 원문에 대한 충실함과 함께 ‘언어유희’를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세계 문학 속에서 큰 위상을 차지하는 21세기를 여는 작가
세계 문학사의 중심 무대 밖에 머물러 있던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서서히 중심으로 이동하게 된 것은 20세기 중반 이른바 ‘붐(Boom) 세대’의 등장과 더불어서였다. 특히,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카를로스 푸엔테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보르헤스 등의 일군의 작가는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역량을 전 세계에 과시하였다.
그리하여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23년 동안 생각하고 18개월에 걸쳐 집필한 『백년의 고독』이 1967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수다메리카(Sudamerica) 출판사에서 출판되었을 때는 전 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기에 이르렀다.
이 작품은 비평가뿐만 아니라 독자들의 즉각적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출판된 지 몇 개월 만에 동서 유럽의 20개 언어로, 현재는 세계의 거의 모든 언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독자들, 특히 ‘고갈의 위기’에 처해 있는 작가들의 애독서가 되고 있다.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 작품으로 소위 ‘소설의 죽음’이라는 주장에 반기를 들게 했고, 결국은 밀란 쿤데라로 하여금 “소설의 종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 특히 프랑스인들의 기우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동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에게는 어불성설이나 다름없다. 책꽂이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꽂아 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라는 말로 소설의 부활에 대해 언급하도록 만들었다.
세계 문학사의 한 획을 그었고, 앞으로도 노력 여부에 따라 문학사를 바꿀 가능성이 예견되는 그의 눈부신 글쓰기는 현대를 멋지게 장식하면서 21세기를 여는 초석이 될 것이다.
마술적 리얼리즘 : 또다른 리얼리즘의 극치
『백년의 고독』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모든 것이 결집되어 그 절정을 이룬다. 이 작품은 신화적 요소를 도입하여, 우르술란과 호세 아르까디오의 마콘도라는 도시의 건설을 그리고 있다. 이 둘은 서로 사촌간으로 둘 사이의 근친상간으로 인해 돼지꼬리가 달린 자식이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에 따라, 아무도 닿지 않는 곳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기 위해 고향을 떠난다. 초기의 외부와의 접촉은 멜키아데스를 중심으로 한 집시들의 방문이었고, 이들은 신기한 외부 문물을 마을 주민들에게 소개하게 된다. 이 신기한 외부 문물은 호세 아르카디오에게 외부 세계의 과학적인 지식을 받아들이도록 자극하는 기제가 된다. 마콘도의 고립은 오래 지속되지 않고 시장의 등장, 내전, 철도의 건설, 외국인 바나나 공장의 건설 등의 사건을 통해 외부 세계와 접촉하게 된다. 그
백년의 고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 소설
324p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며,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리얼리즘의 창시자로도 널리 알려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대표작 『백년의 고독』이 국내에 최초로 완역, 출간되었다. 민음사는 이 작품을 독점 계약하여 아르헨티나에서 1967년 처음 출판된 판본을 바탕으로 완역하여 출판했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전세계 30여 개국에서 번역 출판되었으며, 2천만 명의 독자를 사로잡은 소설이다. 민음사에서 독점 계약한 이 작품은, 민음사 보르헤스 전집을 완역한 고 황병하 선생이 번역하기로 계약되어 있었으나 1998년 불의의 사고로 타계한 까닭에, 조구호 선생이 이를 이어받아 처음부터 다시 번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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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평론가
5.0
이 소설이 없는 20세기 문학사를 상상할 수 없다. (난이도 중)
정환
5.0
가장 뜨겁게 들끓었던 것일수록 곧이어 식어버릴 순간의 체감은 그만큼 더욱 서늘해진다. 금빛처럼 화려하고 전쟁처럼 혼란스러웠던 만큼이나 제아무리 오래 살았건, 시끄럽게 살았건 인간의 죽음은 백 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고작 한 문장만큼만 발한다. 죽음 앞에 요란할 것 없이, 인간의 삶은 발버둥 쳐봐야 세월의 호수에 조그마한 물장구도 일으킬 수 없는 한없이 가벼운 무게의 삶이다. 백 년에게 죽음은 한순간의 점일 뿐이며, 따라서 백 년에게는 죽음보다는 오랫동안 늙어가는 것이 더 많은 문장이 따른다. 아무것도 모를 젊은 시절의 고요한 정적은 한낱 외로움에 불과했다고 말하지만 실은 가장 두려워한 것이기도 했다. 우리는 소리 지른 것만이 나라는 존재를 세상에 각인시키는 수단이라 여겼다. 시끄럽게 울고, 시끄럽게 소리 지르고, 시끄럽게 사랑하고, 시끄럽게 살아갔다. 그러나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나를 잊지 않는 건, 남아있는 것들에게 새긴 기억이었다. 젊은 날의 어리석음과 사랑, 오만함은 훗날의 덧없는 후회밖에 남아있지 않은데, 오랜 세월은 앞으로 감당하고 기억했어야 할 옛날의 추억마저 앗아가기에, 남은 것은 세월이 새겨놓은 헌 가죽의 주름과 내면의 정적이다. 고독을 죽음으로 받아들였던 우리가 시끄럽게 살아가는 것은 시끄러운 세상에 나라는 존재를 각인시키기 위한 방법이 아니었다. 죽음은 말 그대로 한순간일 뿐. 인간은 죽을 때가 오면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을 수 있을 때 죽기에.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건 죽음이 아닌 늙는 것이었다. 그러니 고독은 죽음이 아닌 노화다. 죽는 것보다 늙는 것이 더 두렵게 느껴졌다. 지금 나의 모든 행동들이 내 뼈와 피부에 새기는 것보다, 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세월이 불러일으킨 망각의 바람을 견뎌내는 것이 더 중요할 테니까. 고독이 익숙해진다는 것은, 그 모든 소음을 잊었다는 증거. 시끄러운 세상 자체를 오랫동안 견뎌내는 것. 소음에 함께 동화될 것이 아니라, 끝내 고독을 인정하는 것. 내가 더듬고야 말 향수는 지금 어디에 베어 있을까. 내가 마지막으로 떠올릴 사랑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고, 나는 나를 어떤 사람으로 가꾸어 나갈까. 내 자존심을 위해 싸우는 일들이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이 모든 것들 중에서 어떤 것들을 껴앉고서 고독을 맞이하련 지. 만들었던 황금 물고기를 금으로 녹이고, 다시 황금 물고기를 만드는 일의 반복. 꿰맸던 단추를 풀고 다시 꿰매는 일의 반복. 지나간 일들을 수만 번 회상하며 닳아진 기억들에서 더 이상 향수가 남아있지 않은 채 최종적으로 무감각해질 때까지의 시간. 끊임없는 고독의 되풀이. 덧없는 삶의 마무리. 이 늙어가는 기분. 게다가 이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무의미한 허무. 백년의 고독은 이런 것들이다.
파니핑크
3.5
캐릭터 이름 확인에 백 년이 걸리긴 하지만 익숙해지면 재미는 있다.
백_
2.0
백 년 동안 읽는 기분이 들게 한다는 게 가장 큰 단점이다
서명보
4.0
콘돔 사주고 싶다
진태
5.0
고독은 결과가 아니라 존재다
홍준영
4.5
끝나지 않은 이야기. . "많은 세월이 지난 뒤, 총살형 집행 대원들 앞에 선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은 아버지에 이끌려 얼음 구경을 갔던 먼 옛날 오후를 떠올려야 했다."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난 뒤 다시 이 유명한 첫 문장을 읽으면 감회가 새롭다. 물론 '백년의 고독'이 읽는 이로 하여금 부엔디아 가문과 백 년을 동행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하는 흡입력 있는 이야기여서 그렇기도 하지만, 결말에 이르러서야 이 소설 전체가 하나의 예언서(멜키아데스의 양피지)이며, 첫 문장의 '-해야 했다'라는 어미부터가 그 사실을 드러내고 있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이어지는 "세상이 생긴지 채 얼마 되지 않아 많은 것들이 아직 이름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라는 문장은 읽는 이에게 즉시 다음 단서를 제공한다. 이 소설은 그저 예언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예언서, 천지의 창조와 만물에게 이름을 준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예언서, 성서라는 점을. 이때 읽는 이는 비로소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 물론 마르케스는 성서와 '백년의 고독'을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안일한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가령 마꼰도의 건설자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는 소설 속 태초의 인간이자 모든 인물들의 조상이라는 점에서 아담으로 볼 여지도 충분하지만, 그가 마꼰도를 건설하게 된 계기는 이웃 쁘루덴시오를 살해한 후 감행한 도주였다는 점에서 태초의 살해자 가인(그 역시 아벨을 죽인 후 추방되어 방황하며 큰 족속들의 조상이 된다)으로 볼 수도, 무리를 이끌고 새로운 낙원을 찾는 여정을 이끈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찾는 모세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어떤 해석을 지지하느냐에 따라 태초의 마꼰도를 이해하는 방식 역시 크게 달라진다. 태초의 마꼰도는 '죽음이 없는 공간'으로 아담이 머물던 에덴 동산일 수도 있고, '가인의 낙인'처럼 '돼지꼬리의 저주'가 음산하게 가문을 맴도는 죄악의 씨앗일 수도 있고, 모세의 개척 이후 같은 실수와 과오를 순환적으로 반복했던 가나안 땅일 수도 있다. 감상은 읽는 이에게 맡겨졌지만, 아마 이 모든 상징이 녹아들어 있다고 보는 게 가장 타당할 것이다. 마르케스가 소설의 다른 부분에서도 문학의 모호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성서의 상징들을 복합적으로 배열하는 작업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가령 '레메디오스'라는 이름을 가진 세 여인이 그렇다. 첫 레메디오스는 관계 없이 쌍둥이를 사산하고 죽으며, 두 번째 레메디오스는 홀연히 빨래들과 함께 승천하는데, 이러한 동정녀 출산과 승천의 모티브는 합쳐졌을 때 비로소 성모 마리아를 암시한다. (그런만큼 세 번째 레메디오스가 수녀원에 끌려가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는 점은 마르케스의 반가톨릭적 태도와 맞물려 미묘한 냉소와 풍자의 뉘앙스를 형성한다.) 그러나 마꼰도에 정부가 파견한 시장이 들어오면서 읽는 이는 잠시 성서적 퍼즐맞추기를 미루어야 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가 소설에 침투하며 역사라는 더 가깝고 친밀한 레퍼런스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 마꼰도에 시장이 들어오고(그와 함께 마을에 죽음이 시작된다-이는 마꼰도를 에콰도르나 중국 같은 현실 속 국가로 간주하고 소설을 읽어도 좋다는 작가의 허락이다) 나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많은 면에서 영화 '아이리시맨'을 떠오르게 한다. 화법에서는 장애물이나 현학적인 대목 없이 술술 넘어가는 유려한 태도가 닮았고, 스케일 면에서도 수없는 등장인물들과 두어 세대를 포괄하는 시간대가 비슷하게 방대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유사점은 짙은 고독과 무상함이라는 정서를 전달하는 수법이다. '백년의 고독'에서 역사를 참고한 부분은 크게 두 가지로, 아우렐리아노 대령의 반정부 전쟁과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가 목격하는 바나나 농장에서의 학살이 그것이다. 마르케스는 그 현장으로 뛰어들어가 인물들의 행적을 자세히 좇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두 사건 모두 처음부터 끝까지 세밀하게 서술되며, 작가는 원근을 조절하며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섬세하게 조망한다. 읽는 이는 정부군이 마꼰도 주민을 학대할 때 대령과 함께 분개하며, 무력 봉기가 일어날 때 같이 통쾌해하고, 대령이 총살대 앞에 섰을 때 똑같이 긴장하다가(첫 문장은 낚시였다!) 그가 풀려났을 때 역시 숨을 돌린다. 바나나 농장에서의 학살과 그 생생한 묘사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두 사건은 모두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잊혀진다. 소설은 끊임없이 그 점을 강조한다. "'오오! 그럼, 신부님도 믿지 않으시는군요.' 아우렐리아노가 말했다. '뭘 말인가?'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 서른두 번이나 반란을 일으켰고, 모두 패배를 했었다는 사실을 말이에요. 군대가 삼천 명의 노무자를 몰아세워 기관총으로 난사했다는 사실, 그리고 화차 이백 량이 연결된 열차로 시체를 운반해 바다에 버린 사실 말이에요.'" 대령이 노쇠했을 때부터 이미 반정부 게릴라전은 전설 비슷한 취급을 받으며 그의 황금 물고기도 기념품이 되어가고 있었으며, 대령이 죽고 나서 전설은 신화가, 다시 잊혀진 신화가 된다. 바나나 농장의 학살은 한술 더 떠, 참사를 목격한 호세가 고향으로 귀환하자마자 주민들의 기억을 모두 지운다(이것도 마술적 리얼리즘의 일부인지, 아니면 역사와 기억마저 통제하는 권력을 고발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호세는 죽는 날까지 "삼천 명 이상이었는데, 죄다 바다에 버려졌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있거라."를 읊조리며 진실을 간직하다 홀로 죽는다. 읽는 이는 너무나 긴박했던 순간들이 세월 앞에 무참히 스러지는 대목을 바라보면서, '아이리시맨'의 늙은 프랭크가 더 이상 지미도, 러셀도 존재하지 않으며 누구도 그들을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을 때 느꼈을 거대한 무상감과 야속함에 사로잡히게 된다. (셋 다 역사의 한복판에서 종횡무진하다 결국 고독한 죽음을 맞는다는 점도 '백년의 고독'과의 감정적 연결고리를 만들어준다.) . 그렇다면 마르케스가 바라보는 역사의 결말 역시 '아이리시맨'의 그것처럼 씁쓸하고 서늘한 것일까. 언뜻 보기에는 그렇다. 태초에 우르술라가 걱정했던 '돼지꼬리의 저주'가 비로소 실현되고 가문을 구원했어야 할 유일한 메시아는 개미떼에게 잡아먹히며,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그의 이름은 성서에서 멸망의 도시를 암시한다)가 멜키아데스의 양피지 예언을 비로소 해독하는 순간 가문은 바람에 날려 소멸하고 만다. 소설은 일말의 에필로그나 후속 서술 없이, 그렇게 느닷없이 이야기를 끝낸다. 열린 문 틈새로 관객을 바라보는 프랭크의 고독한 눈빛이 남기는 여운처럼 소설은 말할 수 없는 고독감을 남긴다. 이야기를 되짚어도 타당한 결말이다. 마꼰도에 외부인이 들어올 때마다 재앙이 있어왔다. 육로로 집시들이 들어오자 불면증의 저주가, 마차로 시장과 군인들이 들어오자 전쟁의 저주가, 철도로 바나나 회사가 들어오자 대홍수의 저주가 있었던 걸 감안하면 공항(!)을 놓자는 가스똔의 제안이 강풍으로 인한 멸망으로 이어졌다고 추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읽는 이는 잠시 잊었던 성서의 존재를 기억해야 한다. 소설의 서두가 천지창조와 인류의 시작을 다룬 창세기와 대응한다면, 예언이 성취되고 현세가 소멸하는 결말은 요한계시록과 대응한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멸망의 책이 아니다. 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하늘과 땅은 불타 사라지지만, 요한계시록의 엔딩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과 새 하늘, 새 땅이다. 이는 즉시 죽음에서 돌아온 멜키아데스(또는 멜키아데스의 망령)가 남겼던 예언을 상기시킨다. "마꼰도가 부엔디아 가문의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유리로 지은 거대한 집들로 이루어진 번쩍거리는 도시가 될 거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광경은 소설 속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야기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죽은 메시아는 부활해야 한다. 새 하늘과 새 땅, 번쩍거리는 유리도시가 지상에 강림해야 한다. 예언은 아직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에 그 도시가 내려와야 하는가? 이 점에서 요한과 마르케스는 같은 대답을 내놓는다. 바로 네가 있는 그곳에. 마르케스는 반복되는 현실 속에서 고통받는 라틴 아메리카, 나아가 세계를 위해 이 소설을 쓴 것이다. 페이지 바깥, 생동하는 삶의 현장 속에서 읽는 이가 고독과 싸우고 서로 연대할 때, 형과 동생이, 정부와 시민이, 기업과 노동자가 손을 맞잡을 때 비로소 이 작품은 완성된다. 성서가 신의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가짐과 경건한 삶을 촉구하기 위해 요한계시록을 미완의 책으로 남겨둔 수법을 마르케스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모방한 것이다. 그렇게 읽는 이는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야 마르케스가 보이지 않게 써둔 결말을 목도한다. 아멘, 주여 오시옵소서. . +인물들 하나하나가 매력과 개성이 흘러넘친다. 읽는 순간에는 흠뻑 빠져들지만 덮고 나서 세세한 에피소드들을 기억하려면 압도적인 분량 때문에 버거운 책이다. 내가 왜 그 인물을 인상깊게 봤는지 알고 싶으면 다시 책을 봐야 한다. +민음사 전집 판본으로 봤다. 형태야 민음사 형태고, 번역이 매끄럽지 않다. 원어인 스페인어로 봤으면 훨씬 재미있고 생생했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자가격리 기념 서문학 걸작선]
19thnight
4.5
이름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헷갈리지 않고, 분량도 생각만큼 많지 않다. 읽는 내내 나를 압도했던 것은 이름들도 분량도 아닌, 벗어날 수 없는 고독이었다. 밝은 성격에 외국 문물을 접해 현대화된 사람이라도 부엔디아 가문의 일원이라면 벗어날 수 없었던 고독. 말도 안 되는 판타지들과 라틴아메리카의 고단한 현대사가 섞여 부엔디아 가문의 고독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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